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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 - 트럼프와 1조 달러 전쟁 기계의 야망
윌리엄 D. 하텅.벤 프리먼 지음, 백우진 옮김 / 부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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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전쟁,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1949년에 출간된 조지 오웰의 <1984>는 디스토피아를 상정한 현대판 SF 소설이다. 이 문구는 이 소설에 나오는 '빅 브라더'가 통치하는 전체주의 가상 국가 오세아니아 당의 슬로건이었다. 힘의 우위를 전제로 한 전쟁으로 '평화’를, 자유를 ‘예속’으로, 무지를 ‘권력의 힘’으로, 통제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80여 년이 경과한 지금에도 사그라지지 않고 귀를 울린다. 이 가상 소설은 리얼한 현실이 되었으며, 지금 2025년에도 우리의 고막을 울린다.

현대판 '빅 브라더'는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는 아주 시의적절한 시기에 번역 출간되었다. 평화를 말하면서 동시에 전쟁을 부추기는, 최강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협박하며, 수틀리면 일국의 지도자를 살해하고 체포하는 -국제법을 휴지로 만든 채- 힘을 사용하는 미국을 파헤친다.



겉으로는 '전쟁의 중재자' 또는 'Peace Maker',라고 하지만,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미국의 민낯을 드러낸다. 이 책에서는 미국을 병영국가 (Garrison State),  군비합중국 (The United States of Armament)라고 묘사한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항상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을 멈출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군산복합체 (Military-Industrial Complex:MIC), 전쟁기계 (War Machine)의 강력한 영향력에서 찾는다. 그들은 무기를 생산하지만, 그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이라는 무기 또한 만들어 내는 '죽음의 상인'이다.



세상에 좋은 전쟁 (Good War)는 없음에도 그들은 전쟁을 게임처럼 한다. War Room에서 전쟁을 관람한다.


미국에겐 적이 필요하다. 그래서 항상 (가상의) 적이라도 만들어 내야 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후 무소불위 국가가 되었음에도, 가상의 적 (중국)이라도 만들어 내어, 국방예산을 키워나가야 한다. 중국은 모든 상황에 맞추어 이용되는 '만능의 적'이 되었다.


MIC아 전쟁 기계는, 국가 예산, 군수 사기업의 이윤, 그리고 일자리 창출로 지배되는 의회, 그리고 그 속에 자리 잡은 선거자금의 기부, 로비스트의 활동, 일자리 창출 약속 등이 작용하고 있음을 분석한다. 바로 전쟁 준비와 전쟁이, 미국 경제를 움직이는 핵심 요소라고 분석한다.


이 모든 것들은 바로 '돈'과 연관되어 있다. 전쟁을 상업화하고 있다. '돈'을 목적으로 한 복마전과 아수라장을 하나하나 파헤친다.



전 세계 국방예산의 40%를 차지하는 미국의 1조 달러를 육박하는 국방예산은 MIC와 전쟁 기계의 좋은 먹잇감이다. 더 많은 세금을 먹어치우고, 초대형 군수 사업 업체가 떠받치며, 싱크탱크와 대학, 할리우드, 게임산업, 언론을 통한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군수 예산을 확보하여 사적 이윤을 추구한다. 이는 결국 국제 분쟁을 야기하며, 국가의 예산 편중으로 인한 국민들의 삶에 악영향을 미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놀라운 사실은 어마어마한 예산으로 전쟁 기계를 만들어 내었으나, 그 기계는 고장 나 있다는 것이다. 연안 전투함, F-35, F47, KC-46, V-22 등 전쟁 기계들은 제대로 생산이 되지 않고 있거나, 결함으로 인명 피해가 일어나고 있거나, 지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산은 차질 없이 집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돈을 목적으로 한 복마전이자, 부당 거래이자, 아수라장이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회전문 (Revolving Door) 인사'를 통해 국방부 계약업체의 로비스트들이 양산된다는 것이다. (전현직) 의원, 비서관, 행정부, 군인, 싱크탱크의 인사들로 하여금, 돈의 흐름과 구조를 장악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를 '합법적인 부패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로비스트는 전쟁 기계가 끊임없이 돌아가도록 기름칠을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싱크탱크는 비영리 기관임에도 여론 형성은 물론, 정책 형성에 깊이 관여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후원금 (다크 머니)은 싱크탱크의 자기 검열, 후원자 검열, 관점 걸러내기를 통해, 싱크탱크를 자신들의 의도대로 조절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전쟁 기계를 펑화 기계로 전환을 위해 새로운 '평화 네트워크' 구축을 제안한다. 이는 국경의 군사화와 경찰의 군대화, 예산 우선순위의 군사화, 할리우드의 군사화, 대학의 군사화, 그리고 온실가스 배출 주범이자 석유 국가들의 수호자로 기능하는 펜타곤으로 인해 악화된 기후 위기의 군사화까지 망라하는 군사주의의 모든 형태를 변혁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연대와 협력, 더 넓은 평화 네트워크로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회 전체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선하고, 거의 항상 옳으며, 편화와 민주주의의 확산에 기여한다는, 신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의 이란 침공에 왜 지지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한 야당 의원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세상에 좋고 선한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은 정작 가장 약한 존재들을 죽음으로 내몰며 그들을 숫자로 카운트하게 할 뿐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이 더욱더 의미를 더하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전쟁은 평화로운 내일을 조각하기에 형편없는 끌이다.

