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변명≫을 읽고 있노라면 슬프다. 사형이 되지 않아도 노인이었고 곧 세월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그를 30표, 80표로 끝내 사형되고 만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지혜롭지 못하다고 말하고 다녔다. 메타인지하는 그의 태도를 본받고 싶어진다.
자신을 알았고, 겸손했고, 질문법을 통해 타인이 본인이 스스로 깨닫게 하는 달인이었지만 그 덕에 미움을 받고 살았다. 솔직하게 살아도 미움받아 죽는다면 그 죽음을 수용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멜레토스는 왜 이리 무식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무식한 사람과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 벽이랑 대답하거나 답정너이다.
소크라테스는 질문법을 통해 배심원들을 흔들었지만 끝내 무식한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화가 날 수도 있고 어처구니없는 내용으로 사형까지 가는 그는 기개가 장난이 아니었고 침착했다.
배심원들이 죽음을 결정할 수 있었겠지만 소크라테스처럼 '너 자신을 알 수 있었을까!'
문득 일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사명을 가지고 있으면 무섭겠다는 생각이 났다.
직장을 다녀보니 사내정치를 잘하는 사람이 가장 무섭고 힘들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무식해도 일 1도 못해도 사내정치를 잘하면 잘 다닐 수 있는 조직을 보며 나 또한 오염될까 두렵기도 했다.
소크라테스는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고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답은 본인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변명≫을 통해 읽어볼 수 있다. 끝내 사형이라는 사실을 알고 읽었지만 조금이라도 생명이 연장되었다면 더욱 많은 내용을 우리에게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레고르는 어느 날 벌레로 변신하게 된다. 끝까지 자신을 수용하지 못하고 부정하던 그는 누이동생을 통해 식객으로 변했고 누이동생의 결정을 통해 잠자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열심히 일하면서 집에 보탬이 되던 그가 한순간 변신으로 그전까지 누렸던 안락과 행복은 사라지고 말았다.
괴물 같은 목소리라도 말을 할 수 있었음에도 끝내 말하지 않고 소통하지 못했고, 아버지는 아들을 끝내 아들로서 받아들이지 못했다. 가족들은 그레고르를 가족구성원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닫힌 문 너머로 가족들은 침묵했다.
끝내 희생이라고 말해야 할지, 끝내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죽고만 그는 가족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을까?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긴박하게 돌아가는 ≪변신≫은 가족을 위해 성실하게 살아가면서도 가족과의 부재를 통해 고독과 불안함을 엿볼 수 있다. 열심히 회사에서 식사시간까지 9시간을 소비하고 온 우리는 가족과의 얼마나 많은 대화와 공감을 하고 있는지, 회사에서 돈 벌어오는 것보다 가족 안에 있는 더 소중한 것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많은 사색을 하게 한다.
≪변명≫과 ≪변신≫을 통한 죽음에 대한 인문학을 접해 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