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해방의 밤 - 당신을 자유롭게 할 은유의 책 편지
은유 지음 / 창비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은유(隱喩)


은유 (隱喩)를 영어로는 무엇이라고 할까요?라고 물으면 웬만하면 메타포 (Metaphor)라고 답한다. 그럼 직유 (直喩)는 영어로 뭐지요?라고 물으면 멈칫한다. 아무리 고민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Input이 없었으니 output도 당연히 없다. 직유는 영어로 Simile이다. 뭐, 그냥 하는 이야기다. 그걸 몰라도 직유법을 사용하며, "너는 별과 같아"라고 말하고 글을 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근데 영어 단어만 보아도, 시밀레보다는 메타포가 달라 보인다. 품위가 있어 보인다. 숨김과 단도직입의 차이라고나 할까.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보다는 숨기는 듯 드러내는 은유가 한 수 위인 것 같다. 은유 작가의 매력 또한 은유이다.



은유 작가의 책을 읽을 때마다 궁금했다. 직접 질문을 해보았다. "필명은 어떻게 은유라고 지으신 건가요?" 답은 아주 간단했다. "제가 은유를 좋아해서요" 맥이 풀렸다. 무슨 심오한 의미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그저 허물어졌다. 그러나 은유 (隱喩)라는 필명 (筆名)은 참 잘 지은 것 같다. 그가 펴낸 책을 그래도 많이 읽었다는 나의 생각은 그러하다.


은유란 본뜻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어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은유는 직유보다 강하고 힘이 세다. 소소하지만 그 소소함 속에 숨어 있는 소소하지 않은 글의 힘을 발휘한다. 소소 (小少) 하지만 소소 (素素) 하게 하얀색이다. '이것이 답입니다'라는 해법이 아니라, '이걸 생각해 보세요.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질 겁니다'라며 넌지시 손을 내미는 은유 (隱喩), 그것이 은유 작가의 매력이다. 최고의 강점이다.



2. 울컥


은유 작가는 어느 책에서 '울컥이란 존재의 딸꾹질'이라고 했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울컥' 무언가 알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올라오는 느낌을 많이도 받는다. 건드리기만 하면 터져 버리거나, 흘러넘칠 것 같은, 인간의 심상을 '울컥'하게 만든다.


그만큼 그의 글은 독자들의 마음과 근접해 있다는 것이다. 독자는 이런 심정일 게다. 마치 몰래 숨어 먹다가 들킨 아이의 심정처럼 "너도 그랬구나. 나만 그런 줄 알았어"라는 동류의식과 동지의식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울컥'을 촉매로 글을 쓴다. 독자를 울컥에 젖게 한다. 나와 다름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평안과 편안함을 선사한다. 앞으로 모았던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그의 손을 잡게 한다. 작가의 이야기는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홍세화 선생은 말씀하셨다. "어떤 이의 죽음은 숫자로 표기되고, 어떤 이의 죽음은 서사로 기록된"라고. 바로 은유 작가는 서민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 따스한 손을 내미는 같은 서민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서사로 둔갑시킨다. 주인공이 되게 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아주 자주 '울컥'한다. 울컥은 존재의 딸꾹질이 맞다. 나도 존재하는 존재임을 알게 하며 몸은 울컥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작가도 고민 많은 엄마이고, 독자도 그런 엄마이고, 식탁이 글을 쓰는 책상이 되고, 작가와 독자가 상호 빙의하며 글을 쓰고 글을 읽는다.



3. 결코 소소하지 않은 소소함


그의 글은 레토릭이 아니다. 호흡이 급하지 않다. 그저 소소 (少小) 하고 소박하고 투박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너무도 하얀 소소 (素素) 한 글이다. 생각의 여백을 제공한다. 여백이란 채우지 않고 일부러 비워둔 공간이다. 여백은 하늘고, 구름도, 물도 된다. 채우지 않은 나머지는 모두 여백이다. 남는 것이 아니라, 남겨둔 것이다.


