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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홍수 콘서트 창조과학 파노라마 3
이재만 지음 / 두란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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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부로 지질학을 공부했고, 제대로 시작도 못했지만, 석사과정을 공부할 요량으로 고생물학 연구소에서 3년간 공부를 하였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설명할 수 없게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런 연유로 신앙 생활 초기부터 몇몇 사람들로부터 성경 대 지질학 혹은 진화론에 대한 논쟁의 중심에 본의 아니게 휘말리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성경의 정확무오함을 믿는다면 46억년이란 지구의 나이를 제시하는 지질학이나 진화의 과정을 걸쳐 지금의 생태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진화론은 틀릴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몇몇 분들은 창조과학을 하시는 분들이 제시하는 나름 과학적인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지질학이나 진화론은 잘못된 학문이며, 홍수 격변론이 더욱 그들이 제시하는 증거들을 잘 설명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내가 연구하고 있는 지질학은 무신론에 기인한 잘못된 패러다임으로 인해 계속 진리와 괴리되는 주장을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학부를 마치고 3년간 고생물을 연구하면서 얻은 짧은 지식만으로도 그들의 과학적인 증거들이 편향된 시각에 의도에 의해 취사선택이 되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 성령님의 주관하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족한 나의 믿음 때문이었는지 그분들의 영향으로 나는 이원론적인 사고 방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평생의 업으로 삼으려했던 지질학으로 인해 세상의 잘못된 패러다임에 빠져 성경의 정확무오함을 믿기 힘든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런 와중에 뉴턴의 진리의 바닷가의 돌과 조개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참된 학자의 자세는 학문적인 겸손함으로 세상을 편견없이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도교수님의 말씀을 되뇌여보았지만, 나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꺼져가게 되었다. 마침 IMF라는 키워드로 대표되는 경제 상황으로 많은 학생들이 좁은 취업의 과정에서 자신의 전공을 바꾸는 틈에 나도 고생물학을 더 이상 업으로 삼지 않게 되었다.

그로인해 신앙과 과학의 그 지난한 논쟁이 나의 삶에서 비껴가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라 내가 의도적으로 안락한 신앙 생활을 위해 몰이성과 반지성의 상태로 몰아넣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의 지성과 이성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받은 것인데, 그 이성과 지성에서 오는 도전들도 우리가 주님 안에 온전케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그 지성과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우리 개개인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하는 나태함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나태함들이 극단적인 근본주의와 독단적인 교조주의가 교회와 세상을 분리시키는 모습을 방관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현대 교회가 쇠퇴하는 이유는 특별히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진화론의 패러다임에 물들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 교회 안에 팽배한 신학적인 오만함, 학문적인 몰이해, 문화, 사회적인 괴리감, 그리고 위선적인 신앙생활들이 우리를 침몰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이런 창조과학과 궤를 맞대고 있는 기독교 근본주의는 그것을 옹호하는 성도들과 그렇지 않은 성도들 사이의 대화의 단절을 꿰하고, 심한 경우 서로를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상황으로 내몰아간다. 상대적인 비기득권자인 젊은이들이나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남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그러던 차에 교회에서 창조과학 세미나 행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회의 덕이 되기 위해, 그냥 조용히 세미나에 참석하지 않고 외면하려던 마음이 습관처럼 올라왔다. 기도 중 과연 그것이 교회의 덕인가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복잡한 마음을 억누르고 참여한 세미나의 내용은 역시나 20년 전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리한 논리전개, 오류 투성이의 실험, 왜곡된 문헌 인용 및 해석, 학문적 교만을 바탕으로 거의 기만에 가까운 세미나였다. 그나마 자유로운 질의 응답마저 불가능하여 참다 참다 세미나 중간에 질문을 던졌다. 아마 교회에 두고두고 회자될 듯하다.