Wars are poor chiesels for carving out peaceful tomorrow

마틴 루터 킹 주니어 (Martin Luther King Jr)


전쟁은 너무 거대한 '인류의 비극'이다. Big Brother에게 더 이상 큰형의 자비로움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만을 얻을 뿐이다. 


진정 미국은 인류의 마지막 전쟁이라는 '아마겟돈 전쟁'을 꿈꾸고 있는가?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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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생각법 -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시대의 물음표 사용법
정철 지음, 김파카 그림 / 블랙피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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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을 처음 접한 것은 꽤나 오래전 영풍문고의 신간 안내 좌대였다. 무심코 집어 들어 첫 페이지를 넘겨본 후, 자리에 서서 수십 페이지는 읽어 내려갔을 게다. 아마도 <불법 사전>이라는 묘한 제목의 책이었으리라.


깔끔하고 재치가 넘쳐나는 존버 이외수의 글 같았고, 피식 헛웃음이 튀어나오는 것은 전유성도 닮았었다. 배고픈 철학자의 입에서 나오는 깊이와 울림이 넘쳤다. 신선 (神仙)처럼 내뱉는, 그의 말은 신선 (新鮮) 했다. 팔딱팔딱 꼬리를 흔들며 움직이는 글이었다.




그 후 그의 책을 오타쿠처럼 읽으며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책이 서재에 나란히 꽂혀 있다. 무려 13권이. 이제 또 한 권이 추가되었다. <사람의 생각법>이라는 이름의 책이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시대의 물음표 사용법'이라는 아주 긴 부제의 책이다.


지금까지의 글과는 조금 달랐다. 낯설었다. 조금은 정철답지 않았다. 그의 글의 가장 큰 특징은 짧고 간결하다는 것이다. 묻고는 바로 답을 건네는 즉문즉답의 글이었다. 질문은 어려웠지만, 답은 알딸깔센했다. 그러나 이번 글은 그 반대였다. 질문도 답도 쉽지 않았다.


이번 글은 단편 소설에 가깝다. 아니, 장편 (掌篇) 소설이다 (사실 그의 첫 번째 작품은 소설이었다. 그는 대학교 시절 소설로 대학 문학상을 받았었다). 그의 호흡은 조금은 더 길어지고 천천히 그리고 찬찬히 말을 건넨다.


유튜브처럼 조그마한 카메라를 들고 세상의 풍경들을 관찰한다. Moving Essay이다. 그러곤 계속 무언가를 던진다. 짱돌도 저히 피할 수 없는 거대한 바위를 밀고 굴리기도 한다. 그 돌들은 굉음을 내며 굴러떨어져 조각나며 수많은 물음표를 던진다. 마치 유대인의 교육법이라는 '하브라타'의 정철 버전을 보는 듯하다. 목차를 펴면 모든 글에는 물음표로 끝난다. 물음표는 묘하게도 귀를 닮았다. 궁금해서 묻는 것이고, 묻고는 듣겠다는 언약이다.


가장 치명적인 질문은 바로 "왜?"이다. 이 질문 앞에 서면 누구나 작아지고 적어진다. 기존의 믿음과 가치를 뒤집어엎는 단 한 글자 앞에서는 말이다. 모든 것을 전도 (顚倒) 하고 뒤집어엎는 도전 (挑戰)의 말이기 때문이다.