그의 글이 그러하다. 거창하지 않으나 긴 여운이 서사를 벼리고 빚어낸다. 작은 송편이나 거친 수제비 같지만, 그 음식은 위로와 위안의 말로 허기를 채우게 한다. 현학적인 글이 아니다. 다만 어휘와 말투가 단정하고 정갈하다. 그만큼 퇴고의 고통을 많이도 한 결과일 것이다. 그의 글에는 녹지 않은 미숫가루의 떡진 분말은 없다. 그의 글은 넓고 깊다. 그 힘은 그가 시를 많이 읽었고 철학 책을 끼고 살았기 때문이리라. 그 사유의 날갯짓으로 소소하지만 선한 영향력의 전도사가 될 수 있었으리라.




<해방의 밤>에도 많은 밑줄을 그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 극심한 휘발성 때문에 이별을 고하겠지만 조금 더 머물러 있으라고 여기에 옮겨 본다.


내 삶은 책기둥에서 시작되었다 P5


훌쩍훌쩍 울컥울컥 10년 ... 식탁을 책상 삼아 밥을 짓고 글을 썼다 P9


큰 아이는 올해 어버이날에 이렇게 썼다. 

"2020년 11월부터 삶에 책을 들이고 2021년 5월부터 삶에 글을 들였습니다. 그 이후로도 차곡차곡 일과 삶의 대전제들, 즉 변하지 않고 사고의 기준이 되어줄 것들을 쌓아왔습니다. 문장을 수집하기도 하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기도 하면서요. 돌이켜보니, 어머니의 말들, 삶의 고유성과 구체성을 이야기하는 것, 타자의 삶에 공감하고 그들이 되어 보는 것, 불행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더라고요. 그래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해피 어버이날" P15


내가 세운 자취의 목적은 두 가지다. 인간에게 마땅히 필요한 '고요한 단독자'의 사간을 늦게라도 살아보는 것. 그리고 <반사회적 가족>을 교본 삼아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중산층 가족을 가족 외부에서 비판적으로 사유해 볼 기회를 갖는 것 P43


<욕구들>의 저자는 '딸'의 목소리로 묻습니다. "어머니가 결코 갖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 나 자신에게 허용할 수 있어?"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뻥 뚫리는 말입니다. '하지 마'의 세계에서 엄마를 구원하는 멋진 문장이죠. 사랑눈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나중에'라는 시간은 영영 도래하지 않으며 지금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행동해도 된다는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증여이고, 원함에 관해 아이들이 본받을만한 모범이 된다는 점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는 일에 비해 모자람 없는 어머니의 일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P55


사람은 잘 안 변한다고 하잖아요. 대개는 그렇죠. 그런데 한 존재가 자기를 겪게 바꿔내는 계기가 두 가지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사랑으로 아플 때, 하나는 돈을 벌어야 할 때. 그래서 사랑을 쉽게 하고 돈을 쉽게 벌고 그러면 좋겠지만 타자 경험의 기회가, 즉 다른 내가 되어볼 계기가 없다는 측면에서는 그리 좋은 삶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P67


삶은 그저 삶일 뿐이지요. 늘 고난이 있습니다. 좋은 순간도 나쁜 순간도 있고, 저는 좋든 나쁘든 그 모든 순간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우리는 고통과 슬픔을 경험할 테니까요. 그것은 삶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친절은 우리가 베풀거나 베풀지 않겠다고 선택할 수 있어요. 타인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친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자신에 대한 친절도 매우 주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국 친절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일 텐데, 선택이기 때문에 저는 친절에 대해 쓰는 것이 좋습니다. P107


일상의 속도 제어 장치로 시를 들였다. 시는 산문이나 소설처럼 논리적 사고로 읽어낼 수 없는 장르거든. 읽다가 요철처럼 걸리는 구절이 있어서 생각도 서행을 한다. 행간에 머물지. 이게 뭐지? 왜 슬프지? 이거 좋다! 이런 느낌은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지. 삶을 그냥 살아내야 하듯이 그저 읽어내면 되거든. 논리적 이해가 아닌 묵묵한 독해. 안 보이는 것이 보일 때까지 붙드는 마음 P1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이비부머가 노년이 되었습니다 - 사회학자 김찬호 에세이-삶의 리셋 버튼을 누르는 마흔 단어
김찬호 지음 / 날(도서출판)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을 읽다 보면 저자가 지은 글들은 여러 모습과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느 글에서는 맛과 솜씨와 멋이 느껴지고, 한없는 깊이도, 경계 없는 넓이도, 그윽하고 짙은 향기도, 지극한 아름다움도 느껴진다. 이로 인해 작가들은 어쩌면 독자들에게 글에 대한 경외심과 아울러, 글쓰기에 대한 좌절과 절망과 모멸감까지 부여하기도 한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글쓰기의 한계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소위 시중에는 자칭 타칭 방귀 좀 뀐다는 글쟁이들이 많지만, 이 모든 특징을 갖춘 글쟁이들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깊이만 있거나, 넓이만 있거나, 맛만 있거나, 멋만 있는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아마도 김찬호는 이 모든 특성을 두루 갖춘 몇 안 되는 글쟁이 중 하나일 것이다.