그러나 더욱 마음 아픈 것은, 이 창조과학이라는 것이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이야기하던 목회자들마저도 10년이 넘게 함께 생활한 성도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책의 내용은 ... 예전에 정말로 서평쓰려다가 책낼뻔한 경험이 있다. 책의 내용은 이것으로 마무리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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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사유의 시선 - 우리가 꿈꾸는 시대를 위한 철학의 힘
최진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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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에는 이 책에 대한 기대가 상당히 컸었다. 토론 모임에서 함께 읽고 토론할 책으로 선정이 된 이후에 인터넷에서 책에 대한 후기와 저자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책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해주었으며, 저자 역시 세상을 변화시킬 새로운 학교의 설립을 위해 20년간 재직했던 유명대학 교수직을 박차고 나온 이력으로 인해 많은 존경을 받는 분이셨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읽는 도중에 그리고 읽고 나서도 실망이 컸던 책이다. 물론 이 책의 주요 메시지인 사유 행위로서의 철학라던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를 위한 필요한 자세들이 규정된 철학적 시선의 정의에 대해서는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의 전반적인 서술 과정 대부분은 논거의 부족과 논리적 비약을 드러내고 있어서 동의하기 힘들었다. 또한, 그 논거의 부족과 편협한 해석들도 대부분 낡은 식민사관이나 문화사대주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어, 저자가 이야기하는 철학적인 사유의 시선이 과연 좀더 나은 사고를 하는데 있어 어떤 효용성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먼저 책의 전체적인 구성을 살펴보자. 책은 일반적으로 장이 아닌 강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아마도 이 책의 기본 골격은 강의안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체 5강으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1강에서 4강 까지가 실질적인 책의 내용이고, 마지막 강은 질의에 대한 저자의 답변들이 담겨있다. 1강 부정에서는 앞서 언급한 철학은 살아있는 사유이고 행동이라는 주장으로 시작해서, 중국 근대사를 예로 들어 문화, 사상, 철학의 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2강 선도에서는 철학적인 시선을 갖추어 선도와 창의력을 발휘해야 선진국으로 도약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3강 독립에서는 베이컨이 이야기하는 우상들에서 벗어나 니체가 이야기하는 독립적 주체로 관찰과 몰입을 통해 세상의 현상들의 맥락을 파악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4강 진인에서는 다시 한번 극장의 우상에서 벗어나 덕을 통해 자신을 이겨내어 지성을 완성시켜나가자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그나마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고 있는 철학을 공부의 대상으로 삼지말고 철학이라는 행위를 해야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지금 이 시대에 철학을 단순히 철학 이론들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보다 합리적인 철학적인 사고를 위해, 보편타당한 철학지식의 체계를 세우기 위해 철학 이론들을 공부하는 것이지 않을까? 적절한 지식 기반 없이 사고의 과정에 뛰어들게 되면 철학을 했다는 나름대로의 정신승리는 이룰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사고 결과의 수준은 자못 뻔하다고 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철학 이론 습득의 과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현실일 수 있다. 나 역시도 그 범주를 벗어나고 있지 못한다. 하지만, 저자가 표현하듯이 그것이 훈고적, 후진적 이며 낮은 시선이라 극단적인 평기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좀더 합리적인 철학이라는 행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한편 철학이라는 행위를 해야한다는 주장 자체가 참신한 것은 아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신기관에서 철학적 사고에 방해가 되는 우상들을 벗어나기 위해 과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과학적인 방법론을 면밀히 따져보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행위로서의 철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저자가 정의하는 철학적 사유의 시선들을 구성하는 요소들도 시라토리의 “니체의 말"이라는 책을 보면 대부분 니체가 이미 언급했던 내용들이다. 저자가 책에서 베이컨이나 니체를 언급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할지 난감하다. 저자가 수십년간 유명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셨다고 하던데, 베이컨이나 니체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믿기가 힘들다.