정철은 '관찰자'에서 '해설자'로 '주해자' 로 변신한다. 너무나 많은 일인 다역의 역할을 해낸다. 눈에 띄는 모든 것을 재료 삼아 '대화'를 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글쟁이들 특히 시인들이 사물을 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풍경이란 글의 재료이자 사유의 시작이다. 그것이 바로 상상력의 시원 (始原)이다.


이번 글 또한, 굳이 인공 지능 시대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가 계속 써 왔던 - <나는 개새끼입니다> 단 한 권을 제외하고는, 사실 이 책도 한 사람에 대한 책이었지만- '사람'에 대한 것이다. 사람다움, 사람처럼, 사랍답게 살기, 생각하는 사람 되기, 변함없는 주제에 여전히 천착한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사람답게 살자는, 사람으로 살자는, 소박하지만, 가장 어려운 주제를 놓지 않는다.

다음은 어떤 내용의 책일까. 분명한 건 사람 냄새 물씬나는 책일 것이라는 것. 이번에는 소설ㅡㄹ 기대해보아도 될까.



기억하고 싶어 밑줄을 그은 문장들을 다시 되새김해 본다.


나의 유효기간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일까.

기저귀를 차는 순간부터 수의를 입는 순간까지일까. 언제까지일지는 나도 모르지만 언제부터인지는 알 것 같다. 누군가의 품에서 벗어나 나로 설 때부터. 나로 살 때부터 38쪽


뻔하지 않은 답은 어떻게 구할까. 상상을 하는 거다. 상상하는 방법은 다시 질문이다. 뾰족한 질문으로 머리를 콕콕 자극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며 꽤 싱싱한 답을 건질 수가 있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서 질문 다섯 개만 끄집어 내면 글 하나를 뚝딱 써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43쪽


오늘 내가 누리는 모든 편리와 권리는 나 아닌 누군가의 도전과 희생이 내게 선물한 것 50쪽


당연한 모든 것은 당연하지 않다. 하늘 아래 당연한 게 있다면 그건,

당연한 모든 것은 당연하지 않다는 문장뿐이다. 59쪽


나는 ''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순도 높은 일체감 같은 걸 느낀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그깟말 하나가 묘한 위로가 된다는. 61쪽


포기하고 싶다는 건 거의 다 왔다는 신호다 77쪽


설마가 멸망하는 날 인류도 함께 멸망한다 127쪽


전설을 만드는 건 외로움이었다고 168쪽


새에게 잡혀먹히지 않는 벌레는 공부벌레뿐이다 178쪽


거울 속의 내가 거울 밖의 나에게 묻는다. "오늘 하루도 주인으로 살았니?"

"질문 고마워. 내일 또 물어 줘" 188쪽


남자는 들먹들먹 어깨로 운다슬퍼서 울거나 아파서 울 땐 어깨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억울해서 울 땐 누구나 어깨로 운다. 남자에겐 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이 말을 재주는 한 사람 "누가 뭐래도 나는 너를 믿어" 나에겐 한 사람이 없더라도 내가 누군가의 한 사람이 되어 둘 수는 있지 않을까. 누가 뭐래도 나는 너를 믿어. 이 한 마디가 나의 입에서 나와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게 하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눈으로 울어도 좋고 입으로 울어도 좋고 코로 울어도 좋은데, 어두운 골목에 홀로 서서 어깨로 우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다. 213쪽


세상에서 자장 따뜻한 말은 무엇입니까? 집에 가자.

그다음 따뜻한 말은 무엇입니까? 우리 집에 가자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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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고백 - 김영민 단문집
김영민 지음 / 김영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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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주 가끔 책을 읽는 이들의 특징이 있다. 책 한 권을 읽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 책 참 좋더라"라고. 이런 이들을 압도할 수 있는 말이 하나 있다. 바로 "아, 나는 그 작가 책 다 읽어봤어"이다. 통독 (通讀)이란 그 작가의 모든 말을 생각을 모두 듣고 먹고 씹어 보았다는 것이다. 독서법 중 가장 하기 쉽고,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김영민 교수는 나에게 몇 안 되는 통독의 대상이다. 가볍지만 무겁고 진지하며, 오솔길을 걷는 듯 하지만 절벽으로 향하는 길로 안내하는 진한 패러독스가 가득하며, 경쾌한 리듬에 그 어떤 '몸치'라도 춤을 추게 만드는, 보기 드문 기인 중 하나 이다. 학력 또한 기이하다. 학부에서는 철학을 전공했고, 정치 사상사로 (그것도 하버드에서) 박사를 받았고, 신춘문예 영화 평론 부문 당선자이기도 하다.