항상 그의 관심은 (사회학자로서 아니 한 인간으로서) '사람'을 향해있고, 그것도 제대로 된 '사람'과 그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에 현미경과 망원경을 가져다 댄다. 그의 책을 10여권 읽어 본 나로서는, 이제는 그가 하는 '말'들이 식상할 수도 있다. 그가 항상 강조하는 것은, 멈춤, (자기) 성찰, 통찰, 반성, 깨어있음, 돌봄, 이웃, 연대, 연민, 바라봄, 돌아봄 등이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그가 새 책을 출간할 때마다 업그레이드 되어 힘을 더한다. 그가 택한 주제들은 깊고 묵직한 반향을 던져주기도 한다. '생애의 발견'이, '모멸감'이 그러했고, '유머니즘'과 '대면 비대면 외면'이 그러했다. 시대가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을 시의적절하게 어루만지고 감싸 안는다.



그는 언어 연금술사이다. 사회학 교수가 여느 글쟁이 보다 잘 쓰고 어휘를 잘 선택한다. 그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반드시 그곳에 위치해야 할 그 단어들이다. 대체 불능한 단어를 골라 쓴다. 여느 산문집보다 글솜씨가 빼어나다. 칼럼이 아닌 에세이를 읽고 있는 듯하다.



그는 진정 현대판 간서치 (看書痴) 이다. 다독은 물론 다양한 매체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한다. 어쩜 그는 지식과 지혜를 저금하는 성실한 예금주이다. 시, 에세이, 심리학, 사회학, 논문, TV, 영화, 신문 등 그의 관심의 레이더의 주파수는 강하고 넓다. 그러니 그의 글의 깊이와 넓이는 깊고 넓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잘 버무린다. 글맛과 글멋을 벼리고 빚어낸다. 목소리는 크지 않고 읊조리지만 그 울림은 크고 폐부를 찌른다. 뻔한 이야기이지만 뻔하지 않다




<베이비부머가 노년이 되었습니다>라는 제목은 출판사와 편집인이 기피할 정도로 아주 긴 제목이다. 게다가 이제는 노년이 된 저자의 흑백 사진이 (아주) 커다랗게 인쇄된 책 표지는 호불호가 있었을 게다. 아마도 노년에 들어선 저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이 책은 김찬호의 칼럼집이다. 그동안 썼던 칼럼을 40개의 키워드로 분류하고 재배치하여 펴낸 책이다. 보통 칼럼집은 대 주제별로 (대충?) 분류하여 챕터를 만들지만, 이 책은 남달랐다. 작가와 편집자의 노고와 기지를 엿볼 수 있다.


