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가벼운 고백 - 김영민 단문집
김영민 지음 / 김영사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끔 아주 가끔 책을 읽는 이들의 특징이 있다. 책 한 권을 읽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 책 참 좋더라"라고. 이런 이들을 압도할 수 있는 말이 하나 있다. 바로 "아, 나는 그 작가 책 다 읽어봤어"이다. 통독 (通讀)이란 그 작가의 모든 말을 생각을 모두 듣고 먹고 씹어 보았다는 것이다. 독서법 중 가장 하기 쉽고,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김영민 교수는 나에게 몇 안 되는 통독의 대상이다. 가볍지만 무겁고 진지하며, 오솔길을 걷는 듯 하지만 절벽으로 향하는 길로 안내하는 진한 패러독스가 가득하며, 경쾌한 리듬에 그 어떤 '몸치'라도 춤을 추게 만드는, 보기 드문 기인 중 하나 이다. 학력 또한 기이하다. 학부에서는 철학을 전공했고, 정치 사상사로 (그것도 하버드에서) 박사를 받았고, 신춘문예 영화 평론 부문 당선자이기도 하다.



정치사상 (정치 외교학과) 교수임에도, 그는 아이돌의 인기를 누린다. <추석이란 무엇인가> 칼럼으로 아이돌 반열에 올랐다. 이 질문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비수와 같은 질문의 전형 (典型)이 되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공부란 무엇인가>,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의 하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등을 읽었다. 그의 책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제목 또한 백미요 압권이었다. <가벼운 고백>의 출간 소식을 듣고는 -내용도 살펴보지 않고- 구매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는 글을 쓴다기보다는 '드립'을 치고 있었던 게다. 그렇기에 진한 허무처럼 잔영과 잔향은 오래 남으며, 긴 시간 동안 곱씹게 만들었던 것이다.


'드립'이란 단어를 잘 알지 못했고,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그저 언어유희, 말로 장난을 치거나, 아재 개그 정도의 허무성을 지닌 말로 생각하고 있었다. 김영민 교수의 신간 <가벼운 고백>의 발문을 읽으며, 파란 창에 '드립'을 타이핑하면서 알게 되었다. "애드리브 (Ad lib)의 줄임말에서 유래한 한국 인터넷 은어로 주로 부정적인 또는 긍정적인 의미의 즉흥적 발언, 마법의 말을 일컫는다. 부정적 뉘앙스로 다양하게 쓸 수 있는 경우가 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영민 교수는 드립을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닌, '성찰적 단문'이라고 했다. “정신의 빈 곳을 가격하는 짧은 문장"이라고 했다. 견문하고 반문하고 의문하고 탐문하고 자문하게 이끄는 문장이라고 했다. 아집의 울타리를 벗어나 독자 스스로 질문하게끔 하는 견문을 나누며 그 세계를 확장시킨다고 했다. 비틀고 반문하며 거꾸로 서서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의 모든 책들은 바로 이 '드립'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의 드립은 도끼처럼 머리를 가격한다. 아프다는 고통보다는 허를 찔렸다는 허무감, 그래서 더 고통스럽다는 표현이 맞다.


세상을 엄근진 (엄숙, 근업, 진지)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낯선 눈으로 독자의 무지를 일깨우며 껄껄껄 웃고 비웃고 있는 듯하다. 깊은 유머로 엄근진을 압도하고 격파한다. 김영민 다운 글들이다. 글과 영화로 춤을 추게 만든다. 어디선가 만화를 보며 낄낄대는 웃음소리도 들린다. 어떤 때는 세상을 비웃으며 세상을 꽤뚤어 본다.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고찰과 아울러, 그 시대와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때로는 "너희들도 별 수 없지?" "그러니까 너무 심각하게 살지 마" "삶이라는 것이 다 그런 거야"라고 말하며 어르고 달랜다. 그 역시 독자들을 무척이나 좌절시키는 나쁜 작가이다. 글로 방귀 좀 뀐다는 이들과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다리이로 찬물을 껴붇는 아주 질이 좋지 않은 작가이다.



그의 드립 모음집 <가벼운 고백>에서 정철 카피라이터가 연상되었다. 낯설고 불편하게,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고, 생각의 비틀기 등을 통해 글을 쓰는 정철을, 넌지시 속삭이며 따뜻한 눈으로 안아 주는 정철을. 두 작가 모두 일상적이면서도 쉽게 읽히는 문장을 통해 깊은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을 지녔다. 겉으로는 가볍고 간결해 보이지만,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글은 닮아 있다. 또한 <가벼운 고백>의 드립들은 곧바로 광고 헤드라인이나 보디의 글로 쓰여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글은 짧다. 기실 장문보다는 단문을 쓰기가 더 힘들다. 절제가 만용보다 힘들듯이. 완벽이란 무엇을 더할 것이 없거나 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더하거나 빼면 무너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단문들은 완벽에 가깝다. 게다가 비시시 그리고 피식 옅은 미소를 짓게 한다. 그들의 글은 <잠언집>을 방물케 한다. 급소를 푹 찔리는 듯한 고통과 아울러 깊고 아득한 카타르시스도 선사한다.