정치사상 (정치 외교학과) 교수임에도, 그는 아이돌의 인기를 누린다. <추석이란 무엇인가> 칼럼으로 아이돌 반열에 올랐다. 이 질문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비수와 같은 질문의 전형 (典型)이 되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공부란 무엇인가>,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의 하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등을 읽었다. 그의 책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제목 또한 백미요 압권이었다. <가벼운 고백>의 출간 소식을 듣고는 -내용도 살펴보지 않고- 구매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는 글을 쓴다기보다는 '드립'을 치고 있었던 게다. 그렇기에 진한 허무처럼 잔영과 잔향은 오래 남으며, 긴 시간 동안 곱씹게 만들었던 것이다.


'드립'이란 단어를 잘 알지 못했고,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그저 언어유희, 말로 장난을 치거나, 아재 개그 정도의 허무성을 지닌 말로 생각하고 있었다. 김영민 교수의 신간 <가벼운 고백>의 발문을 읽으며, 파란 창에 '드립'을 타이핑하면서 알게 되었다. "애드리브 (Ad lib)의 줄임말에서 유래한 한국 인터넷 은어로 주로 부정적인 또는 긍정적인 의미의 즉흥적 발언, 마법의 말을 일컫는다. 부정적 뉘앙스로 다양하게 쓸 수 있는 경우가 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영민 교수는 드립을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닌, '성찰적 단문'이라고 했다. “정신의 빈 곳을 가격하는 짧은 문장"이라고 했다. 견문하고 반문하고 의문하고 탐문하고 자문하게 이끄는 문장이라고 했다. 아집의 울타리를 벗어나 독자 스스로 질문하게끔 하는 견문을 나누며 그 세계를 확장시킨다고 했다. 비틀고 반문하며 거꾸로 서서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의 모든 책들은 바로 이 '드립'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의 드립은 도끼처럼 머리를 가격한다. 아프다는 고통보다는 허를 찔렸다는 허무감, 그래서 더 고통스럽다는 표현이 맞다.


세상을 엄근진 (엄숙, 근업, 진지)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낯선 눈으로 독자의 무지를 일깨우며 껄껄껄 웃고 비웃고 있는 듯하다. 깊은 유머로 엄근진을 압도하고 격파한다. 김영민 다운 글들이다. 글과 영화로 춤을 추게 만든다. 어디선가 만화를 보며 낄낄대는 웃음소리도 들린다. 어떤 때는 세상을 비웃으며 세상을 꽤뚤어 본다.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고찰과 아울러, 그 시대와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때로는 "너희들도 별 수 없지?" "그러니까 너무 심각하게 살지 마" "삶이라는 것이 다 그런 거야"라고 말하며 어르고 달랜다. 그 역시 독자들을 무척이나 좌절시키는 나쁜 작가이다. 글로 방귀 좀 뀐다는 이들과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다리이로 찬물을 껴붇는 아주 질이 좋지 않은 작가이다.



그의 드립 모음집 <가벼운 고백>에서 정철 카피라이터가 연상되었다. 낯설고 불편하게,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고, 생각의 비틀기 등을 통해 글을 쓰는 정철을, 넌지시 속삭이며 따뜻한 눈으로 안아 주는 정철을. 두 작가 모두 일상적이면서도 쉽게 읽히는 문장을 통해 깊은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을 지녔다. 겉으로는 가볍고 간결해 보이지만,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글은 닮아 있다. 또한 <가벼운 고백>의 드립들은 곧바로 광고 헤드라인이나 보디의 글로 쓰여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글은 짧다. 기실 장문보다는 단문을 쓰기가 더 힘들다. 절제가 만용보다 힘들듯이. 완벽이란 무엇을 더할 것이 없거나 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더하거나 빼면 무너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단문들은 완벽에 가깝다. 게다가 비시시 그리고 피식 옅은 미소를 짓게 한다. 그들의 글은 <잠언집>을 방물케 한다. 급소를 푹 찔리는 듯한 고통과 아울러 깊고 아득한 카타르시스도 선사한다.