기실 칼럼니스트들은 키보드 워리어로써 좋은 말과 멋진 말을 계몽적으로 말한다. 거기다가 어디선가 인용한 일화나 책의 문구를 넣어 장식한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너희들) 독자들은 이 고매한 자의 말을 따르고 행해야 한다는 훈계조의 칼럼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김찬호는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상당 부분이 자신의 이야기이며, 자신도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온전하고 완전하지 못한 인간임을, 자신도 외롭고 고통이 있음을 고백하고 자백하는 고해성사를 한다. 그것도 아주 세련되게 말이다. 그리고 "너희들은 이래야 한다"가 아니라, "저도 이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베이비부머가 노년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러하다. 노년에 접어든 작가의 자기 고백서이자 자기 성찰서이다. 그래서 자신의 현재 모습을 책 표지에 흑백으로 실었나 보다. 나를 제외한 여러분이 아니라, 저자 자신을 포함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여느 잠언집을 능가할 정도로 엄중하다. 이야기는 일상적이나 무게는 남다르다. 이제 회당의 의자 배치가 달라졌다. 이제는 군림과 권력과 존중을 강요하던 자리에서, 이제는 위엄과 권위와 자발적 존경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말석에 자리 잡는다. 집착과 애착과 회한에 머물지 말고 줏대 있고 과시와 허세를 내려놓는, 비우고 새로운 것으로 채워가야 하는 이들이 기억해야 할 명상록이자 고백록이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이 되었고, 이렇게 살 수도 있고 이렇게 죽을 수도 있을 때 예순살이 되어, 노년의 문을 열고 들어선 이들은 필수적으로 읽어야 한다. 특히 한국 남성 베이비 부머들은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어쩌다 나이를 (들지 않고) 먹었으며, 어쩌다 노인이 된 이들은, 보수교육을 듣듯 새로운 포지션에 맞는 새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귀뿐 아니라 모든 것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순해져야 한다. 순해짐이란 완고해짐이 아니라 견고해짐이다. 죽음을 직시하며 매 순간 깨어 있어야 한다. 이 책은 노년기에 접어든 이들에게 지극히도 적합하다.



노년의 문이 저만치 보이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미리 새 옷을 구매하여 치수를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년에 접어든 아비와 어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모든 이들을 위한 '생활 지침서'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글맛이 나고 글멋이 있고 글솜씨가 넘치는 명문장들이다. 그중 몇 개만 옮겨 본다.



"언어가 억압의 도구로 작용하기 쉬운 세상이다. 지위나 나이 등의 위치 에너지에 편승하여 비난과 폭언을 내뱉는 경우도 흔하다. 그 결과 타인으로부터 소외되거나 아집과 독단의 감옥에 스스로 갇혀버린다. 탈출은 가능한가. 서로의 맥락을 교차시키면서 이야기를 확장하는 공간이 열려야 한다. 구태의연한 허위에서 벗어나 존재 그 자체를 '추앙'하는 관계, 투명한 문법의 서사를 통해 우리는 좀 더 의연해질 수 있을 것이다." (P50~51)



"일상 속의 담담한 여백, 넉넉한 마음의 품이 있어야 한다. 꽉 채워지지 않은 그릇에서 생명의 힘이 자라난다. 그러니 약간의 부족함과 허기를 즐기자. 결핍을 꾸준하게 훈련하자. 적게 소유하고 풍요롭게 존재하는 기쁨이 선물로 주어진다." (P131~1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잎이 뜸 들이는 시간
민경숙 지음 / 강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문재 시인의 노숙인 시설 강의에서 접한 책이다. 그는 수강생들에게 그저 이 책을 낭독하게 했다. 시 낭독은 보았어도, 운문이 아닌 산문을 읽게 하는 것은, 무척이나 생경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 낭독은 여느 시 낭독보다 훨씬 더 가슴에 와닿았고 파문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그 산문은 산문이 아닌 운문, 운문이 아닌 산문이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선생으로서 수강생들의 '촉진자'가 되어 시를 촉진하고 싶었다고 한다. 시의 마음을 일깨울지에 대해 아직도 모르겠다고 고백하고 있다. 시가 아닌, 에세이를 -그것도 자기 이야기를-쓰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는 에세이 촉진자가 되었으며, 그 결과가 바로 <꽃잎이 뜸 들이는 시간>이 된 것이다.



시인들이 쓴 에세이를 즐겨 읽는다. 시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난공불락의 철옹성을 접하는 것보다, 시인의 조금은 힘을 뺀, 지극히 사적인 시 같은 에세이를 읽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시인들이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것이 있다. 수많은 숨을 곳이 있는 시와는 달리 (그것을 은유와 비유라고 하던가), 에세이는 발가벗는 것 같아서 어렵다고. 시인이 아닌 일반인은 시가 어렵고, 차라리 에세이는 쉽다고 한다. 이문재 시인은 그것을 '시의 감옥'에 갇힌 것이라고 했다. 어쩜 얼룩에 대처하는 방법의 차이 때문은 아닐까.


