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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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미로서의 엄마

 

『엄마를 부탁해』는 작가 신경숙의 또 다른 소설인『외딴방』의 연장선상에 있는 소설이다. 시기적으로 볼 때,『외딴방』에서는 작가가 고향을 떠나 서울의 ‘외딴방’으로 건너와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 했다면, 『엄마를 부탁해』는 ‘외딴방’을 떠나 그 이후의 시간을 이야기 하고 있는 듯하다. ‘외딴방’에 살던 구로공단의 어린 공원은 어느새 성장하여 그녀의 책이  점자책으로 발행되고, 자주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는 작가가 되었다. 작가의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야간학교를 다니며 ‘외딴방’에서 같이 지내던 큰오빠는 어느새 아파트 전문 건설회사 홍보부장이 되었고, 여동생은 어느새 약사이자 아이가 셋이나 있는 엄마가 되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살면 모두들 그렇게 된다는 듯이 작가를 비롯한 형제들은 저마다 바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바쁜 그들의 생활을 온통 뒤엉키게 만드는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엄마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부터 시작된다.  


  이 소설에서 독특한 점은 ‘나’는 없고, ‘너’ ‘그’ ‘당신’만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고백하는 말투이면서도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쓰여지고 있다. 이러한 장치가 이 소설에서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이며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는 마치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인 나를 지목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건 내 얘기도 되지만 너의 얘기도 된다는 듯 말이다. 그 덕분에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죄책감? 같은 것에 시달렸다. 엄마의 행방불명 이후 각자가 엄마에게 지었던 지난날의 잘못들을 모두 떠올리며, 엄마가 돌아오면 용서를 빌고 자신의 과오를 씻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 죄책감은 소설 속의 주인공들 몫만이 아니라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모든 자식들, 아들딸들의 죄책감이었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책을 읽고 싶으면서도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그런 양가적인 감정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의 화자는 엄마를 잃어버린 그 가족들만이 아니었다. 아니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는 화자는 바로 ‘엄마’였다. 엄마는 늘 자식의 이야기만 들어주었다. 자신의 이야기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단지 엄마는 자식을 기르는 엄마로서만 존재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엄마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늙은 엄마가 어리광 섞인 목소리로 오빠! 외치며 마루를 뛰어내리는’ 순간 ‘너’가 낯설어 했던 그 순간이 사실 나도 낯설었다. ‘너’와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깨닫는다. “너에게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다. 너의 엄마에게도 첫걸음을 뗄 때가 있었다거나 세 살 때가 있었다거나 열두살 혹은 스무살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너는 처음부터 엄마를 엄마로만 여겼다.” 
 

   이 소설의 엄마 역시 김애란 「칼자국」에서처럼 어미로서의 엄마였다. 그런 어미는 자식을 길러내고 나서 자신의 사업을 잃어버린 듯 허탈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네 엄마들이 갱년기를 앓는 것이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엄마는 또 다시 자신의 사업을 찾아 나섰다. 소망원에 매달 45만원을 후원하고, 보육원에 있는 아이를 균이라 이름을 지어주고 보살펴 주었다. 물론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엄마는 끝까지 그 일을 해내지 못했지만 끝까지 자신의 엄마로서의 삶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이 새삼 엄마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소설의 화자는 tv속에 통속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편지에 눈물자국이 있다든지 같은 우리의 심금을 자극하려는 통속적인 장치가 곳곳에 있어서 오히려 나를 식상하게 만들었다. 물론 엄마를 생각하면 으레 그렇듯 눈물이나 나는 것은 당연하나 그것을 조금 다른 각도로 풀어주었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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