상이점은 정철은 경제학을, 김영민은 철학과 정치학을 전공했다는 것이며, 정철은 두 손을 모으고 말하지만, 김영민은 허리에 손을 얹고 어깨에 힘을 주고 말한다는 것이다. 김영민은 진정 얄밉다. 그러나 얄밉지 않은 김영민, 그는 안개 자욱한 절벽에서 만화를 보며 낄낄 웃고 있는 선사 (禪師)와 같다.



책 중에 오랫동안 뇌리에 맴도는 문구가 하나 있다. "기생충을 향한 최대의 복수는 기생충에 기생하는 것이다" 이 말은 복수 중에 2 번째로 악독한 방법이다. 언젠가 어디선가 읽었던 "최고의 복수는 원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원수가 부끄러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는 것이다"를 제외하고. 상대의 생존 방식 자체를 역이용하는 날카롭고도 심오한 통찰이며, 패러독스이다. 궁금해졌다. 영화 기생충에서 진정한 기생충은 누구였일까.


언제나처럼 책을 읽고 뒷면에 한 줄의 글을 남겼다. "김영민은 영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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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상한 몸 - 장애여성의 노동, 관계, 고통, 쾌락에 대하여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36
장애여성공감 지음 / 오월의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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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읽다 보면 느끼게 된다. 독서란 연결이요 리듬이라는 것을. 무심코 선택한 책들이 어느새 인가 거미줄처럼 연결되고, 사유를 위한 굳건한 주춧돌이 되어 간다는 것을. '무언가'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그 '무언가'에 의해 이끌려간다는 것을.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던 곳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을. 그것이 보물섬일 수도 있고, 시골의 간이역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근래에 읽은 책들의 키워드는 -절대 나의 의도는 아니었다-'정상'과 '비정상'이었다. 정상이란 보통과 보편이라는 오래된 통념은 가차 없이 그리고 통렬하게 무너져 내렸다. 정상적, 일반적, 주류적이라는 것은 편향되고 왜곡된 인식이었다. 정상이라는 것은 차라리, 차별이요, 혐오요, 무시함과 나아가 모멸감이라는 사실에 망치가 아닌, 도끼에 찍혀 비틀거리게 했다. 꽁꽁 얼어붙은 '가난'이라는 2음절 단어에 대한 인식의 착각과 오류였다.



최현숙 구술 생애사의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와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부터, 강지나 작가의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그리고 홈리스 생애사 기록팀의 <힐튼 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그리고 장애여성공감의 <어쩌면 이상한 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서사였다.


비정상성으로 분류되는 노숙인, 생활 수급자 청년, 그리고 장애여성들의 생애사였다. 한낮 통계의 수치로 가감되는 존재가 아니라 이반인 (二般人)이 아닌 일반인 (一般人) 고유의 삶의 생애사였다. 땀과 몸으로 쓴, 아니 육 (肉)으로 그린 누드 자화상이었다. 글이란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었다. 손이 아닌 몸으로, 몸의 그리움을 그린 글이자 그림이었다.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 그리움을 육필 (肉筆)로 그리고 쓴, 육화 (肉畵)였다. '나도 여기 있어요"라는 그들의 육성과 몸짓을 연출 없이 가감 없이 기록한 '다큐멘터리' 또는 '르포르타주'였다.



<어쩌면 이상한 몸>은 '장애여성공감'이라는 장애여성 인권 운동 단체에서 펴낸 책이다. '국가 권력이 정해놓은 정상성에 도전하고 소수자를 억압하는 규범을 흔들고자 장애여성의 관점에서 질문을 던지는 단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8인의 장애여성의 짧지만 긴 서사이다. 장애여성이 직접 쓴 글과 또는 구술로 이루어진 책이다.



책 제목은 단순하게 '이상한 (Queer) 몸'이 아니다. 성소수자들은 자신을 이반적 (二般的 또는 離叛的)이라고 칭한다. 이는 일반적 (一般的)이라는 통념에 대항하여 사용한다. Queer란 단어가 광범위한 의미를 함유하는 것은 소수자들의 자조 또는 해학이거나, 정상인의 시각에서 본 비정상성을 말하는 것이리라. 책 제목에는 '어쩌면'이 덧붙여 있다. 여기에 주목해야 한다. 부분 긍정과 부분 부정의 '어쩌면'이라는 절묘한 형용사는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의 렌즈에 따라 이상할 수도, 그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어쩌면'일 것이다.