민경숙 작가는 <얼룩>에서 얼룩에 대처하는 방법은 '지우려고 노력한다' '얼룩이 묻은 옷을 버린다' '얼룩을 내 옷의 무늬로 인정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어쩜 시인들은 얼룩 묻은 옷을 버리는 사람이고, 일반인은 얼룩을 내 옷의 무늬로 인정하는 부류가 아닐까. 아님 정반대이거나. 그래서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그리고 쓰는 에세이가 오히려 쉬운 것은 아닐까.


제목에 눈이 많이도 머물렀다. <꽃잎이 뜸 들이는 시간> 무언가 어색하고 말이 안된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다. '꽃잎을 뜸 들이는', 즉 인간이 주어가 아니었다. 뜸을 들이는 주체가 꽃잎이었다. 뜸 들이는 행위는, 약불에 그대로 두어 속속들이 잘 익게, 내음이 배도록 하는 것이나, 머뭇거리거나, 서두르지 않고 가만히 두는 것이다. 이는 섣부른 간섭이나 변화의 도모가 아닌, 스스로 맛이 배게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도 해본다. 그 꽃잎은 아마도 작가 자신이 아니었을까. 숨겨둔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62세의 나이에 사이버 대학 문창과에 등록을 한다. 아마도 그 6 개 성상 (星霜)이 바로 작가의 꽃잎을 뜸 들이는 시간이었으리라. 꽃의 만개 (滿開)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다림이다. 뜸 드림이다. 그것이 '조용한 끈질김'이다.


작가의 글에서 풍경화나 인물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든다. 급하지 않은, 거칠지도 약하지도 않은 뭇 터치로 그려진 그림을 보는 듯했다. 역시 20여 년 동안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정밀화가 아니다. 점묘화에 가까운 인상파 화가의 그림이다. 눈을 조금만 뜨고 보아야 비로소 그림의 실체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장엄하게 보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마음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에만 집중하면 된다.



작가는 이 책이 '사람' 이야기라고 했다. 그러니 작가는 <진국>이자, <감국>이자, <조용한 끈질김>이자, <손거울> <검정치마>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진국'이다. 작가는 '진국은 어딘가에 스며들기 위해 우러나며, 대체로 자신을 위해 우러나지 않으며, 자신을 녹여 어딘가에 스며들 수 있을 때, 진국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진국인 사람들의 모습은 예쁘지 않고, 아름답다. 그들 모두 뭉근한 '고유 명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진한 감꽃도, 풋풋한 땡감도, 농익은 홍시도 아닌 -애절하고 그리운 -감국의 존재이다. 아님 모두에 해당할 수도 있다.



"감동적이다" "위안을 받았다" "감사하다"라는 세치 혀로 하는 찬사를 보내기가 심히 저어 된다. 이 책에 대한 찬사로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참사는, 혀가 아닌, 가슴은 물론 온몸으로 떨며 해야 한다. 기실 나는 여성 작가들이 써 내려가는 에세이집을 즐겨 읽지는 않는다. 감성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며, 뜻 모를 형용사와 부사가 난무하며, 적확하게 말하고 쓰지 않는 지극히 우회하기 때문이다. <꽃잎이 뜸 들이는 시간>은 다르다. 수식어가 절제된, 다큐멘터리의 촬영감독처럼 묵묵히 관찰하고, 화장기 없는 민낯과 날 것을 보여주기 때문

이다.


꽃잎의 요리는 아주 담백하다. 뜸이 아주 잘 든 요리이다. 요리를 만든 셰프의 농익은 손맛을 보여준다. 역시 나이가 선사하는 느긋함, 관조하는 여유, 롱테이크에 가까운 카메라 워크, 그리고 웃풍을 막아주는 이불이 깔린 아랫목의 따스함까지 보여준다.



가벼우면서 가볍지 않고, 무거운면서도 무겁지 않다. 적당히 짧으면서도 긴 인생의 서사 (敍事)를 담고 있다. 과장되지 않은, 꾸미지 않은, 그대로의 사적 (私的) 다큐멘터리이다. 민경숙 작가는 아주 훌륭한 다큐 감독이다. 그의 첫 잇뽕 작품이 <꽃잎이 뜸 들이는 시간>이다. 상영 시간은 개인별로 다르다. 나에게는 약 4시간이었다. 다시 볼 예정이다. 추리 소설을 읽는 듯한 반전의 재미도 있다. 눈의 흐름만으로 읽지 마시라. 마지막 연의 반전의 놀람을 대비해야 한다. 경험해 보시라. 짜릿함으로 다가온다.