일단, 이 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저자의 주장들에 논거의 결핍, 논리적 비약, 그리고 관념적인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 있다. 읽다가 보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주장들이 너무 많아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토론 모임을 해야한다는 의무감이 없었다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1강과 2강에서 언급되는 중국, 일본, 한국의 근현대사 분석 부분이 가장 답답했다. 중국과 일본은 높은 수준의 철학적 시선을 가져 선진국의 길을 갈 수 있었고, 한국은 낮은 수준의 철학적 시선으로 인해 식민지를 거쳐 아직 선진국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그렇다쳐도, 중국은 언제부터 선진국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중국은 철학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당시 최신식 철학인 마르크스 주의를 채택해서 결국은 선진국이 되어간다고 이야기한다. 철학에 대한 갈망으로 중국이 마르크스 주의를 채택했었겠는가?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자. 그럼 비슷하게 마르크스 주의를 수입한 북한과 베트남은 왜 아직도 선진국이 되지 못했는가? 한편, 중국이 수준높은 철학적 시선을 가졌다고 저자가 평가하는 것도 어느 한 도사(도교의 성직자)와의 대화로부터 기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의 수준높은 철학적 시선을 입증하는 다른 논거들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저자는 우리나라의 현재 상태가 수준 높은 철학적 시선을 가져보지 못하고 남의 것을 무작정 베끼기만 하는 선진국의 문턱에서 방황하는 중진국이라고 이야기한다. 앞서 이야기한 근대사 부분에서 조선 시대를 낮은 수준의 철학으로 규정짓고,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사도 역시 수준이 낮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저자에게 묻고 싶은 것은 수준의 높낮이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성공해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면 수준 높은 철학적 시선인 것이고, 선진국이 되지 못하면 수준이 낮은 것인지 묻고 싶다. 개인적인 근현대사에 대한 생각은 이렇다. 19세기까지 조선은 나름대로의 철학적인 시선으로 국가를 유지했으나 서구 열강의 야만적인 제국주의 침탈로 인해 신민지화가 되었다. 그 안에도 실학운동이나 계급운동과 같은 높은 수준의 철학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세계 정세는 제국주의의 야만적인 현실이 보다 높은 수준의 철학적인 움직임을 삼키어, 조선은 식민지 종속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나름 발전을 위해 다양한 철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고, 그 결과로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국가주의, 전체주의 등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이 사회 내부에서 채택되거나 논의되어 왔었다. 유래 없을만큼 다양한 사상들의 충돌 자체만으로도 이미 수준 높은 철학적인 활동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이나 분배 위주의 경제정책과 같이 시각을 달리하면서 국가 발전의 동력을 유지하고 발견하려고 노력 중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경제적, 과학적, 군사적으로 발전을 하고 있으며, 더불어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도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직은 전반적으로 선진국이라 자부하기에는 이르지만, 특정 분야에서는 이미 선진국의 반열에 이르고 있다고 본다. 솔직히 발전의 원동력은 수준높은 지식 기반을 바탕으로 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한 경제력과 군사력의 성장이지 않을까 싶다. 중국도 마찬가지이고, 일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를 주도한 유렵도 그랬을 것이고, 미국도 동일한 이유로 패권을 차지했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그토록 주장하는 선진국이 되기 위해 발휘해야하는 창의성의 문제에도 이견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총균쇠에서 창의성의 발현은 창의적인 사람들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제반 환경과 그 창의성의 결과물들을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사회구조에 있다고 했다. 나는 이런 견해에 동의한다. 저자가 이야기하듯이 창의성의 근간이 되는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치자. 그 사람들이 마음껏 질문을 할 수 있는 학교, 직장이나 단체가 없다면 질문이 창의성으로 연결이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저자의 주장대로 높은 수준의 철학적인 시선으로 창의성이 발현되었다고 하더라도 특정 기업이나 단체들이 사회 시스템을 독점하고 있다면 그 창의의 결과들을 제대로 수용이 되지 않을 것이다. 