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심리학
데이브 그로스먼 지음, 이동훈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매우 우연한 기회였다. 지난 2008년 일본의 밀리터리 만화가인 고바야시 모토후미 화백의 만화책 《무기와 폭약》을 보았는데, 그 책의 저자후기에 이 책이 소개되어 있었다. 아니, 그 저자후기 전체가 이 책의 독후감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이 책에 대해 길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 글을 보고 이 책에 대해 매우 큰 흥미를 느꼈다. 어떤 책인지 꼭 읽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크게 실망도 느꼈다. 당시만 해도 이 책이 일본에서는 번역되었는데(번역명 ??における「人殺し」の心理?, 역자 安原和見)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슬슬 잊혀져 갈 때쯤 너무나 놀랍게도 이 책이 한국어판으로 나온 걸 알게 되었다.

 

저자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동류 인간을 죽이기 싫어한다는 전제로부터 이 책을 시작한다. 그러나 인간은 한편으로 ‘살인에 관련된 사업’인 전쟁 또한 끊임없이 해왔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전시에조차 적을 향해 제대로 사격을 가하는 병사들의 비율이 20%가 안 넘더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병사가 살인을 싫어하는 마음을 극복하고, 전시에 적을 향해 제대로 사격을 가하게 하기 위해 미군은 실전과 가급적 똑같은 환경에서 사격훈련을 할 수 있는 사격훈련 프로그램과 시설(한국군 용어로는 ‘자동화 사격장’이라고 한다)을 개발했다. 그 결과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사격비율은 무려 90~95%까지 올라갔다.

 

또한 한편으로 미군은 베트남 전쟁 때부터 인사 배치의 효율화와 합리화를 추구해왔다. 과거의 전쟁, 예를 들면 제2차 세계대전 같은 경우 병력의 기초훈련과 전선 투입, 철수는 철저히 부대, 최소한 중대 단위로 이루어졌다. 병사가 기초훈련을 함께 받은 훈련소 동기들과 모두 함께 같은 날짜에 전쟁터에 갔다가 역시 모두 같은 날짜에 귀국한다는 얘기다. 부대원 간의 결속력이 크게 증대되는 심리적 효과는 있다. 그러나 번거롭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기초훈련을 마친 신병을 개인 단위로 전지인 베트남에 보내고, 일정한 파견 기간이 끝나면 역시 개인 단위로 귀국시키는 새로운 방식을 적용했다. 병사를 그저 수치적 전투력으로만 파악되는 ‘자원’으로 여기는 시각으로 보면 이만큼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제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병사들간의 결속력과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심리적 안정이라는 무형의 이득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전쟁터에서의 살인이라는 극한 체험에 따르는 후유증과 결합하여 전쟁 후 PTSD 환자의 대량발생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미국 사회를 강타했다.

 

저자는 이로부터 미국 사회의 폭력 증가의 원인을 찾는다. 미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기에 군인들을 훈련시켰던 방법과 원리상 차이가 없는 방식으로 아이들의 살해에 대한 저항감을 없애고 있다는 것이다. 묻지마 식의 가혹한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와 드라마 등 대중매체, 일인칭 슈팅 게임(FPS), 광선총 사용 슈팅게임(LGS) 등이 그 구체적인 수단인 ‘살인 시뮬레이터’로 거론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미디어와 게임은 물론 무기 보유의 자유를 규제해야 미국 사회의 폭력이 감소될 것이라고 하면서 논의를 마친다.

 