상이점은 정철은 경제학을, 김영민은 철학과 정치학을 전공했다는 것이며, 정철은 두 손을 모으고 말하지만, 김영민은 허리에 손을 얹고 어깨에 힘을 주고 말한다는 것이다. 김영민은 진정 얄밉다. 그러나 얄밉지 않은 김영민, 그는 안개 자욱한 절벽에서 만화를 보며 낄낄 웃고 있는 선사 (禪師)와 같다.



책 중에 오랫동안 뇌리에 맴도는 문구가 하나 있다. "기생충을 향한 최대의 복수는 기생충에 기생하는 것이다" 이 말은 복수 중에 2 번째로 악독한 방법이다. 언젠가 어디선가 읽었던 "최고의 복수는 원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원수가 부끄러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는 것이다"를 제외하고. 상대의 생존 방식 자체를 역이용하는 날카롭고도 심오한 통찰이며, 패러독스이다. 궁금해졌다. 영화 기생충에서 진정한 기생충은 누구였일까.


언제나처럼 책을 읽고 뒷면에 한 줄의 글을 남겼다. "김영민은 영민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쩌면 이상한 몸 - 장애여성의 노동, 관계, 고통, 쾌락에 대하여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36
장애여성공감 지음 / 오월의봄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을 읽다 보면 느끼게 된다. 독서란 연결이요 리듬이라는 것을. 무심코 선택한 책들이 어느새 인가 거미줄처럼 연결되고, 사유를 위한 굳건한 주춧돌이 되어 간다는 것을. '무언가'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그 '무언가'에 의해 이끌려간다는 것을.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던 곳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을. 그것이 보물섬일 수도 있고, 시골의 간이역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근래에 읽은 책들의 키워드는 -절대 나의 의도는 아니었다-'정상'과 '비정상'이었다. 정상이란 보통과 보편이라는 오래된 통념은 가차 없이 그리고 통렬하게 무너져 내렸다. 정상적, 일반적, 주류적이라는 것은 편향되고 왜곡된 인식이었다. 정상이라는 것은 차라리, 차별이요, 혐오요, 무시함과 나아가 모멸감이라는 사실에 망치가 아닌, 도끼에 찍혀 비틀거리게 했다. 꽁꽁 얼어붙은 '가난'이라는 2음절 단어에 대한 인식의 착각과 오류였다.



최현숙 구술 생애사의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와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부터, 강지나 작가의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그리고 홈리스 생애사 기록팀의 <힐튼 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그리고 장애여성공감의 <어쩌면 이상한 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서사였다.


비정상성으로 분류되는 노숙인, 생활 수급자 청년, 그리고 장애여성들의 생애사였다. 한낮 통계의 수치로 가감되는 존재가 아니라 이반인 (二般人)이 아닌 일반인 (一般人) 고유의 삶의 생애사였다. 땀과 몸으로 쓴, 아니 육 (肉)으로 그린 누드 자화상이었다. 글이란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었다. 손이 아닌 몸으로, 몸의 그리움을 그린 글이자 그림이었다.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 그리움을 육필 (肉筆)로 그리고 쓴, 육화 (肉畵)였다. '나도 여기 있어요"라는 그들의 육성과 몸짓을 연출 없이 가감 없이 기록한 '다큐멘터리' 또는 '르포르타주'였다.



<어쩌면 이상한 몸>은 '장애여성공감'이라는 장애여성 인권 운동 단체에서 펴낸 책이다. '국가 권력이 정해놓은 정상성에 도전하고 소수자를 억압하는 규범을 흔들고자 장애여성의 관점에서 질문을 던지는 단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8인의 장애여성의 짧지만 긴 서사이다. 장애여성이 직접 쓴 글과 또는 구술로 이루어진 책이다.



책 제목은 단순하게 '이상한 (Queer) 몸'이 아니다. 성소수자들은 자신을 이반적 (二般的 또는 離叛的)이라고 칭한다. 이는 일반적 (一般的)이라는 통념에 대항하여 사용한다. Queer란 단어가 광범위한 의미를 함유하는 것은 소수자들의 자조 또는 해학이거나, 정상인의 시각에서 본 비정상성을 말하는 것이리라. 책 제목에는 '어쩌면'이 덧붙여 있다. 여기에 주목해야 한다. 부분 긍정과 부분 부정의 '어쩌면'이라는 절묘한 형용사는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의 렌즈에 따라 이상할 수도, 그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어쩌면'일 것이다.