창의성을 요구하지 않는 사회 시스템 안에서 창의적인 인재들을 아무리 많이 양성해봐야 결국에는 그 창의의 결과물들은 사장되고, 그 인재들의 중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창의성을 요구하는 사회, 질좋은 창의의 결과물들이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사회구조가 이루어지면 굳이 창의성을 가진 인재들을 양성하지 않더라도 사회구성원들은 창의성을 획득하기 위해 발버둥을 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지식의 습득과 현실 문제 인식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이야기하는 철학적인 시선의 방법론들은 관념적인 단어들로 구성된 설명이 너무 많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고의 전개 과정에서 보편타당성을 검증하는 부분들이 결여되어있어 저자의 방법론을 택한 사람들은 쉽게 베이컨이 이야기한 우상들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커보인다. 너무 심한 확대 해석 혹은 비약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책의 부족한 논거, 편협한 해석, 심각한 단순화들이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관찰, 측정, 실험, 일반화, 시험 및 가설의 변경”으로 구성된 과학적 방법론이 우리의 인식, 가치체계, 자연현상 등을 탐구하는데 적합하다고 믿는다. 그 관점에서 보면 저자의 철학적인 시선은 “관찰, 측정, 실험”의 중요성을 매몰하고 “일반화, 시험 및 가설의 변경”의 중요성만 강조하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 세태가 “관찰, 측정, 실험”에만 몰두하며 “일반화, 시험 및 가설의 변경”에 익숙하지 않아 철학적인 시선이 중요할 수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한가지 명심해야할 것은 필요한 과정을 건너뛰고 섣부른 일반화는 현실과 동떨어지는 실효성이 떨어지는 시험과 가설들을 양산하여 불필요한 사회적인 에너지의 낭비를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본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고 싶지 않았지만, 뜻대로 되는 일은 없는 모양이다. 모임에서의 토론 과정이 심화되면서 이 책에 대한 분석이 심화되어 좀 감정적인 서평이 된 모양이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뚜렷한 관점을 가지고 책을 읽기를 권한다. 관념적인 단어들로 가득찬 저자의 서술과 주장들은 현실성을 가리워서 독자들을 쉽게 현혹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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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ginner's Guide to Traditional Archery (Paperback)
Brian J. Sorrells / Stackpole Books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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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권유로 한 일년 전부터 우리 딸은 양궁을 시작하였다. 어렸을 적 야구부에 가입하여 자못 심각하게 야구를 했었던 경험이 지금껏 내 인생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던 나는 솔직히 많은 고민없이 허락을 해주었다. 어린시절 무언가에 몰두하고 도전하는 추억을 남기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라는 생각은 얼마 안가 흥미를 잃고 포기하지 않을까하는 염려를 가리기에 충분하였다. 다만, 그 충분한 고민의 결핍으로 인해 양궁에 들어가는 만만찮은 비용 문제 역시 고려하지 않아, 지금 딸이 포기한다고 하면 적잖은 비용을 투자한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장담할 수 없다.  ​


다행하게도 딸 아이는 그 후로 양궁을 좋아하고, 즐기고 있어 아직까지는 고맙게도 아빠로 하여금 째째한 생각을 하지 않게끔 해주고 있다. 더욱이 소질이 있는건지, 운이 좋았던건지, 몇번 나가지 않은 시합들에서 입상도 하기 시작하면서 딸아이는 양궁에 점점 더 심취하게 되어갔다. 초기에 양궁 시합장에 갈 때는 아주 부담없이 마음으로 책을 하나 끼고 나가 독서에 심취하며 나름 여유로운 시간을 구가했었다. 그런데 딸 아이는 입상권에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동시에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책에 빠져있는 아빠에게 자신이 쏘는 화살 한발 한발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고 무언의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나만의 시간을 희생하기는 했지만, 딸 아이가 쏘는 한발 한발의 화살을 보면서 몇마디 조언을 해주기 시작하니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생 딸 아이와 나 사이에 있는 세대차이는 북한이 느낀다는 공포감을 실감나게 해주기에 충분하여 부녀 간의 대화가 점점 줄어가는데, 그 시간만이라도 함께 같은 문제로 고민해본다는 것 자체로도 기쁨이 되는 것 같다. ​ 

