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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ㅣ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가끔 산다는게 구차하고 구질구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왜 계속 이런 대접을 받고 살아야하나' 싶기도 하고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모든걸 다 참고 살아야하나' 싶기도 하다. 나 역시 이런 생각을 자주 했다. 아무 일 안생기고 살아도 재미없고 힘든 세상, 세상사람 다 이러고 살겠거니 포기하고 살만하면 친정엄마가 중환자실에 입원하셨고 이제 괜찮아지셨다 싶어 한숨 돌릴 때쯤 다시 식물인간이 되셨고 엄마 돌아가시고 이제 열심히 살아야지 마음을 다잡을때쯤 언니한테 내가 도와줄 수도 없는 힘겨운 일들이 일어나 나한테 밤마다 울며 하소연을 하는지라 지난 한해는 정말 죽고 싶단 생각을 참 많이도 했다. 평생의 절친이라 생각했던 친구가 내 등뒤에서 계속 날 흉보고 다닌단걸 알았을 때도 죽고 싶었고 남편과 하루가 멀다하고 싸울 때 역시 죽고 싶었다.그래도 삶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건 날 힘들게도 하지만 내게 늘 힘을 실어주는 바로 가족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이 책의 주인공, 천지는 언니인 만지와 엄마가 자기의 힘든 마음을 몰라준 탓인지 안타깝게도 열네살, 아직 피어보지도 못한 어린 나이에 자살을 선택하고 말았다. 무엇이 천지를 그토록 힘들게 했을까? 다름 아닌 친구, 화연과 친구들의 은근한 따돌림과 괴롭힘 때문이다. 천지를 왕따시키려고 했지만 끝내 왕따만은 피해갔다고 하지만 왕따까지는 아니라해도 자기를 따돌리고 무시하는 기운을 바보가 아닌 이상 천지도 다 느꼈을테고 열네살 어린 나이에, 그것도 매사를 진지하게만 생각했던 성격의 그녀가 그 모든 걸 감당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천지한테 못되게 군 화연 역시, 여우같이 얄미운, 몹쓸 아이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안쓰러운 아이다. 보신각(중국집)을 운영하느라 늘 바쁜 엄마,아빠를 둔 덕분에 화연 혼자 집에 두는건 불안하단 이유로 아주 어렸을때부터 여기저기 학원을 전전해야 했고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친구들을 자기 곁에 두기 위해 보신각에 데려가 자장면을 사먹이고 노래방비 등과 같은 돈을 계속 써서 친구들의 환심을 사려는 아이였다. 천지한테 그리 못되게 군 것도 점점 더 센 걸 원하는 친구들의 마음을 사기 위한 방법이었다니. 꼭 그런 몹쓸 방법밖에 없었냐고 따져묻고도 싶지만 화연이 입장에서는 '그 방법밖에 없다' ,아주 절실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싶어 한편,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화연이 안쓰럽기도 하다.
"애들이 자꾸 나만 술래 시켜." "안한다고 해." 그렇게 얘기해봤어요, 엄마.
"그래도 자꾸 시켜." "그럼 걔들이랑 놀지 마." 그럼 나는 누구랑 놀아, 언니?
- 우아한 거짓말 P20 천지의 말 中에서
천지가 이렇게 친구에 대한 고민을 넌지시 비쳤지만 엄마와 언니는 그정도쯤은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넘겨버리니 천지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날 천지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못한 언니와 엄마 역시 천지의 자살 이후 얼마나 그 일이 후회되고 미안할까? 아버지의 사고사로 생활전선에 뛰어든 탓에 늘 힘든 엄마는 천지의 고민 쯤 고민축에도 못낀다 가볍게 생각했을테고 진지하고 조용조용한 성격의 천지와 달리 매사 건성건성이고 무뚝뚝한 언니에게 천지의 친구 문제쯤 아무 일도 아닌양 넘길 수밖에 없었겠다 이해가 되면서도 남겨진 엄마와 언니가 뒤늦게 땅을 치고 후회했을 생각을 하니 내 가슴도 같이 저릿저릿해져온다.
그렇다고 이 책에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이런 고통들만 가득한건 아니다. 이 책 곳곳엔 풋 하고 터져나오는 위트 있는 대사와 웃음 또한 가득하다.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큰 딸, 천지와 누구보다 열심히 살면서 슬픔을 이겨내보려는 씩씩한 엄마간의 대화는 올해 초등학교 4학년짜리 아들에게 읽어줘도 박장대소하며 웃을 정도로 재미나다. 맛도 맛이지만 그 구수하고 거친 입담이 듣고 싶어 수고를 마다않고 찾아가게 되는 욕쟁이 할머니네 식당 손님이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천지 자체는 싫지만 같이 놀아준다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실은 천지를 가지고 놀기 바빴던 화연의 '우아한 거짓말' 처럼, 자신의 자살로 마음 아파할 사람들을 생각해 용서한단 5통의 편지를 남기고 간 천지 역시, 말은 용서라지만 실은 자기를 힘들게 만든 친구들과 자기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은 엄마와 언니에게 때늦은 후회와 가슴 칠만큼의 고통을 안겨주고 싶어 '우아한 거짓말'을 남기고 간건 아닌지 천지에게 묻고 싶어진다.
"어른이 되어보니, 세상은 생각했던 것처럼 화려하고 근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리 세상을 버렸다면 보지 못했을, 느끼지 못했을, 소소한 기쁨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애초에 나는 큰 것을 바란게 아니니까요." -우아한 거짓말 '작가의 말' 중에서 -
작가의 말처럼 한번쯤 살아볼만한 근사한 세상은 아니어서 실망할 때도 많고 좌절할 때도 많겠지만 천지가 이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는 작가가 말한 소소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라도, 혹 기뻐할 일이 하나도 없다 해도 내 자살로 살아가는 내내 고통스러울 가족을 생각해서 누구보다 멋지게 살려고 노력해보라고 천지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