풍요로운 사상, 물질주의가 사람을 공허하도록 만든다.
오래전 태어나자마자 신분이 정해지고 자신이 맡은 직업을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열과 성의를 다하여 충실하게 수행하려는 '천직'이 종교 개혁 이후 사라진다.
'평등, 자유, 독립'이라는 일종의 '약속' 속에 살아가게 되면서 현대의 개인은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고,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유일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인은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살아간다. 텅 빈 마음을 채우려는 '도장 깨기'식 여행이 그러하다.
살아가는 '가치'를 생각하기보단 당장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삶을 살아간다.
더불어 치열한 경쟁, 빈번한 변화, 고강도의 삶으로 말미암아
현대인은 자꾸만 '나 자신'과 '의미' 따위는 사치가 되어버린다.
이제는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패스트푸드처럼 맛보다는 열량을 채우며 살아가기도 바쁜 세상이다.
'중간 섬'은 공허하다.
매일 반복되는 출퇴근의 일상, 익숙한 세상 속에서 나와 '주변'을 관찰할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 집은 기능적인 가치를 지닐뿐 정신적인 의미를 제공하지 않지만 누구는 어디 살더라 하면서 비교되는 세상 속에서 '집'은 오히려 짐이 되어버리고, 집을 위해 살게 되는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어떤 목적지를 향해가는 지금에 집은 '중간 섬'이라는 느낌이다.
지금 살아가는 인간관계, 주변을 실질적으로 살피고 관찰하며 그 안에서 긍정적이 새로운을 발견하기 위한 시간을 갖지 못한다면 마음속에는 공허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소비 주의'는 물질 만능주의, 쾌락주의, 점유주의와 같이 공허하게 만든다.
많은 물건을 걱정 없이 사고 싶고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고 싶다는 '재정적 자유'를 꿈꾸게 된다.
이는 끝이 없다.
수없이 많은 사회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것,
현혹시키며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세상,
분업화된 현대 시스템에서 사람들은 무언가에, 누군가에게 필요한 '도구'로서의 운명을 살아간다.
'분업체계'는 딱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 잘해내면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멍칭옌, 중국 정법대학 사회대학원 지도 교수는 사회학은 우리에게 나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을 관찰하는 '안경'을 <우리는 왜 공허한가>제공한다.
현대는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개인과 개체에서 찾고자 하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이 텅 비어진 공간이 되어버린다.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힌 현대인의 운명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스마트폰은 더 이상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일종의 '신체 기관'이 되어버린 현대사회,
스마트폰을 통해 게임을 하며 쉽게 빠져든다.
게임을 즐기기 위한 시간적, 물질적 비용이 이전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공허해진다.
이는 배달, 소비 등 전반적인 부분에서도 적용된다.
쉽게 접할수록 불안과 공허는 함께 따라온다.
'탈맥락화'되가는 사회
자극적인 기사 제목으로 어그로를 끄는 기자들이 참 많다는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의 관심은 돈이 되기 때문에 자극적으로 제목을 쓰지만 내용을 전혀 다른 글이거나 이해하지 못하도록 '탈맥락화'를 더욱 부추긴다.
사건의 진상에 대한 객관적 이해는 점점 어려워지고 근거 없는 상황까지 난무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내가' 본 행위'만 이해하고 판단하며 사건의 진짜 상황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지 않는다면 더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공허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계속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는 이들에게 순간 "응?" 하고 멈추게 하고 자기성찰하는 질문을 던지는 ≪우리는 왜 공허한가≫ 책, 단순하게 살기 위해서는 복잡함도 알아야 하듯이, 공허한 이유는 주변이 풍요롭고 변화가 다채롭기 때문이다. 익숙함에 취해, 보이지 않는 그 시스템에 물들지 말고 깨워있자. 공허한 것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