이 책은 '장애 여성'이 아닌 '장애여성'을 -띄어쓰기 문법을 거부하며-사용한다. 장애여성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이야기하고 장애+명사라는 구분 없이 하나로 연결된 언어로 이해될 수 있도록 붙여 썼다고 한다. 어쩜 우리 사회의 두 종류의 소수자가 하나로 뭉친 (어쩜 그래서 더욱더 비극적인) '장애여성'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장애와 젠더를 둘이 아닌 하나의 정체성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그들의 몸은 '어쩌면 이상한 몸'이 되었다. '장애가 없고 아프지 않은 상태'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사회에서는 '장애가 있고 아픈 몸'은 '비정상적인 몸'이 된다 (P41)



'영감 포르노 (Inspiration Porno)'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가난 또는 장애를 지닌 이들이 굴레를 벗어던지고 깨치고 나가 이긴 서사를 방송은 선호한다고 한다. 목적은 장애인이 아닌, 정상인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을 말한다. 그게 '영감 포르노'의 효용이요 쓰임새이다. 이 책은 그것을 착취라고 말하고 있다. "장애인의 몸과 고난, 노력이 비장애인에게 삶의 동기 부여로만 활용됨으로써 장애인의 이미지가 착취된다" (P68)"



가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가난 포르노 (Poverty Porno)'에는 공식이 있다. 아프리카의 기아에 죽어가는 아이를 위한 모금 광고에는 대부분 한 아이의 모습만이 클로즈업되어 비추어진다. 다수가 비추어질 경우 시각의 분산을 이끈다는 이론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가난 포르노'를 대하는, 보통의 정상성을 지닌 이의 대응 방법은 단 하나이다. 채널을 돌리는 것이다. 도저히 보지 못하겠다는 피동적 회피라기보다는, 그 순간을 모면하려는 능동적 회피의 심리이다. 위험을 감지한 타조가 모래에 머리를 파묻듯, 직시하지 않는 외면을 현실화한다. 직시, 직면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회피하는 것이다.



정반대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시스템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를 이리 떼라고 비난하거나 가난한 자의 개인적 문제로 객관화시키기도 한다. "가난한 아이들은, 혹은 흙수저 애들은 노력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가난한 아이들은 답할 것이다. "당신의 말이 맞다. 그런데 누구나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똑같이 안 하고 못할 것이다"라고. 둘 다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난을 개인적 문제로 객관화하는 것이 더 비겁한 짓이다.



애도하는 방법 또한 그러하다. 누구나 비극적 상황에 애통해 하며 슬퍼한다. 특히 죽음의 경우에는. 그러나 한편 그 애통의 마음 저편에는 나는, 그리고 나의 가족은 그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었다는 '안도'의 마음이 애통을 압도한다. 하얀 국화 한 송이를 (애도 주관 기관에서 마련한) 영전에 바치는 것으로, 그래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범인 (凡人)임에 자부심도 갖는다. 이것 또한 회피이다. 애도가 아닌 자기 위안이다.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에서 최현숙 작가가 말한 '가난'에 대한 질문은 이 책을 이해하기에 도움을 준다.


가난에 관한 질문들 가난한 이들에게 생애 이야기를 청하는 사람으로서, '가난'에 관한 내 궁극적 시선을 우선 밝힌다. 가난은 세상을 사는 온당한 존재 방식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여기서 언급하는 가난은 경제적 가난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가난과 성적 가난 등을 포함한다. 가난 자체가 상대적이듯, 온당함 역시 상대적이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일상 자체가 더 생태적이며 더 반자본적이다.


사회문화적으로 권력이 없는 사람은 해의 양과 질에서 덜 가해적이다.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은 억압할 권력과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따라서 가난은 잘 감당하기만 한다면 평화적이고 생태적인 존재 방식이다. (...)


다른 한편 '왜 가난한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난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라는 질문이다. 드물지만 '나 가난한 게 남한테 무슨 죄가 돼? 부끄러운 게 뭐 있어?' 하는 당당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빈곤 때문에 자신을 쓸모없고 실패한 사람으로 낙인찍는다. 고단한 노동과 싸구려 임금을 억울해하며 분노를 느끼는 사람은 드물고, 빈곤한 처지에 대해 자괴감을 넘어 죄책과 자기혐오까지 가지고 있다.


