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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
윤신 지음 / 여름정원 / 2023년 2월
평점 :
품절
"읽고 쓰기를 좋아해요. 언어와 감각은 여러 군데에서 뒤섞인 시제로 지내다 내 안에 머무릅니다. 그렇게 내 안에 살던 언어가 또 다른 곳으로, 글을 읽는 당신에게 가서 살아간다면 참 좋겠습니다."
윤신 작가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그럴 때마다 건너 뛰지 못하고 -여지없이- 시선이 멈추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바로 '시제'이다. 그것은 시제 (時制) -과거, 현재, 미래 -즉 시간이거나, 시제 (詩題) -시의 제목이나 제재-를 말하는 것이리라. 작가는 '내 안에 살던 '언어'라고 표현했으니, 시제 (時制)의 시제 (詩題)가 맞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에세이집이 아니라 시집이 더 어울린다.
산문을 쓰는 일반 작가보다, 시인의 에세이가 훨씬 더 독자의 마음을 떨게 하고, 울리게 하고, 열리게 한다. 그들은 조탁된 언어로 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정제된 언어로 쓰기 때문이다.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도 그러했다. 작가 윤신은 기실 시인이다.
그의 글을 자주 접했었다. 대면이 아닌 비대면으로 사이버 공간인 블로그에서 그러했다. 그의 블로그 명은 '다정하게 안녕'이다. 그 안녕이, 만나서 반가운 인사인지, 헤어질 때의 안녕인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다정하게'이다.
언젠가 그의 글에 이런 댓글을 쓴 적이 있다. "작가의 꿈이 영글어, 멋진 책 한 권을 서점에서 조우하는 그날을 기원해 봅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무 사랑' 님의 블로그 글들을, 줄을 그어가며 읽게 되었습니다. '나무 사랑'님의 글에는 '허투루'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정제된 언어와 치열한 생각의 씨줄과 날줄들이 따뜻한 마음의 물감과 어우러진 수채화를 보는 듯했습니다"라고. 그 블로그의 주인공이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 책을 펴냈다.
나는 -솔직히-이런 스타일의 글을 즐겨 읽지는 않는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라는 이분법적인, 그리고 딱 부러진 글을 선호한다. 빙빙 돌아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그런 유의 글을 읽기에 나의 조바심의 똘레랑스는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그런 글을 쓰는 이들은 거의 여성이다. 그들은 자신의 얼굴과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 윤신은 자신과 아이와 남편 (아마 이름이 아윤과 찰떡군이었을 게다)의 사진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작가 윤신은 그러했다.
초창기 그의 블로그 글 대부분은 육아에 대한 것이었다. 아이와 지지고 볶는 이야기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천사와 악마의 탈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바꾸어 쓰는 아이와의 육아 씨름은 -임재범이 노래했듯이- 전쟁 같은 삶일 게다. 이 책은 -이제는 육아기가 아닌- 전쟁과 같았던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가 책을 펴냈다. 그것도 용감하게 1인 독립 출판사를 차려 - 그의 말대로 무게와 물성을 지닌- 진짜 책을 펴냈다. '홀로서기 위해서는 힘이, 남에게 기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작가 윤신은 '용기'까지도 스스로의 '힘'으로 조달했다.
이 책은 156쪽의 책이다. 보통 책의 폰트나 여백을 고려하면 아마도 120여 쪽의 단출한 에세이집이다. '누구나'의 일상의 단상이지만, 결코 '누구나'의 생각의 흐름은 아니다. 그 생각의 흐름은 발칙하고, 이불 속 하이킥을 하는, 탈옥을 꿈꾸는, 수인의 이야기이다.
작가의 아픔 (痛)과 관계 (通)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픔은 대개 아련하다. 지나간 시제(時制)의 아픔 (痛)은 그리움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 아픔은 -아픔을 넘어 - 관계 (通)를 꿈꾼다. 그 痛 과 通을 표징 하는 것이 바로 'Alone together (P133)' Chet Baker의 Jazz 곡이다. 이 단어가 이 책의 핵심 키워드이다.
Alone과 together는 상호 모순되는 단어이다. 결코 함께 어울려서는 안 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같이 쓰이면 묘한 misty 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혼자 있고 싶지만, 그것만큼 같이 있고자 하는, 이중적 심리이다. 그래서 이 단어의 뜻은 '따로 또 같이'가 아니라 '단둘'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 사람'들이 쓴 '그런' 글이 아닌, 보통의 삶을 보통이 아니게 살고 있는 '보통 사람'의 글이다. 현재와 과거, 도시와 시골, 국내외를 넘나들면서 주로 아픔을 이야기한다. 때로는 실리콘도 이야기한다. 자신의 병도 말한다. 그 이야기를 토하듯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용기보다는 '위엄'에 가깝다.
그의 이야기들은 색 바랜 사진처럼 다가온다. 사진은 '일종의 걱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순간을 가두기 위해 '찰칵'을 하는 것이리라. 이 책을 만든 이유 또한, 지나간 시제를 현재의 시간 속에 멈추게 하려는 스냅 사진일 게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독립 영화를 만든 경력에서인지 -활동 사진이다. 움직이는 단편 소설이다.
누군가 사진은 '일종의 걱정'이라고 했다. 이 순간이 사라지는 데에 대한 두려움, 잊힐 것에 대한 염려. 사람들은 이 순간이 사라질 것을,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을 두려워 마지않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찰칵. 지금 붉게 물든 저 하늘도 내일의 것과는 다르고 내일 다시 떠오르는 태양도 지금의 것과는 다를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 P89~90
윤신 작가의 다음 책이 기다려진다. 내일 떠오르는 태양의 또 다른 모습을 보고 싶다. 그때쯤이면 '여름 정원'은 '가을 정원'이나, '봄 정원'이 되어 있을 게다. 또 다른 계절의 또 다른 색과 빛의 이야기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