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곧 믿음의 본질이라면
.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면서 가장 귀한 보배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마 이런 것 같다. 나를 열렬히 사랑하던 누군가가 그 사랑을 내게 고백했지만, 나는 그에게 ‘그래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걸 진짜로 믿어요. 잘 알겠습니다. 됐죠?’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 그 둘의 관계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상대방은 차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둘 사이에 사랑의 관계는 형성되지 못했다. 아마 파이퍼 목사님이 이 책에서 “그리스도를 치유자, 보호자, 공급자로 신뢰해도 가장 귀한 보배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불완전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파이퍼 목사님은 이 책을 통해 기독교 희락주의자라는 자신 평생의 추구해왔던 정체성을 한 번더 확고히 하는 동시에 갱신한 것 같다. 그러나 그 어조가 달라진 것 같다. 이 책 『존 파이퍼의 구원하는 믿음』에서는 예전처럼 “하나님을 기뻐하십시오!”에서 느껴지는 권유 정도를 말하지 않는다. 저자는 ‘하나님을 기뻐함’의 문제를 단순히 더 낫고 긍정적이고 높은 수준의 신앙생활로써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뻐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라며 이를 우리의 구원의 문제에 연결시켰다. “그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라는 선언은 강력하다. 분명 누군가는 이 말이 내표하는 위험에 대해 심각성을 덜 느낄 수도 있을 텐데, 더 직설적인 언어로 바꾸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지옥에 갈 것입니다!”
.
이렇게 저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그분의 영광에 대한 ‘기쁨’, 그분의 완전하심에 대한 ‘만족’, 그분의 가치를 ‘보배롭게 여김’ 같은 영적인 정서가 “최종 구원에 필수적이다”(p.16)라고 말한다. 이러한 정서적 측면에 대한 지적은 우리, 아니 나의 신앙생활이 위선과 형식, 혹은 믿는다는 착각을 덮어쓰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나같은 20대 청년을 상대로 가정한다면, 기본적으로 이렇게 도전할 수 있다. “당신이 열렬히 응원하고 사랑하고, 돈을 써서 앨범을 구매하는 아이돌을 생각해봅시다. 당신은 그들보다 하나님을 더 열렬하게 원하고 사랑합니까?” “꿈꾸던 직장을 얻고 수도권에 자가를 마련하는 것을 상상해봅시다. 당신은 그것보다 하나님을 더 원하십니까? 그것이 없어도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까?”
.
이것들은 물론 과장된 질문이고, 여기서 언급한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응원하고 사랑할 수 있으며 심지어 팬이 될 수도 있고, 이 세상에서의 필요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심지어 절박하다. 그러나 이 책은 정확히 그런 부분들에 대하여 ‘구원하는 믿음’이 가진 본질적 속성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것들에 향하여 가진 마음과 같은 온도와 깊이와 결을 주님을 향하여서도 가지는 것이 진정 구원받는 믿음이라고! 구원의 기쁨이 없고 주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으면서도 ‘난 믿으니까!’라고 단순한, 동시에 엉성한 결함투성이의 구원의 확신을 가진 이들에게.
.
나는 너무 연약해서, 종종 구원하는 믿음에 결부되는 정서들을 다 잃어버린 채 이성의 작용만 남은 신앙생활에 고여버리곤 한다. 나는 종종 아버지보다 세상을 더 원하고, 세상의 기준과 자신을 비교해보며 신앙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기도 하고, 그래서 구원의 기쁨을 다 잃어버린 채 그런데 주님을 믿는다고는 말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 이 책을 읽으며 너무 심각한 고민에 빠지는 나같은 사람들이 더러 있을 것 같다. 자기 마음상태를 들여다보며 ‘나는 구원받았을까?’라고 고민하는 사람들 말이다.
.
결국엔 늘 주님을 기뻐해야겠으나, 우리 마음은 약하기 때문에 그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믿음이 때론 그런 흔들림을 경험하는 것을 우리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알고 계신다. 이 신앙의 길을 걸어오며 (적어도) 내가 경험해왔던 우리 하나님은, 그런 넘어짐에서 우리를 일으키시고 흔들림에서 우리를 붙드실 때, 우리의 신뢰와 더불어 주를 향한 사랑과 기쁨, 만족과 같은 정서까지 분명 함께 회복시키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해야 돼서 하는 신앙생활’, ‘믿어야 돼서 믿는 믿음’으로 우리를 부르지 않으셨다. 주님이 창세부터 꿈꾸셨던 사람과의 관계는 온전한 사랑의 사귐이었고,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반응 또한 충만한 정서를 포함한 신뢰와 순종이다. 우리가 항시적인 상태로 사랑과 기쁨을 충만히 유지하는 일은 어려운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참된 구원하는 믿음으로 살겠다고 몸부림친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그 충만한 사랑으로 돌아가려는 관성을 일으키실 것이고, 우리 마음이 가능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일하심으로, 우리 마음을 만지셔서 주를 향한 사랑의 정서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어렵고 곤한 세상에서, 예수를 향한 사랑을 포함한 구원하는 믿음이 우리 안에 존재하는 모양은 그런 것이 아닐까?
.
하나뿐인 연인과 나누는 사랑의 충만함과 감격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둘도 없는 친구와 공유하는 친밀함과 편안함은? 가장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의 즐거움, 필요했던 모든 것이 채워졌을 때의 만족함, 큰 상을 받았을 때의 영광스러움, 너무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소중히 여김과 감사는? 아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아름다운 정서들의 실체는, 우리가 하나님을, 예수님을, 성령님을 믿을 때 그분과 누릴 수 있는 정서들의 그림자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분명 당신을 믿는 우리들과 이것들을 나누고 싶어하셨을 것이다. 그분은 창조 때부터 우리와 사랑을 나누고자 하셨으니까. 그러고자 우리를 지으셨으니까.
.
존파이퍼 목사님이 말하고 있는 바처럼, ‘영적 정서’가 믿음의 열매가 아니라 믿음의 본질이라는 그 미묘한 어감의 차이를 이 글에서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움이 가득하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책을 통하여, 우리가 비교적 손쉽게 놓아버리고 타협하는 정서의 영역에서 우리 믿음을 점검할 기회를 주신다고 생각한다.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구원의 기쁨이 없는 상태를 보며 우리가 둔감해지지 않도록. 결국 주님이 우리 안에 이루고자 하시는 참된 믿음의 삶에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먼저 사랑하신 그분께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그분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