빈곤을 게으름이나 방종으로 분류하고 비정상과 사회악으로 규정하는 보수 기득권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정상 이데올로기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내면화되어 있곤 하다. (...)' 혹 세상의 희망이라면, 여전히 내내 잡초들이 희망이다.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 p108~111 최현숙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에서는 "빈곤이란 단순히 재화의 부족이 아니라 자유로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려는 역량의 박탈 (P146)"로 규정하며, 가난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으로 '도움을 주는 기관이 아닌, 성찰하는 힘'을 제시한다.



가난과 장애를 바라보는 자칭 '정상인'의 렌즈는 바뀌어야 한다.


'특별하다', '대단하다'는 말이 가장 듣기 싫다. 찬사하는 말 뒤에 숨은 사람들의 편견, 기구한 사연을 좇는 호기심 어린 시선에 마저려면, '평범하고 무난했다'는 달관이 필요하다. (P104)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보다는 '치료'라는 신기루를 쫓도록 하는 것도 폭력이다. (p111)


남성 중심, 비장애인 중심, 이성애 중심, 선주민 중심, 성인 중심 사회에서 소수자가 되는 개인이 

스스로 노력하고 극복하는 것보다 사회적 인식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P83)



이 책을 단 한 줄로 요약하면 바로 이것이다. '내가 걸을 때 함께 걷는 이들이 나의 속도를 배려해 주는 것' (P89). 그것이 지극히 비정상이지만, 정상이라고 우기는 이들이 새로 장착해야 할 사유와 인식의 렌즈이다. 그냥 자신과 같은 존재로 존재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야말로 정상이 아닌 비정상이다. 그야말로 진정한 장애인이다. 그것도 몸도 마음도 가난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 빈곤과 청소년, 10년의 기록
강지나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질문에 깊은 생각을 하고 답해보자.


"무절제, 방종, 중독은 가난의 원인인가?" 또는 "무절제, 방종, 중독은 가난의 결과인가?" "가난은 개인의 문제인가? " 또는 "가난은 사회 시스템의 문제인가?"

어쩜 개인적 선호인 보수와 진보 이념에 따라, 가난과 빈곤의 원인과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자신의 신념이나 확신에 따라, 답과 결론은 극명히 달리할 것이다. 모든 가난의 원인을 능력주의 (Meritocracy)에 근거하여 개인의 게으름 자기 절제 등 개인적 문제로 돌릴 수도 있다. 또는 그렇게 만든 조건과 환경의 문제 인로도 볼 수 있다. 과연 가난과 빈곤의 원인과 결과는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이 책은 8명의 청 () 년을 심층 인터뷰하여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라는 거대한 담론을 제기한다. 저자는 가난한 청년들을 알기 위해 등불의 스위치를 올리고, 깊은 사색을 시도한다.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사회적 현상에 집중한다. 가난한 부모 또는 조부모로부터 가정에서의 돌봄과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아이들의 자기 정체성 결여, 대인 관계의 기피, 자신감 결여, 실패의 두려움, '사회적 그리고 관계적 자본' 없이 사회에 덩그러니 던져진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눈에 띄는 작가의 결기도 느껴졌다. 가난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범하기 쉬운 것이 하나 있다. 저자가 이야기했듯이 '빈곤층의 삶을 팔아 이용하는 것이다. 비록 본인의 의도는 아니었더라도, 결국은 본인은 적극적인 관찰자 (또는 방관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을 조금 더 생각했다는 이유로, 스스로 영웅이나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분장하기 쉽다. 그들의 삶을 팔고 이용하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서사가 되지 못하고, 본인의 영웅적 서사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정작 그들을 돕는 일에는 손을 떼면서, 남보다는 선한 사람이라는 상대적 우월감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우리는 그들을 잘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편견으로 그들을 지켜봐 왔다. 가난한 청년들이 고민하고 어려워하고 진정 바라는 것들은 그리 커다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독자의 폐부를 찌른다. 그것도 아주 아프게 말이다.

'누가 내 얘기를 들어주었으면 (P16)'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잡아주고, 힘든 삶에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절박 (P16), '교육과 돌봄의 공백' (P22) ' '스스로 견디는 삶' (P27), '관계 맺기의 어려움 (P29),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P29)' ' 관계망 (P37), 가족의 무관심과 방임 (P105), 자아 정체감 : '한 개인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자아실현을 위한 일이 무언가에 대한 인식 혹은 사고, 출발점부터 불평등한 구조 (P158), 돌봄의 공백 (P166), 자아존중감 결여 (P230), 경제적 독립을 넘어서 심리적 독립 (P239).

빈곤의 대물림 문제는 경제나 사회 문제가 아닌, 집단구조 내에 뿌리내린 하위문화임을 서술하고 있다.