이 책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 그 문을 열어준 이문재 시인에게 감사할 뿐이다. 시인은 정말 자신보다 글을 잘 쓰는이라고 했다. 그 말은 정말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민경숙이라는 걸출한 에세이스트의 글을 접하게 되어 기쁘다. 올해 읽은 최고의 에세이이다. 아마 오랜 시간 동안 그러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
윤신 지음 / 여름정원 / 2023년 2월
평점 :
품절


"읽고 쓰기를 좋아해요. 언어와 감각은 여러 군데에서 뒤섞인 시제로 지내다 내 안에 머무릅니다. 그렇게 내 안에 살던 언어가 또 다른 곳으로, 글을 읽는 당신에게 가서 살아간다면 참 좋겠습니다."

윤신 작가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그럴 때마다 건너 뛰지 못하고 -여지없이- 시선이 멈추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바로 '시제'이다. 그것은 시제 (時制) -과거, 현재, 미래 -즉 시간이거나, 시제 (詩題) -시의 제목이나 제재-를 말하는 것이리라. 작가는 '내 안에 살던 '언어'라고 표현했으니, 시제 (時制)의 시제 (詩題)가 맞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에세이집이 아니라 시집이 더 어울린다.

​산문을 쓰는 일반 작가보다, 시인의 에세이가 훨씬 더 독자의 마음을 떨게 하고, 울리게 하고, 열리게 한다. 그들은 조탁된 언어로 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정제된 언어로 쓰기 때문이다.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도 그러했다. 작가 윤신은 기실 시인이다.

그의 글을 자주 접했었다. 대면이 아닌 비대면으로 사이버 공간인 블로그에서 그러했다. 그의 블로그 명은 '다정하게 안녕'이다. 그 안녕이, 만나서 반가운 인사인지, 헤어질 때의 안녕인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다정하게'이다.

​언젠가 그의 글에 이런 댓글을 쓴 적이 있다. "작가의 꿈이 영글어, 멋진 책 한 권을 서점에서 조우하는 그날을 기원해 봅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무 사랑' 님의 블로그 글들을, 줄을 그어가며 읽게 되었습니다. '나무 사랑'님의 글에는 '허투루'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정제된 언어와 치열한 생각의 씨줄과 날줄들이 따뜻한 마음의 물감과 어우러진 수채화를 보는 듯했습니다"라고. 그 블로그의 주인공이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 책을 펴냈다.

​나는 -솔직히-이런 스타일의 글을 즐겨 읽지는 않는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라는 이분법적인, 그리고 딱 부러진 글을 선호한다. 빙빙 돌아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그런 유의 글을 읽기에 나의 조바심의 똘레랑스는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그런 글을 쓰는 이들은 거의 여성이다. 그들은 자신의 얼굴과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 윤신은 자신과 아이와 남편 (아마 이름이 아윤과 찰떡군이었을 게다)의 사진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작가 윤신은 그러했다.

​초창기 그의 블로그 글 대부분은 육아에 대한 것이었다. 아이와 지지고 볶는 이야기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천사와 악마의 탈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바꾸어 쓰는 아이와의 육아 씨름은 -임재범이 노래했듯이- 전쟁 같은 삶일 게다. 이 책은 -이제는 육아기가 아닌- 전쟁과 같았던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가 책을 펴냈다. 그것도 용감하게 1인 독립 출판사를 차려 - 그의 말대로 무게와 물성을 지닌- 진짜 책을 펴냈다. '홀로서기 위해서는 힘이, 남에게 기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작가 윤신은 '용기'까지도 스스로의 '힘'으로 조달했다.

​이 책은 156쪽의 책이다. 보통 책의 폰트나 여백을 고려하면 아마도 120여 쪽의 단출한 에세이집이다. '누구나'의 일상의 단상이지만, 결코 '누구나'의 생각의 흐름은 아니다. 그 생각의 흐름은 발칙하고, 이불 속 하이킥을 하는, 탈옥을 꿈꾸는, 수인의 이야기이다.

