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_ <신께서는 아이들을> 서평


제목: "신께서는 너희들을... 그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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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가진 사람으로서 이 소설은 제목부터 긴장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다. 신께서는 아이들을이라니, 신앙에 대하여 공격적일 것인가 아닐 것인가에 대한 의심어린 경계를 품고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리어 이 소설은 신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 관한 것은 더더욱 아니고, 처음에서 끝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은 내게 사랑에 관하여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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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희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면 이 소설은 아이들이 환생을 결정하는 사후세계에서 위로되지 않는 슬픔의 존재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 존재는 스스로 신의 사랑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바다로 상징되는 신으로부터 촘촘한 사랑과 보호를 받는 아이들과 달리, ‘는 수많은 생활의 제약을 지닌다. 바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아이들과 달리 음식물을 섭취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이유는 모르지만 새해가 되면 기억이 초기화되고, 무엇보다 계절마다 아이들을 떠나보내며 홀로 남는다.’ ‘는 그러한 신의 배제가 왜 때문인지 알지 못해 괴로워한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러는지, 괴로워하고 울부짖지만 답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는 마침내 어떤 순간을 거쳐 신의 근원, 피안(彼岸)에 닿게 된다. 이전의 무수한 의심과 슬픔이 지나고, 거기에서 화자는 그토록 듣고 싶던 음성을 듣는다. “신께서 너희들을 사랑하시어 이곳으로 보내셨어.” ‘는 이 말을 곱씹고, 어쩐지 웃음이 새어나오는 마음이 들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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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 사랑에서 배제되었던 슬픔의 존재 는 결국 신적인 접촉, 어떤 종류의 기적을 통하여 슬픔과 고독의 번뇌를 벗어나 신의 사랑에 닿게 된다. 도리어 말하면 즉, 기적이 없었다면 는 결코 사랑받고 있음을 알 수 없었고, 나아가 사랑받을 수 없었다. 우리의 현실과 이 소설을 붙여두고 다른그림찾기를 한다면 아마 이 기적이후의 상황에 동그라미를 치게 될 것이다. 이 대비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현실 가운데 곁에서 볼 수 있는, 사랑에서 배제되었다고 느낄 수많은 슬픔의 존재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특히 에게 대입되는 존재는 임신 중절을 겪은 산모였다. 소설에서 5살에서 15살 사이의 아이들이 바다로부터 온다는 설정이나(산모가 임신 증상을 통해 태아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시기는 임신 5주차부터이며, 별도의 사유 없이 임신 중절이 가능한 시기는 임신 14-15주차까지이다), 우리 사회가 임신 중절을 선택한 산모를 바라보는 시선의 냉혹함을 생각할 때, 그 정서적 아픔이 소설 속 가 경험하는 홀로 남는 외로움과 이유를 물을 수도 없는 죄책감과 유사한 흉터를 지닐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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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우리는 슬픔의 존재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받을 수 없는 존재로 여기는 이들을 그대로 둘 것인가, 혹은 그들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할 것인가. 이어서 앞에서 상정한 어떠한 슬픔의 존재, 임신 중절을 겪은 산모들에 대해서 이 사회가 어떤 시선을 보내는지를 돌아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신이 베푸는 아가페 사랑처럼 어느 정도 당연한 선험적 애정을 품듯이, 그들(산모)에게도 우리는 그러한 선험적 사랑을 줄 수 있는가. 혹은 무고한 생명을 죽였다며, 죄를 지었다며 삶이 필요한 이들을 다른 형태의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가. 비단 산모를 제외하고도 다른 이들에게 우리는 어떠한가? 장애인, 노약자, 미혼부모, 이주배경청소년, 이외에도 사랑이 필요한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주고 있는가? 나는, 당신은 그들을 위로하고 사랑할 것인가? 소설은 바로 이 사랑을 바로 화자가 신의 사랑을 경험케 되는 기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기성과 교환의 원리에 의해 기본적 지배를 받는 현 시대에서 이러한 사랑은 어찌 보면 진실로 기적이기도 하다. 상투적이고 뻔할 수 있으나, 이기성의 원리를 깨치고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손을 내밀 때 그 순간에 진실로 기적은 피어오른다. 작가의 말에서 엿보이는 작가의 상념으로부터 비추어 볼 때 이 소설은 믿음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품고 기대할만한 믿음은 바로 그 사랑의 기적, 사람의 기적에 관한 믿음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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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제목은 김현 시인의 시에서 가져왔다고 밝혀져 있지만, 소설 안에서 제목의 행방을 찾자보자면 282쪽의 누군가가 피안으로 떠내려 온 에게 건네는 말인 신께서 너희들을 사랑하시어와 가장 근접하다. 이 문장에서 제목으로 오기까지는 두 번의 수정이 가해졌는데, 먼저 너희라는 어휘가 아이로 수정되었다. 이는 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너희라는 불특정 다수, 듣는 이들 누구나 포함될 수 있는 대상에서 아이라는 사랑받기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대상으로 축소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신께서는이 비유하는 우리 인간 내면의 선험적(아가페적) 사랑이, ‘너희를 포괄하지 못하고 아이들만을 향하는 편협성을 꼬집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그러나 이렇게 수정되어 신께서는 아이들을 사랑하시어라고 그치지 않고, 작가는 사랑하시어를 제거하여 최종적으로는 신께서는 아이들을이 되었다. 이러한 소거를 통해 소설이 묻는 바는 더욱 정확해졌다. 우리의 사랑은 어디 갔는가. 신의 사랑을 믿는 이들로부터 시작하여 선험적 사랑을 지닌 일반에 이르기까지, 소설은 사랑에서 배제되었다고 느끼는 슬픔의 존재를 통해 우리의 사랑의 행방을 묻는다. 나와 당신은 현세대를 살며 이 제목의 뒤에 어떤 서술어를 붙일 것인가. 신께서는 아이들을, 아니, 신께서는 너희들을... 그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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