'하위문화의 특징은 운명주의, 무력감, 의존심, 열등감'이다. (P35),

문제행동이 하나의 습속으로 전수되는 양상이 현실적으로 관찰된다. (P36)

빈곤 대물림은 박탈의 경험이 대를 이어 축적되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로 고착되는 과정이다 (P38), 경제력이나 가족, 배경, 학력 등 사회적 자본 없이 (P46),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힘든 것 같아요 (P65),

생존 자체에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합리적 판단을 하고 미래 지향적 사고를 할 에너지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P99),

자아존중감 찾기는 누구에게나 껍질을 깨고 나오는 아픔을 동반하는 과정이다 (P121),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가난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으로 - 환경과 도움을 주는 기관이 아닌-'성찰하는 힘'을 제시하고 있다. "성찰하는 힘은 인간이 사회적,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 자신을 돌보고 스스로 자기 욕망과 사회적 위치를 사고하고 판단하는 내면의 성숙도, 즉 성찰하는 힘에 대해서는 참 소홀하다고 생각한다. (P97)

가난과 빈곤의 원인 결과의 끝없는 논쟁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책의 제공의 실마리로, 스스로 생각하고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생각과 사고의 근육을 키워주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빈곤은 단순히 재화의 부족이 아니라 자유로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려는 역량의 박탈이다. (P146)”라는 아마티아 센의 말은 울림이 크다. 박탈된 역량을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성찰의 힘인 것이다. 그것이 진정 빈곤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초가 되는 것이다.

호주나 미국의 원주민 (원주민이라는 말은 잘못 표현된 것이다. 맞는 표현은 원주인이다) 정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제한된 구역에 원주민을 몰아넣고 거주하게 하고, 먹고사는 것을 모두 해결해 준 결과, 다수가 마약과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된다. 스스로 자립하고 독립하는 자주/자조 정신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어쩜 식민지 경영자 또는 점령자들은 의도적으로 원주인들의 성찰의 힘을 박탈시키려 했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이 강조하는 시사점은, 경제적 지원으로 빈곤 해결을 갈음하고자 하는 행정 및 정책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정체감, 진로 탐색, 성찰하는 힘이 뒷받침되어야 -내면적 힘이 강해져야-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통을 통해 단단해진, 상처가 아물어 딱딱한 딱지가 내려앉듯,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또 다른 차원의 과제이다. 그것의 출발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밥이 아니라 책일 수도 있다. 밥 없이는 살 수 없지만, 밥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격언이 다시 다가온다.


누구나 자신의 삶은 고유하고 특별하다. 반면 세상에 태어나 맞닥뜨린 환경과 상황은 모두 상이하다. 누군가에 주어진 하루의 시간은 동일하며, 그 시간을 어떻게 밀도 있게 보내느냐는 각자 인간의 몫이기도 하다.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은 구축되어야 하고 지원해야 한다. 삶의 시간을 얼마나 농밀하게 보내느냐는 환경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각자 개인이 헤쳐나가야 할 책무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무척이나 불운한 이들에게 어떻게 성찰의 힘을 배양할 수 있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결핍은 불운이지만,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야 한다.

어느 젊은 노숙인 청년의 사례가 생각난다. 부모에게 버림을 받아 알코올 중독에 노숙인의 신분이 되었으나, 인문학 강의를 수강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 사이버 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에게 삶의 지향점인 목표를 설정하게 해준 것은 바로 인문학의 힘이었다. 그것이 저자가 이야기한 '성찰의 힘'을 기르게 해준 것이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설 수 있는 두 다리에 힘과 근육을 키우게 해준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방의 밤 - 당신을 자유롭게 할 은유의 책 편지
은유 지음 / 창비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은유(隱喩)


은유 (隱喩)를 영어로는 무엇이라고 할까요?라고 물으면 웬만하면 메타포 (Metaphor)라고 답한다. 그럼 직유 (直喩)는 영어로 뭐지요?라고 물으면 멈칫한다. 아무리 고민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Input이 없었으니 output도 당연히 없다. 직유는 영어로 Simile이다. 뭐, 그냥 하는 이야기다. 그걸 몰라도 직유법을 사용하며, "너는 별과 같아"라고 말하고 글을 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근데 영어 단어만 보아도, 시밀레보다는 메타포가 달라 보인다. 품위가 있어 보인다. 숨김과 단도직입의 차이라고나 할까.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보다는 숨기는 듯 드러내는 은유가 한 수 위인 것 같다. 은유 작가의 매력 또한 은유이다.