하지만, 부끄럽게도 일년 간의 무관심은 양궁에 대한 무지가 되었다. 같은 문제로 고민해볼 기회는 생겼지만, 정작 뭔가 같이 고민해서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줄 수 가 없는 것이다. 이것도 욕심일지 모르겠지만, 나도 뭔가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양궁을 시작하는 것도 한 방편일 것 같은데, 중년의 한 중간에 서있음은 무언가를 한번 시작하면 지독하게 빠져들 것 같다는 일종의 두려움이 있어서 포기하였다. 대신에 책 읽는 것에는 취미가 있으니 양궁에 관련된 책을 읽어, 그 지식으로 딸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을 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책을 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 아마존의 Unlimited Kindle 버전으로 공짜로 읽을 수 있는 이 책을 선택하였다. ​ 

책의 초반에는 아주 기본적인 연습에 대한 철학과 활과 활쏘기에 필요한 장비들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데 활을 처음 잡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기초 지식들을 아주 쉽게 설명하고 있다. 딸 아이의 활과 화살에 있는 수많은 장비들이 왜 있어야하는지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고, 이해할 필요도 없었던 코치 선생님의 조언들이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책의 중반에는 화살을 튜닝하고, 활 쏘는 자세를 잡아가는 기초적인 연습 방법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너무나도 기초적인 연습방법이어서 양궁 시합을 준비하는데 딸 아이에게 권했더니 반응이 시큰둥하다. 더군다나 활을 쏘는 또 하나의 현격한 목적인 사냥과 관련한 연습방법들이 많아서 읽기를 그만둘까 생각하였다. "끝까지 읽지 않을 책은 시작도 하지 않는다"라는 특출한 독서 철학을 가지신 우리 회사의 회장님이시기도 하셨던 빌 게이츠 덕분에 나도 예외를 만들지 않고 끝까지 읽기로 하였다. 종반부로 가면 갈 수록 더욱더 사냥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아지면서, 사냥터에서 갑작스럽게 취해야만 하는 다양한 자세들을 연습하는 방법, 수제품 활을 사는 방법들로 채워지게 된다. ​ 

시합 양궁에 대한 책이 아니라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양궁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는 얻을 수 있어서 나름 좋았던 것 같다. 회장님 덕분에 얻게된 사냥과 관련된 지식은 어떻게 써먹어야 하나? 로빈슨 크루소처럼 어디 무인도에 홀로 표류하게 된다면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안써먹기를 기도해야겠다. 그래도 이 책 덕분에 양궁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었으니, 딸 아이와 이야기할 때 무신경했다는 미안함이 덜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빠가 같은 문제로 함께 고민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이해해주기를 현재 중학생인 딸에게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언젠가 나이가 더 들면 이해해줄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해보면서, 나름대로 나는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을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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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 Expectations (Mass Market Paperback)
Dickens, Charles / Bantam Classic & Loveswept / 198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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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라는 그의 명제는 사회 안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조명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고도로 계층화된 인류사회는 각 계층의 인간들에게 성공적인 삶이란 더 높은 계층으로의 도약이라고 제시해 왔다. 냉정하게 말해서 착취와 피착취의 악순환 고리가 존재하는 계층구조에서 조금이라도 더 착취를 할 수 있는 상위계층의 삶은 착취에 시달리는 하위계층의 삶보다 전반적으로 더욱 많은 것을 누리는 안락한 삶일 것임에 자명하다. 하지만, 점점 더 높이를 더해갈수록 상위계층이 협소해지는 피라미드 계층 구조 속에서 모든 인간들은 보편적으로 삶의 성공을 누리기 힘들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현대 사회에서 들어서 그런 성공의 관점의 모순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성공의 관점이 변해간다는 사실이다. 사회에서의 계층이나 신분 상승 대신에 제시되는 인간의 성공적인 삶의 기준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 태생적으로 모순적인 사회구조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 가족이나 친구들과 같은 주변의 사람들과 사랑 충만한 관계를 맺으면서 삶의 만족을 찾아가는 것도 하나의 기준이 되어가는듯 하다. 그러나 피착취와 착취의 구조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그 굴레를 벗어나는 자유함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또한, 그 사회적인 잣대나 관계성들을 거부하며, 개인적인 나름의 행복의 기준을 만들어 그것을 누리는 것이 삶의 성공이라고 하는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움직임은 도덕이나 윤리와 같은 기존의 권위에 도전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아 그 성공의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다. 