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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처녀귀신
책을 처음 보자마자 조금 놀랐다. 처녀 귀신. 아주 낡고 촌스러운 이름이라서 책 제목으로는 꺼려지는 이름이다. 그러나 이 책, 《처녀귀신》이 다른 이름을 달고 있었다면 책은 그럴듯하게 보일 수는 있겠지만 이 책의 깊이가 반감될지도 모를 일이다.
부제는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다. 부제의 느낌으로 짐작해볼 때, 이 책은 ‘조선시대에 죽은 한 많은 여인이 귀신이 되어서 복수한다’에 초점을 맞춘 듯 보인다. 다소 자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책 내용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왜 조선시대의 여인이 왜 한을 가진 채 죽은 건지 그리고 왜 처녀 귀신이 되어 나타났는지에 대해 연구한 책이다. 한마디로 ‘왜?’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온 처녀귀신은 한낮 유희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왜 죽었고 왜 귀신이 되었는지 보다는 단순히 그녀의 외모에 치중했을 뿐이다. 하얀 소복에 길게 풀어헤친 머리 그리고 옵션으로 입가에 흐르는 피까지. 분명 죽을 때의 모습은 달랐을 테지만 죽고 나서 귀신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늘 한결같다. 그래서 진부하고 이제는 식상하다. 그래서 촌스럽고 이제는 놀이공원 귀신의 집에서 마주쳐도 별로 놀랍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까 책 《처녀귀신》은 늘 겉모습으로만 판단했던 처녀귀신으로 재조명하는 계기를 가져다준 셈이다.
처녀귀신 이야기는 늘 틀에 박혀 있다. 조선시대 처녀가 한을 품고 죽는다. 권위 있는, 예를 들면 사또 같은 남자 앞에 귀신으로 나타나서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남자가 사건을 해결하고 귀신의 한을 풀어준다. 그 보답으로 귀신은 남자가 앞으로 출세할 수 있게 운길을 열어준다.
이 책은 처녀가 귀신이 되는 바탕에는 조선시대 ‘남존여비사상’에 있다고 설명한다. 항상 여자는 남자에 대한 정절을 지켜야 하는 대상이 되고, 죽어서도 남성의 힘을 빌어 한을 풀어야한다. 모순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귀신으로 나타나 산 사람을 해칠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귀신이 왜 한을 스스로 풀지 못하는 걸까. 왜 복수를 꿈꿀 수 없는 건가. 물론 스스로 복수를 하는 처녀귀신도 있으나 어쨌든 그녀가 귀신이 된 바탕에는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성에 대한 비난이 담겨 있다.
또한 처녀 귀신은 남자 귀신과도 비교된다. 남자 귀신은 죽어서도 가정을 지키고 인격과 인품을 가지고 있는 양반이지만 처녀 귀신은 그저 한 많은 ‘계집’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남자 귀신은 죽어서도 여성을 소유할 수 있고, 그에 걸맞은 권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비극적이다.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이 또한 ‘한’이 될 수도 있다. 살아서 여성은 제 목소리를 낼 수 없고, 낸다고 한들 산 사람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에서 그친다. 결국 처녀귀신 또한 남자들의 이야기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또한 남성우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처녀귀신 이야기 태생이 남자들의 유희거리로 시작되었을지 몰라도 그 내용만큼은 은폐된 여성의 한을 공론화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처녀귀신의 외모만 상상할 게 아니라 처녀 귀신의 목소리를 들어볼 때다. (물론 조선시대 처녀귀신이 아직도 떠돌아다니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