은유 작가의 책을 읽을 때마다 궁금했다. 직접 질문을 해보았다. "필명은 어떻게 은유라고 지으신 건가요?" 답은 아주 간단했다. "제가 은유를 좋아해서요" 맥이 풀렸다. 무슨 심오한 의미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그저 허물어졌다. 그러나 은유 (隱喩)라는 필명 (筆名)은 참 잘 지은 것 같다. 그가 펴낸 책을 그래도 많이 읽었다는 나의 생각은 그러하다.


은유란 본뜻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어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은유는 직유보다 강하고 힘이 세다. 소소하지만 그 소소함 속에 숨어 있는 소소하지 않은 글의 힘을 발휘한다. 소소 (小少) 하지만 소소 (素素) 하게 하얀색이다. '이것이 답입니다'라는 해법이 아니라, '이걸 생각해 보세요.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질 겁니다'라며 넌지시 손을 내미는 은유 (隱喩), 그것이 은유 작가의 매력이다. 최고의 강점이다.



2. 울컥


은유 작가는 어느 책에서 '울컥이란 존재의 딸꾹질'이라고 했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울컥' 무언가 알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올라오는 느낌을 많이도 받는다. 건드리기만 하면 터져 버리거나, 흘러넘칠 것 같은, 인간의 심상을 '울컥'하게 만든다.


그만큼 그의 글은 독자들의 마음과 근접해 있다는 것이다. 독자는 이런 심정일 게다. 마치 몰래 숨어 먹다가 들킨 아이의 심정처럼 "너도 그랬구나. 나만 그런 줄 알았어"라는 동류의식과 동지의식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울컥'을 촉매로 글을 쓴다. 독자를 울컥에 젖게 한다. 나와 다름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평안과 편안함을 선사한다. 앞으로 모았던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그의 손을 잡게 한다. 작가의 이야기는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홍세화 선생은 말씀하셨다. "어떤 이의 죽음은 숫자로 표기되고, 어떤 이의 죽음은 서사로 기록된"라고. 바로 은유 작가는 서민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 따스한 손을 내미는 같은 서민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서사로 둔갑시킨다. 주인공이 되게 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아주 자주 '울컥'한다. 울컥은 존재의 딸꾹질이 맞다. 나도 존재하는 존재임을 알게 하며 몸은 울컥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작가도 고민 많은 엄마이고, 독자도 그런 엄마이고, 식탁이 글을 쓰는 책상이 되고, 작가와 독자가 상호 빙의하며 글을 쓰고 글을 읽는다.



3. 결코 소소하지 않은 소소함


그의 글은 레토릭이 아니다. 호흡이 급하지 않다. 그저 소소 (少小) 하고 소박하고 투박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너무도 하얀 소소 (素素) 한 글이다. 생각의 여백을 제공한다. 여백이란 채우지 않고 일부러 비워둔 공간이다. 여백은 하늘고, 구름도, 물도 된다. 채우지 않은 나머지는 모두 여백이다. 남는 것이 아니라, 남겨둔 것이다.


그의 글이 그러하다. 거창하지 않으나 긴 여운이 서사를 벼리고 빚어낸다. 작은 송편이나 거친 수제비 같지만, 그 음식은 위로와 위안의 말로 허기를 채우게 한다. 현학적인 글이 아니다. 다만 어휘와 말투가 단정하고 정갈하다. 그만큼 퇴고의 고통을 많이도 한 결과일 것이다. 그의 글에는 녹지 않은 미숫가루의 떡진 분말은 없다. 그의 글은 넓고 깊다. 그 힘은 그가 시를 많이 읽었고 철학 책을 끼고 살았기 때문이리라. 그 사유의 날갯짓으로 소소하지만 선한 영향력의 전도사가 될 수 있었으리라.




<해방의 밤>에도 많은 밑줄을 그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 극심한 휘발성 때문에 이별을 고하겠지만 조금 더 머물러 있으라고 여기에 옮겨 본다.


내 삶은 책기둥에서 시작되었다 P5


훌쩍훌쩍 울컥울컥 10년 ... 식탁을 책상 삼아 밥을 짓고 글을 썼다 P9


큰 아이는 올해 어버이날에 이렇게 썼다. 

"2020년 11월부터 삶에 책을 들이고 2021년 5월부터 삶에 글을 들였습니다. 그 이후로도 차곡차곡 일과 삶의 대전제들, 즉 변하지 않고 사고의 기준이 되어줄 것들을 쌓아왔습니다. 문장을 수집하기도 하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기도 하면서요. 돌이켜보니, 어머니의 말들, 삶의 고유성과 구체성을 이야기하는 것, 타자의 삶에 공감하고 그들이 되어 보는 것, 불행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더라고요. 그래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해피 어버이날" P15