​작가의 아픔 (痛)과 관계 (通)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픔은 대개 아련하다. 지나간 시제(時制)의 아픔 (痛)은 그리움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 아픔은 -아픔을 넘어 - 관계 (通)를 꿈꾼다. 그 痛 과 通을 표징 하는 것이 바로 'Alone together (P133)' Chet Baker의 Jazz 곡이다. 이 단어가 이 책의 핵심 키워드이다.

​ Alone과 together는 상호 모순되는 단어이다. 결코 함께 어울려서는 안 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같이 쓰이면 묘한 misty 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혼자 있고 싶지만, 그것만큼 같이 있고자 하는, 이중적 심리이다. 그래서 이 단어의 뜻은 '따로 또 같이'가 아니라 '단둘'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 사람'들이 쓴 '그런' 글이 아닌, 보통의 삶을 보통이 아니게 살고 있는 '보통 사람'의 글이다. 현재와 과거, 도시와 시골, 국내외를 넘나들면서 주로 아픔을 이야기한다. 때로는 실리콘도 이야기한다. 자신의 병도 말한다. 그 이야기를 토하듯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용기보다는 '위엄'에 가깝다.

그의 이야기들은 색 바랜 사진처럼 다가온다. 사진은 '일종의 걱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순간을 가두기 위해 '찰칵'을 하는 것이리라. 이 책을 만든 이유 또한, 지나간 시제를 현재의 시간 속에 멈추게 하려는 스냅 사진일 게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독립 영화를 만든 경력에서인지 -활동 사진이다. 움직이는 단편 소설이다.

누군가 사진은 '일종의 걱정'이라고 했다. 이 순간이 사라지는 데에 대한 두려움, 잊힐 것에 대한 염려. 사람들은 이 순간이 사라질 것을,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을 두려워 마지않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찰칵. 지금 붉게 물든 저 하늘도 내일의 것과는 다르고 내일 다시 떠오르는 태양도 지금의 것과는 다를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 P89~90

윤신 작가의 다음 책이 기다려진다. 내일 떠오르는 태양의 또 다른 모습을 보고 싶다. 그때쯤이면 '여름 정원'은 '가을 정원'이나, '봄 정원'이 되어 있을 게다. 또 다른 계절의 또 다른 색과 빛의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이지 않는 도시
임우진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글 좀 쓴다는 인문 사회 학자들은 비상일 게다. 문과 출신의 고유 영역이었던 출판 시장에 이과 출신의 돌풍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출판 시장에서도 '문송 (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을 외쳐야 할 시기가 도래한 듯싶다.


이과 출신들이 꽤 괜찮은 책들을 출간하고 있고, 글빨 또한 준수하며, 대중의 반응조차 심상치 않다. 대중이 잘 모르는 새로운 영역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결코 딱딱하게 말하지 않으며, 잘 읽히며, 이과생만의 전문 영역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인문학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문과 출신 작가들은 '융합'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성역이 침범당하기 때문이다. 필요시 그저 선언적 흉내만 낼뿐이다. 이제 이과 출신 작가들은-융합을 넘어서- 대륙 간 탄도 미사일을 쏘아대며, 문과 독점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다.

대표적인 과학자들은 정재승, 김상욱, 장대익, 김범준, 정인경, 장동선, 김대식, 최재천, 심채경 등이다. 현직 의사인 정혜신, 하지현, 남궁인 등도 막강한 필력을 자랑하고 있다.


건축가 출신 말빨을 자랑하던 유현준 교수도 위기에 처했다. '임우진'이라는 걸출한 신인 거물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유현준에 의해 독점되어온 건축가 작가에 막강한 경쟁자가 등당했다. 어떤 측면에서는 유현준을 능가한다. 유현준이 거시적 관점의 작가라면  임우진은 미시적 관점의 작가이다. 그의 글은 < 도시 & 공간 심리학>에 가깝다. 사실 [도시 심리학]은 하지현의 책 제목과 동일하다. 그가 '도시인의 정서적 허기'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임우진은 '장소'를 말한다. 결과물인 현상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건축가의 시선을 이야기 한다.