내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저자의 주장이 한국의 현실과 의외로 꽤 잘 오버랩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21세기인 지금도 군사 개발독재 시대의 망령이 이 나라 사람들, 특히 기성세대의 머릿속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다. 군사 독재정권은 전국을, 그리고 전국민의 마인드를 병영화시켰다. 그것은 북한과 절대 빈곤이라는 두 상존하는 위협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취약한 정통성을 숨기고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면모가 가장 유감없이 드러난 것은 이 나라의 교육계였다. 아직까지도 이 나라의 10대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는 공부, 그것도 인간과 세상의 의미를 탐구하는 진정한 공부가 아니라 대학입학시험을 치르고 나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공부 뿐이다. 그리고 공부를 가르치는 방식도 철저히 군대식이다. 가르쳐준 답을 시험에서 맞추지 못해 성적이 시원찮은 자에게는 ‘사랑의 매’를 빙자한 ‘무제한의 군대식 기합과 구타, 가혹행위’가 가해진다. 아이들은 이러한 ‘조건형성’을 통해 친구들과(아니, ‘대학입시 경쟁자’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무한경쟁만을 할 줄 아는 ‘원자화된 문제풀이 전사’로 변모하게 되고, 덤으로 폭력을 통해 문제를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배우게 된다. 하지만 타인과의 원만한 관계를 이루기 위한 소통, 화합, 우정, 예절 같은 덕목들은 일절 배우지 못한다. 그리고 감수성 예민한 10대에 몸에 익힌 이러한 생활태도는 아이의 평생을 좌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늘날 한국 10대, 아니 더 나아가 산업화 이후 모든 세대가 겪는 폭력, 일탈, 정신적 문제의 상당 부분은 오직 학업성적만을 강조하며 그 외에 모든 것을 경시한 교육과 사회 분위기에 기인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저자는 비록 미국인이지만 그의 경고는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저자의 의견을 더욱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1990년대~2000년대 들어 시작된 한국 영화계의 심상찮은 분위기이다. 바로 이 시기부터 묻지마식 엽기적 범행을 저지르는 잔혹한 캐릭터, 또는 악당에게 초법적인 제재를 가하는 법집행기관 요원 캐릭터들이 충무로의 간판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그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주유소 습격사건>의 주인공들, <쓰리 몬스터>의 유지호(이병헌 분)나 <공공의 적> 시리즈의 강철중(설경구 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박창이(이병헌 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특징은 저자도 지적한 '1970년대부터 미국 영화계를 주름잡던 폭력적 주역 캐릭터'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특히 <공공의 적>의 강철중은 뭘로 봐도 한국판 <더티 해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한 시대의 대중문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집단 의식 및 무의식을 대표하는 척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한국의 미래는 심히 염려스럽다. 이제 우리도 1970년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철군하면서 앓았던 폭력 바이러스를 앓을 차례가 된 것인가?

 

하지만 이 책에서 나타난 저자의 주장 중 일부는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그의 결론, 즉 “폭력적인 미디어가 사회의 폭력 발생을 부추긴다” 라는 주장은 상당한 문제가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대중문화는 그 문화를 낳은 사람들의 집단 의식 및 무의식의 소산이다. 때문에 대중문화는 사회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아 만들어지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즉, 대중문화와 사회는 상호영향관계이다. 이유없이 잔혹한 범행을 저지르는 캐릭터가 인기 있는 것은 그만큼 대중이 이유없는 잔혹한 폭력에 크게 노출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초법적인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캐릭터가 인기 있는 것은 그만큼 법의 권위가 실추되어 법을 지켜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세상에 대중들이 살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대규모 폭력 사태인 지난 1992년 LA 흑인 폭동의 경우를 살펴보더라도 폭동을 일으킨 직접적 원인은 백인 경찰이 흑인 청년인 로드니 킹을 가혹하게 구타한 것이었다. 그리고 간접적 원인은 미국 사회에 뿌리깊게 퍼져 있던 인종 갈등이라는 사회적 문제였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단순히 미디어만이 인간의 폭력 사용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다. 더욱 근본적인 사회적 불화와 모순이야말로 인간의 폭력 사용을 더욱 더 강하게 부추기는 요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러한 점에 대해 심도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

 

또한 이 책을 접한 군대와 법집행기관의 일부 간부들은 자신들의 이론적 및 현장 경험에 비추어, 저자 연구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2001년 8월, 당시 미국 경찰정책연구회 의장이던 토마스 J. 아베니는 저자와 이메일을 통한 수십 차례의 논박을 치르며 이 책의 정확성을 맹비난하기도 했다(원문은 http://www.theppsc.org/Grossman/Main-R.htm을 참조하라). 저자의 주장과 아베니의 주장 중 어느 쪽이 더욱 진실에 가까운지는 독자 여러분들이 판단할 문제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한(저자도 인정했듯이) 살해학이 더욱 완전한 모습으로 커 나가기 위한 통과의례일 수도 있다.

 

아무튼 앞으로도 그로스먼의 저서를 포함해 이 분야에 관련된 책이 국내에 많이 소개되기를 바란다. 저자의 말마따나 죽음과 살해는 생각하기조차 섬뜩한 일이지만, 동시에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상에 알아야 할 가치가 없는 지식은 없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