내가 세운 자취의 목적은 두 가지다. 인간에게 마땅히 필요한 '고요한 단독자'의 사간을 늦게라도 살아보는 것. 그리고 <반사회적 가족>을 교본 삼아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중산층 가족을 가족 외부에서 비판적으로 사유해 볼 기회를 갖는 것 P43


<욕구들>의 저자는 '딸'의 목소리로 묻습니다. "어머니가 결코 갖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 나 자신에게 허용할 수 있어?"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뻥 뚫리는 말입니다. '하지 마'의 세계에서 엄마를 구원하는 멋진 문장이죠. 사랑눈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나중에'라는 시간은 영영 도래하지 않으며 지금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행동해도 된다는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증여이고, 원함에 관해 아이들이 본받을만한 모범이 된다는 점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는 일에 비해 모자람 없는 어머니의 일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P55


사람은 잘 안 변한다고 하잖아요. 대개는 그렇죠. 그런데 한 존재가 자기를 겪게 바꿔내는 계기가 두 가지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사랑으로 아플 때, 하나는 돈을 벌어야 할 때. 그래서 사랑을 쉽게 하고 돈을 쉽게 벌고 그러면 좋겠지만 타자 경험의 기회가, 즉 다른 내가 되어볼 계기가 없다는 측면에서는 그리 좋은 삶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P67


삶은 그저 삶일 뿐이지요. 늘 고난이 있습니다. 좋은 순간도 나쁜 순간도 있고, 저는 좋든 나쁘든 그 모든 순간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우리는 고통과 슬픔을 경험할 테니까요. 그것은 삶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친절은 우리가 베풀거나 베풀지 않겠다고 선택할 수 있어요. 타인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친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자신에 대한 친절도 매우 주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국 친절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일 텐데, 선택이기 때문에 저는 친절에 대해 쓰는 것이 좋습니다. P107


일상의 속도 제어 장치로 시를 들였다. 시는 산문이나 소설처럼 논리적 사고로 읽어낼 수 없는 장르거든. 읽다가 요철처럼 걸리는 구절이 있어서 생각도 서행을 한다. 행간에 머물지. 이게 뭐지? 왜 슬프지? 이거 좋다! 이런 느낌은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지. 삶을 그냥 살아내야 하듯이 그저 읽어내면 되거든. 논리적 이해가 아닌 묵묵한 독해. 안 보이는 것이 보일 때까지 붙드는 마음 P1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이비부머가 노년이 되었습니다 - 사회학자 김찬호 에세이-삶의 리셋 버튼을 누르는 마흔 단어
김찬호 지음 / 날(도서출판)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을 읽다 보면 저자가 지은 글들은 여러 모습과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느 글에서는 맛과 솜씨와 멋이 느껴지고, 한없는 깊이도, 경계 없는 넓이도, 그윽하고 짙은 향기도, 지극한 아름다움도 느껴진다. 이로 인해 작가들은 어쩌면 독자들에게 글에 대한 경외심과 아울러, 글쓰기에 대한 좌절과 절망과 모멸감까지 부여하기도 한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글쓰기의 한계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소위 시중에는 자칭 타칭 방귀 좀 뀐다는 글쟁이들이 많지만, 이 모든 특징을 갖춘 글쟁이들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깊이만 있거나, 넓이만 있거나, 맛만 있거나, 멋만 있는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아마도 김찬호는 이 모든 특성을 두루 갖춘 몇 안 되는 글쟁이 중 하나일 것이다.



항상 그의 관심은 (사회학자로서 아니 한 인간으로서) '사람'을 향해있고, 그것도 제대로 된 '사람'과 그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에 현미경과 망원경을 가져다 댄다. 그의 책을 10여권 읽어 본 나로서는, 이제는 그가 하는 '말'들이 식상할 수도 있다. 그가 항상 강조하는 것은, 멈춤, (자기) 성찰, 통찰, 반성, 깨어있음, 돌봄, 이웃, 연대, 연민, 바라봄, 돌아봄 등이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그가 새 책을 출간할 때마다 업그레이드 되어 힘을 더한다. 그가 택한 주제들은 깊고 묵직한 반향을 던져주기도 한다. '생애의 발견'이, '모멸감'이 그러했고, '유머니즘'과 '대면 비대면 외면'이 그러했다. 시대가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을 시의적절하게 어루만지고 감싸 안는다.



그는 언어 연금술사이다. 사회학 교수가 여느 글쟁이 보다 잘 쓰고 어휘를 잘 선택한다. 그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반드시 그곳에 위치해야 할 그 단어들이다. 대체 불능한 단어를 골라 쓴다. 여느 산문집보다 글솜씨가 빼어나다. 칼럼이 아닌 에세이를 읽고 있는 듯하다.