이 책은 '장애 여성'이 아닌 '장애여성'을 -띄어쓰기 문법을 거부하며-사용한다. 장애여성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이야기하고 장애+명사라는 구분 없이 하나로 연결된 언어로 이해될 수 있도록 붙여 썼다고 한다. 어쩜 우리 사회의 두 종류의 소수자가 하나로 뭉친 (어쩜 그래서 더욱더 비극적인) '장애여성'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장애와 젠더를 둘이 아닌 하나의 정체성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그들의 몸은 '어쩌면 이상한 몸'이 되었다. '장애가 없고 아프지 않은 상태'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사회에서는 '장애가 있고 아픈 몸'은 '비정상적인 몸'이 된다 (P41)



'영감 포르노 (Inspiration Porno)'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가난 또는 장애를 지닌 이들이 굴레를 벗어던지고 깨치고 나가 이긴 서사를 방송은 선호한다고 한다. 목적은 장애인이 아닌, 정상인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을 말한다. 그게 '영감 포르노'의 효용이요 쓰임새이다. 이 책은 그것을 착취라고 말하고 있다. "장애인의 몸과 고난, 노력이 비장애인에게 삶의 동기 부여로만 활용됨으로써 장애인의 이미지가 착취된다" (P68)"



가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가난 포르노 (Poverty Porno)'에는 공식이 있다. 아프리카의 기아에 죽어가는 아이를 위한 모금 광고에는 대부분 한 아이의 모습만이 클로즈업되어 비추어진다. 다수가 비추어질 경우 시각의 분산을 이끈다는 이론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가난 포르노'를 대하는, 보통의 정상성을 지닌 이의 대응 방법은 단 하나이다. 채널을 돌리는 것이다. 도저히 보지 못하겠다는 피동적 회피라기보다는, 그 순간을 모면하려는 능동적 회피의 심리이다. 위험을 감지한 타조가 모래에 머리를 파묻듯, 직시하지 않는 외면을 현실화한다. 직시, 직면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회피하는 것이다.



정반대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시스템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를 이리 떼라고 비난하거나 가난한 자의 개인적 문제로 객관화시키기도 한다. "가난한 아이들은, 혹은 흙수저 애들은 노력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가난한 아이들은 답할 것이다. "당신의 말이 맞다. 그런데 누구나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똑같이 안 하고 못할 것이다"라고. 둘 다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난을 개인적 문제로 객관화하는 것이 더 비겁한 짓이다.



애도하는 방법 또한 그러하다. 누구나 비극적 상황에 애통해 하며 슬퍼한다. 특히 죽음의 경우에는. 그러나 한편 그 애통의 마음 저편에는 나는, 그리고 나의 가족은 그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었다는 '안도'의 마음이 애통을 압도한다. 하얀 국화 한 송이를 (애도 주관 기관에서 마련한) 영전에 바치는 것으로, 그래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범인 (凡人)임에 자부심도 갖는다. 이것 또한 회피이다. 애도가 아닌 자기 위안이다.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에서 최현숙 작가가 말한 '가난'에 대한 질문은 이 책을 이해하기에 도움을 준다.


가난에 관한 질문들 가난한 이들에게 생애 이야기를 청하는 사람으로서, '가난'에 관한 내 궁극적 시선을 우선 밝힌다. 가난은 세상을 사는 온당한 존재 방식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여기서 언급하는 가난은 경제적 가난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가난과 성적 가난 등을 포함한다. 가난 자체가 상대적이듯, 온당함 역시 상대적이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일상 자체가 더 생태적이며 더 반자본적이다.


사회문화적으로 권력이 없는 사람은 해의 양과 질에서 덜 가해적이다.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은 억압할 권력과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따라서 가난은 잘 감당하기만 한다면 평화적이고 생태적인 존재 방식이다. (...)