그는 이제는 이화여대의 상징이 된 ECC를 공동 설계했다. 더 이상 건물과 시설을 지을 공간이 없기에 지하화하는 것이 대학들의 추세인데 ECC는 개념이 다르다. 지하를 개방함으로써 지상과 지하의 경계와 구분을 없애 버렸다. 지하에도 하늘과 빛을 부여한 것이다. ECC의 압권은 계단을 만들어 만남의 광장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상과 지하의 만남을 동시에 이룬 것이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감상이다)


그가 책에서 주장하는 일관적인 메시지는 '관점'이다. 질문의 과녁을 바꾸자는 것이다. 익숙한 것을 다시 돌아보고, 전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에 주목하라고 채근한다.


그이기에 가능한 질문이자 화두이다. 한국인도 프랑스인도 아닌 경계인으로서 한국과 서양의 도시를 이야기한다. 그의 사고의 흐름은 여행에서도 출발한다. "여행이 주는 최고의 선물은 자신의 원래 모습을 남처럼 타자화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너무 익숙해서 잘 안다고 믿는 의식에 대해 태클을 건다. 절대성에 대해 회의하고 상대성에 대해 논한다.


한국의 도시는 '인간은 선하고 믿을만하다'는 것과 실상은 도덕과 윤리에 짓눌려 교육되고 선도되어야 하는 하등 국민을 만들었다고 한다. 반면 서양의 경우는 시스템적으로 하등 국민이 되는 것을 막는 도시를 건설했다고 한다. 질서를 '지킬 수밖에 없도록'유도하기 위해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도시 전략을 수립했다고 말한다. 시스템이 동서양 도시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는 대단한 관찰가이다. 신호등의 위치에서, 오페라극장과 영화관 그리고 세종 문화회관과 국회의사당 구조에서 동서양 사고의 차이를 설명한다. 묘지가 소재한 장소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것과 죽음에 대한 의식을 이야기한다. 풍수와 남향 선호의 한국 아파트에서 물질화된 그리고 폐쇄된 아파트 문화를 꼬집는다. 온돌 문화의 우수성이 아닌, 모순적 온돌 문화 (침대를 사용하는 한국인)를 꼬집는다. 노래방으로 상징되는 사적 공동체 문화, 밀폐된 집단 선호 의식을 읽어낸다. 마을이 사라졌음이 도시인의 외로움의 원인이라는 학자들의 말에 일침을 가한다. 마을이라는 것이 우리끼리의 배타적인 공간이라고.


공간 심리학으로 사회 원심력과 구심력을 이야기한다. 공간의 소유권과 주도권과 관리권을 말한다. 공간에 대한 감정과 애착심과의 차이를 풀어낸다. 관리에 용이한 (관리자의 관점에서 출발한) 공간 배치와 사용자의 관점에서의 공간을 이야기한다. 사람이 느껴지고 보이는 공간을 이야기한다.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은 항상 거시적인 그리고 멋들어지고 이상적인 이야기를 한다. 읽고 나면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야?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게 힘든 건데"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임우진의 경우는 아주 독특하다. 섣불리 솔루션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도시라는 것은 함부로 부수고 새로 건설할 수는 없기에. 하물며 재건축도 불가능한 것이기에.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Nudge 한다. 그중 실현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 도시의 사막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힌트를 제시한다.


프랑스 시골 마을 디에볼샤임에서 독일군과 연합군에 의해 설치됐던 지뢰 제거 작업을 하면서, 주임신부였던 웬들링은 지뢰가 하나씩 제거될 때마다 그 장소에 꽃을 하나씩 심자고 신도들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자신이 손수 심은 꽃이 전쟁의 아픈 기억을 잊게 해 주는 직접적인 경험 한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고, 행동이 적극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꽃이 지뢰를 대신하게 한 것이다. 이를 이용하여 프랑스는 콩쿠르라는 도시의 아름다운 꽃 가꾸기 등급을 부여하는 제도를 도입했다고 한다. 우리처럼 경쟁에 민감하고, 부동산 가격에 민감한 국민이면 꽃을 가꾸는 아름다운 도시 등급을 부여하면 아파트 가격 상승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사람이 먼저인 도시'를 만드는 주춧돌이 되지 않을까?


유현준 교수는 이제 용맹정진해야겠다. 여기 막강한 경쟁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보이지않는도시 #임우진 # 을유문화사 #질문의과녁을바꾸면 #지뢰와꽃 #도시심리학 #공간심리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