그는 진정 현대판 간서치 (看書痴) 이다. 다독은 물론 다양한 매체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한다. 어쩜 그는 지식과 지혜를 저금하는 성실한 예금주이다. 시, 에세이, 심리학, 사회학, 논문, TV, 영화, 신문 등 그의 관심의 레이더의 주파수는 강하고 넓다. 그러니 그의 글의 깊이와 넓이는 깊고 넓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잘 버무린다. 글맛과 글멋을 벼리고 빚어낸다. 목소리는 크지 않고 읊조리지만 그 울림은 크고 폐부를 찌른다. 뻔한 이야기이지만 뻔하지 않다




<베이비부머가 노년이 되었습니다>라는 제목은 출판사와 편집인이 기피할 정도로 아주 긴 제목이다. 게다가 이제는 노년이 된 저자의 흑백 사진이 (아주) 커다랗게 인쇄된 책 표지는 호불호가 있었을 게다. 아마도 노년에 들어선 저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이 책은 김찬호의 칼럼집이다. 그동안 썼던 칼럼을 40개의 키워드로 분류하고 재배치하여 펴낸 책이다. 보통 칼럼집은 대 주제별로 (대충?) 분류하여 챕터를 만들지만, 이 책은 남달랐다. 작가와 편집자의 노고와 기지를 엿볼 수 있다.


기실 칼럼니스트들은 키보드 워리어로써 좋은 말과 멋진 말을 계몽적으로 말한다. 거기다가 어디선가 인용한 일화나 책의 문구를 넣어 장식한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너희들) 독자들은 이 고매한 자의 말을 따르고 행해야 한다는 훈계조의 칼럼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김찬호는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상당 부분이 자신의 이야기이며, 자신도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온전하고 완전하지 못한 인간임을, 자신도 외롭고 고통이 있음을 고백하고 자백하는 고해성사를 한다. 그것도 아주 세련되게 말이다. 그리고 "너희들은 이래야 한다"가 아니라, "저도 이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베이비부머가 노년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러하다. 노년에 접어든 작가의 자기 고백서이자 자기 성찰서이다. 그래서 자신의 현재 모습을 책 표지에 흑백으로 실었나 보다. 나를 제외한 여러분이 아니라, 저자 자신을 포함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여느 잠언집을 능가할 정도로 엄중하다. 이야기는 일상적이나 무게는 남다르다. 이제 회당의 의자 배치가 달라졌다. 이제는 군림과 권력과 존중을 강요하던 자리에서, 이제는 위엄과 권위와 자발적 존경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말석에 자리 잡는다. 집착과 애착과 회한에 머물지 말고 줏대 있고 과시와 허세를 내려놓는, 비우고 새로운 것으로 채워가야 하는 이들이 기억해야 할 명상록이자 고백록이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이 되었고, 이렇게 살 수도 있고 이렇게 죽을 수도 있을 때 예순살이 되어, 노년의 문을 열고 들어선 이들은 필수적으로 읽어야 한다. 특히 한국 남성 베이비 부머들은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어쩌다 나이를 (들지 않고) 먹었으며, 어쩌다 노인이 된 이들은, 보수교육을 듣듯 새로운 포지션에 맞는 새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귀뿐 아니라 모든 것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순해져야 한다. 순해짐이란 완고해짐이 아니라 견고해짐이다. 죽음을 직시하며 매 순간 깨어 있어야 한다. 이 책은 노년기에 접어든 이들에게 지극히도 적합하다.



노년의 문이 저만치 보이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미리 새 옷을 구매하여 치수를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년에 접어든 아비와 어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모든 이들을 위한 '생활 지침서'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글맛이 나고 글멋이 있고 글솜씨가 넘치는 명문장들이다. 그중 몇 개만 옮겨 본다.



"언어가 억압의 도구로 작용하기 쉬운 세상이다. 지위나 나이 등의 위치 에너지에 편승하여 비난과 폭언을 내뱉는 경우도 흔하다. 그 결과 타인으로부터 소외되거나 아집과 독단의 감옥에 스스로 갇혀버린다. 탈출은 가능한가. 서로의 맥락을 교차시키면서 이야기를 확장하는 공간이 열려야 한다. 구태의연한 허위에서 벗어나 존재 그 자체를 '추앙'하는 관계, 투명한 문법의 서사를 통해 우리는 좀 더 의연해질 수 있을 것이다." (P50~51)



"일상 속의 담담한 여백, 넉넉한 마음의 품이 있어야 한다. 꽉 채워지지 않은 그릇에서 생명의 힘이 자라난다. 그러니 약간의 부족함과 허기를 즐기자. 결핍을 꾸준하게 훈련하자. 적게 소유하고 풍요롭게 존재하는 기쁨이 선물로 주어진다." (P131~1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