다른 한편 '왜 가난한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난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라는 질문이다. 드물지만 '나 가난한 게 남한테 무슨 죄가 돼? 부끄러운 게 뭐 있어?' 하는 당당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빈곤 때문에 자신을 쓸모없고 실패한 사람으로 낙인찍는다. 고단한 노동과 싸구려 임금을 억울해하며 분노를 느끼는 사람은 드물고, 빈곤한 처지에 대해 자괴감을 넘어 죄책과 자기혐오까지 가지고 있다.


빈곤을 게으름이나 방종으로 분류하고 비정상과 사회악으로 규정하는 보수 기득권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정상 이데올로기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내면화되어 있곤 하다. (...)' 혹 세상의 희망이라면, 여전히 내내 잡초들이 희망이다.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 p108~111 최현숙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에서는 "빈곤이란 단순히 재화의 부족이 아니라 자유로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려는 역량의 박탈 (P146)"로 규정하며, 가난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으로 '도움을 주는 기관이 아닌, 성찰하는 힘'을 제시한다.



가난과 장애를 바라보는 자칭 '정상인'의 렌즈는 바뀌어야 한다.


'특별하다', '대단하다'는 말이 가장 듣기 싫다. 찬사하는 말 뒤에 숨은 사람들의 편견, 기구한 사연을 좇는 호기심 어린 시선에 마저려면, '평범하고 무난했다'는 달관이 필요하다. (P104)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보다는 '치료'라는 신기루를 쫓도록 하는 것도 폭력이다. (p111)


남성 중심, 비장애인 중심, 이성애 중심, 선주민 중심, 성인 중심 사회에서 소수자가 되는 개인이 

스스로 노력하고 극복하는 것보다 사회적 인식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P83)



이 책을 단 한 줄로 요약하면 바로 이것이다. '내가 걸을 때 함께 걷는 이들이 나의 속도를 배려해 주는 것' (P89). 그것이 지극히 비정상이지만, 정상이라고 우기는 이들이 새로 장착해야 할 사유와 인식의 렌즈이다. 그냥 자신과 같은 존재로 존재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야말로 정상이 아닌 비정상이다. 그야말로 진정한 장애인이다. 그것도 몸도 마음도 가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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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 빈곤과 청소년, 10년의 기록
강지나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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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깊은 생각을 하고 답해보자.


"무절제, 방종, 중독은 가난의 원인인가?" 또는 "무절제, 방종, 중독은 가난의 결과인가?" "가난은 개인의 문제인가? " 또는 "가난은 사회 시스템의 문제인가?"

어쩜 개인적 선호인 보수와 진보 이념에 따라, 가난과 빈곤의 원인과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자신의 신념이나 확신에 따라, 답과 결론은 극명히 달리할 것이다. 모든 가난의 원인을 능력주의 (Meritocracy)에 근거하여 개인의 게으름 자기 절제 등 개인적 문제로 돌릴 수도 있다. 또는 그렇게 만든 조건과 환경의 문제 인로도 볼 수 있다. 과연 가난과 빈곤의 원인과 결과는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이 책은 8명의 청 () 년을 심층 인터뷰하여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라는 거대한 담론을 제기한다. 저자는 가난한 청년들을 알기 위해 등불의 스위치를 올리고, 깊은 사색을 시도한다.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사회적 현상에 집중한다. 가난한 부모 또는 조부모로부터 가정에서의 돌봄과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아이들의 자기 정체성 결여, 대인 관계의 기피, 자신감 결여, 실패의 두려움, '사회적 그리고 관계적 자본' 없이 사회에 덩그러니 던져진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눈에 띄는 작가의 결기도 느껴졌다. 가난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범하기 쉬운 것이 하나 있다. 저자가 이야기했듯이 '빈곤층의 삶을 팔아 이용하는 것이다. 비록 본인의 의도는 아니었더라도, 결국은 본인은 적극적인 관찰자 (또는 방관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을 조금 더 생각했다는 이유로, 스스로 영웅이나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분장하기 쉽다. 그들의 삶을 팔고 이용하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서사가 되지 못하고, 본인의 영웅적 서사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정작 그들을 돕는 일에는 손을 떼면서, 남보다는 선한 사람이라는 상대적 우월감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우리는 그들을 잘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편견으로 그들을 지켜봐 왔다. 가난한 청년들이 고민하고 어려워하고 진정 바라는 것들은 그리 커다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독자의 폐부를 찌른다. 그것도 아주 아프게 말이다.

