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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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고 어느정도 시간적 여유가 생겼을 때 장고 끝에 사본 책이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이었다.
사람의 온전한 감정과 상황을 기가 막히도록 잡아내서
어쩜 이렇게 글을 잘 쓸까 감탄 또 감탄해가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하나하나 사모으기 시작했고
그 뒤로 섬세하고 친절한 문장으로 가득한 일본소설을 모두 좋아하게 됐을만큼
그녀의 책은 내게 매력적이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녀의 책이 출간됐다길래 이번엔 또 얼마나 좋을까 싶어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어내려갔다.
그런데 내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사실 초반부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타히티로 여행온 현재와 그 이전의 과거를 오락가락하며 서술해놓아서
한마디로 한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카메라를 돌려대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실망도 잠시, 
주인공 에이코의 여행 오기전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기시작하면서부터는
역시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탄성을 자아낼만큼 그녀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 수 있었다.
시시한 이야기인줄 알고 멀찍이 떨어져 건성으로 듣다 의외로 재밌네 싶어
할머니 주변으로 몰려드는 아이 마냥 신이 나서 정신없이 읽어내려갔다.
머릿속으로 에이코가 여행 간 타히티의 풍광을 그려보기도 하고
에이코와 오너(에이코가 근무하는 식당의 오너)의 이루어질듯 말듯, 안타까운 사랑을
에이코 입장에 서서 고민해보기도 하고~
그러느라 180 페이지 남짓한 짧은 책인데도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지만
진도가 안나가 답답한게 아니라 상상의 나래를 펴는 그 시간이 너무 재밌고 설레여서
오래오래 그 순간을 만끽하고 싶을 정도였다.

어느 바닷가 조그만 식당에서 엄마와 할머니를 거들며 살았던 에이코는
웨이트리스를 천직으로 생각하고 
도쿄에 있는 타히티안 레스토랑, "무지개"에서 일하게 된다. 
할머니와 엄마가 돌아가신뒤 심신이 지쳐버린 에이코는 레스토랑에서 쓰러지고 
점장은 에이코가 좀더 편히 일할 수 있도록 
당분간 오너의 집에서 고양이와 개를 돌봐주고 간단한 가사일을 도우며 
일하도록 편의를 봐준다.
오너와 사모님과의 불화로 오너는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고
식물도 애완동물도 차디찬 사모님에게 홀대받는게 안타까워
에이코는 정성스레 그들을 돌봐주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오너와 에이코간에 비밀스런 감정이 싹트게 된다.

타히티의 조그만 보석가게에서 에이코가
흑진주 귀걸이를 사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한동안 이 섬에 있으면서 더 검게 타면 내게도 잘 어울리리라." - P 51 中에서-
분명 오너가 선물해줬을 흑진주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가 잘 어울리는 
오너의 아내와 달리 에이코는 자신에겐 흑진주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 
흑진주가 어울리긴 위해선 피부를 까맣게 태워야겠다면서 
언젠가는 내게도 어울리겠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흑진주 귀걸이를 산다.
오너의 아내가 될 사람은 흑진주가 어울려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을까?
아직은 어울리지 않지만 에이코는 은근히 오너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싶었고
에이코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자연스레 피부가 타서 흑진주가 어울리게 된단 상황은
에이코가 오너의 사랑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됐단 의미를 
내포하는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흔히 일본소설은 너무 가볍다 말하곤 한다. 하지만 좀 가벼우면 어떠랴. 
엄청난 감동은 없어도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게 하는 일본소설을 나는 특히 좋아한다. 
마음의 울림을 주는 큰 감동은 없지만 
나같은 사람은 일생동안 한번도 겪지 못할 것 같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경험이 아니라 
나같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한번쯤은 충분히 겪을법한 소소한 일상을 담아내서 
내겐 더 의미있게 다가오고 공감할 수 있는 매력도 가득하니 말이다.

작가가 언급했듯 타히티에서의 일주일간의 짧은 여행만으론 탄생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했을 경험만으로 이 모든 이야기를 만들어낸 그녀의 무궁무진한 상상력과
뛰어난 문장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동안 책꽂이 저편에서 먼지만 쌓여갔던 그녀의 책을 다시금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그녀의 감수성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가능하다면 내안에도 꼭꼭 가둬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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