간혹 개인적인 행복의 기준에 대한 극단적인 추구의 움직임은 반사회적인 범죄로까지 발전하여 소시오패스라는 이제는 낯설지 않은 단어가 자주 인용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그의 명저 총, 균, 쇠에서 지적했듯이 현대 인간 정체성에 정의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근간에는 인류사를 통시성의 결여되었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보다 포괄적인 통시성으로 인류사를 고찰해보면서 인간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면 좀 더 대중적인 인간의 성공 모델이 제시될 수 있을까? 태생적으로 모순된 사회 구조를 옹호하는데 종종 사용되었던 종교는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들에게 모순된 사회의 구조로부터 해방시켜주는 통로를 제시하기도 하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상이한 종교들은 또 다른 사회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최근 전 우주와 지구, 그 안의 생태계의 역사 그리고 인류의 전체 역사를 통시적으로 살펴보면서 인간의 정체성을 좀 더 심층적, 합리적 그리고 과학적으로 바라보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를 통해 최소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낙인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수 있을 것 같이 보이지만, 그 견고한 명제의 냉혹한 사실성과 처절한 실제성은 난공불락의 성과 같아 여전히 우리는 사회 계층 구조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의 삶의 목적을 정하고, 우리의 행복의 조건까지 결정한다. ​  

그의 위대한 유산이기도 한 위대한 유산이라는 소설에서 디킨즈는 사회적인 상위 계층에 대한 동경과 그로 인해 나타나는 인간의 삶의 폐혜들을 예시하면서 인간 삶을 윤택하게하는 성공의 열쇠는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주인공 핍은 투박한 누이와 소박한 매형의 사랑 안에서 나름 자신의 삶에 행복을 느끼던 소년이었다. 상위 계층인 귀족 미스 해비쉠의 집에 방문하여 만난 에스텔라에 대해 짝사랑은 핍의 인식 체계를 흔들어 그동안 자족하였던 자신이 처한 계층의 한심한 현실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던 중 핍은 알 수 없는 후원자의 유산을 약속받고 신사 수업을 받게 된다. 계층의 상승을 이룰 기회를 잡은 핍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던,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던 매형의 방문을 통해, 자신의 과거에 대한 회상을 더불어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후원자가 미스 해비쉠이었다는 착각은 진짜 후원자가 나타나면서 핍에게 일차적인 충격을 던져주게 된다. 그 진짜 후원자인 메그위치는 핍이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던 상위 계층의 신사와는 거리가 먼 탈주범이었던 것이었다. 한때 범죄자인 메그위치에게 경멸하는 마음을 가졌던 핍은 마음을 바꿔 매그위치를 보호하려 하지만, 결국 매그위치는 경찰에 체포되고, 핍은 신분 상승은 커녕 빚더미에 앉아 범죄자가 될 처지에 빠진다. 곤경에 처한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자신이 수치스러워했던 바로 그 매형이었다. 그로인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핍은 그토록 사랑했던 에스텔라를 만나게 된다. 해비쉠의 양녀로 들어갔던 에스텔라는 주어진 상류층의 삶을 유지하기 극도로 매진했던 젊은 시절과 달리 온화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

소설 속에서 미스 해비쉠, 에스텔라, 포터와 같은 상위 계층의 사람들은 다양한 불행한 모델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 반해 매형인 조와 어린시절 친구이자 향후 형수가 되는 비디와 같은 하위 계층의 사람들은 행복의 모델이 되면서 핍을 깨우치게 해준다. 분명 핍이 꿈꿔왔던 사회적인 신분 상승은 바로 성공이라는 인식을 풍자하는 어조가 분명하게 느껴진다. 당시 시대의 성공에 대한 정의와 그에 대한 문제제기는 세월이 지난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부분이 있어 보인다. 그러니 고전의 반열에 들었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그러한 문제 제기 외에는 그 제기된 문제에 대한 해답이나 그런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을 찾을 수 없었다. 인간의 진정한 성공의 의미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난해한 문제에 대한 접근의 시도가 있었어야 했는데, 이 소설에서는 또한 그 해답을 찾기 위한 할애된 노력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작가는 나름 많은 시도들을 뿌려놓았는데, 나의 부족한 인식으로 인해 내가 그런 노력들을 소화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열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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