'누가 내 얘기를 들어주었으면 (P16)'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잡아주고, 힘든 삶에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절박 (P16), '교육과 돌봄의 공백' (P22) ' '스스로 견디는 삶' (P27), '관계 맺기의 어려움 (P29),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P29)' ' 관계망 (P37), 가족의 무관심과 방임 (P105), 자아 정체감 : '한 개인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자아실현을 위한 일이 무언가에 대한 인식 혹은 사고, 출발점부터 불평등한 구조 (P158), 돌봄의 공백 (P166), 자아존중감 결여 (P230), 경제적 독립을 넘어서 심리적 독립 (P239).

빈곤의 대물림 문제는 경제나 사회 문제가 아닌, 집단구조 내에 뿌리내린 하위문화임을 서술하고 있다.

'하위문화의 특징은 운명주의, 무력감, 의존심, 열등감'이다. (P35),

문제행동이 하나의 습속으로 전수되는 양상이 현실적으로 관찰된다. (P36)

빈곤 대물림은 박탈의 경험이 대를 이어 축적되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로 고착되는 과정이다 (P38), 경제력이나 가족, 배경, 학력 등 사회적 자본 없이 (P46),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힘든 것 같아요 (P65),

생존 자체에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합리적 판단을 하고 미래 지향적 사고를 할 에너지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P99),

자아존중감 찾기는 누구에게나 껍질을 깨고 나오는 아픔을 동반하는 과정이다 (P121),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가난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으로 - 환경과 도움을 주는 기관이 아닌-'성찰하는 힘'을 제시하고 있다. "성찰하는 힘은 인간이 사회적,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 자신을 돌보고 스스로 자기 욕망과 사회적 위치를 사고하고 판단하는 내면의 성숙도, 즉 성찰하는 힘에 대해서는 참 소홀하다고 생각한다. (P97)

가난과 빈곤의 원인 결과의 끝없는 논쟁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책의 제공의 실마리로, 스스로 생각하고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생각과 사고의 근육을 키워주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빈곤은 단순히 재화의 부족이 아니라 자유로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려는 역량의 박탈이다. (P146)”라는 아마티아 센의 말은 울림이 크다. 박탈된 역량을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성찰의 힘인 것이다. 그것이 진정 빈곤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초가 되는 것이다.

호주나 미국의 원주민 (원주민이라는 말은 잘못 표현된 것이다. 맞는 표현은 원주인이다) 정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제한된 구역에 원주민을 몰아넣고 거주하게 하고, 먹고사는 것을 모두 해결해 준 결과, 다수가 마약과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된다. 스스로 자립하고 독립하는 자주/자조 정신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어쩜 식민지 경영자 또는 점령자들은 의도적으로 원주인들의 성찰의 힘을 박탈시키려 했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이 강조하는 시사점은, 경제적 지원으로 빈곤 해결을 갈음하고자 하는 행정 및 정책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정체감, 진로 탐색, 성찰하는 힘이 뒷받침되어야 -내면적 힘이 강해져야-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통을 통해 단단해진, 상처가 아물어 딱딱한 딱지가 내려앉듯,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또 다른 차원의 과제이다. 그것의 출발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밥이 아니라 책일 수도 있다. 밥 없이는 살 수 없지만, 밥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격언이 다시 다가온다.


누구나 자신의 삶은 고유하고 특별하다. 반면 세상에 태어나 맞닥뜨린 환경과 상황은 모두 상이하다. 누군가에 주어진 하루의 시간은 동일하며, 그 시간을 어떻게 밀도 있게 보내느냐는 각자 인간의 몫이기도 하다.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은 구축되어야 하고 지원해야 한다. 삶의 시간을 얼마나 농밀하게 보내느냐는 환경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각자 개인이 헤쳐나가야 할 책무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무척이나 불운한 이들에게 어떻게 성찰의 힘을 배양할 수 있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결핍은 불운이지만,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야 한다.

어느 젊은 노숙인 청년의 사례가 생각난다. 부모에게 버림을 받아 알코올 중독에 노숙인의 신분이 되었으나, 인문학 강의를 수강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 사이버 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에게 삶의 지향점인 목표를 설정하게 해준 것은 바로 인문학의 힘이었다. 그것이 저자가 이야기한 '성찰의 힘'을 기르게 해준 것이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설 수 있는 두 다리에 힘과 근육을 키우게 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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