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강
우애령 지음 / 하늘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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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평점 4점

고백과 서사(narration), 동일시를 통한 치유



1. 상처의 고백

6. 25 전쟁 통이었다. 그 당시 내 아버지는 젖먹이 막내였고, 할머니는 육남매의 엄마였다. 피난길에 지치고 힘든 나머지 할머니는 할아버지께 사정했다고 한다. 막내를 버리고 가자고 말이다. 할아버지는 저 어린 것을 어떻게 버리고 가냐,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한다며 아버지를 끝까지 데리고 가셨다고 한다. 이 짧은 이야기가 아버지 생의 첫 번째 기억이다. 지난 8월, 나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 통에 아버지 홀로 버려질까봐 얼마나 두려우셨을까 새삼 가슴 아팠다. 소설 깊은 강을 읽은 뒤였다. 소설 속 엄마 연이가 만주 목단강가에서 첫 딸 영주를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하는지 고뇌하는 장면에서 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깊게 패여 굴곡진 상처로 남은 기억들을 나에게 간간히 말씀해주셨다. 아버지의 이야기, 연이가 영주에게 대성통곡하며 한 고백, 표림의 죽기 전 고백은 선천적으로 선한 사람들의 고해성사가 된다. 내 역사를 진정 들어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 자체로 위안이 된다.



2. 서사적 글쓰기 - 3대에 걸친 대물림

또한 소설 속 인물들은 고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사적 글쓰기를 재촉한다. 언젠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주길 바라는 연이와 표림, 대학에서 ‘자서전 쓰기’라는 과목을 요청 받고 가족 3대를 거슬러 올라가 자기까지 내려오는 과정을 알아보자는 영주는 글쓰기의 강력한 자기치유 효과를 알고 있었던 듯하다. 영주가 강조하는 ‘삼대’에는 대물림이 한 눈에 보인다. 상처와 정서까지 대를 이어 공유하게 된다. 마치 물이 흐를수록 물길을 만들어 강물이 깊어지듯. 대를 이을수록 데칼코마니 그림처럼 반복되며 약간의 변주가 있을 뿐이다. 강화 할아버지가 아들 표림이 태어나자 풍성한 잔치를 벌이고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장면과 몇십년 후 자신의 칠순 잔칫날, 흥에 겨운 표림이 마당 한가운데 깔아놓은 돗자리에 나와서 어깨춤을 추는 장면이 짝을 이룬다.

또한 남편 나간 긴긴 날에 절절한 외로움을 느낀 개성댁은 마음의 병을 얻고 막내딸 혜인의 돌 잔칫날에 저 세상으로 떠나게 된다. 혜인은 자라면서 새어머니가 두 번 바뀌는 과정에서 깊은 고독감을 느낀다. 그녀가 표현하듯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고생이었다. 이렇듯 엄마가 부재하더라도 엄마의 정서는 자식들에게 그대로 전가된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하는 딸이 엄마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내담자 뒤로 그 사람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 모습이 겹쳐지는 것처럼. 나를 알고 부모를 이해하는 것은 치유의 시작이자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3. 독자의 소설 속 인물들과 동일시

‘깊은 강’을 읽는 내내 나는 영주에게, 영주의 부모는 나의 부모로 동일시하고 있었다. 나의 부모도 책속 어딘가에 조연으로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분들이 힘껏 살아낸 시대 배경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과연 우리 아버지는 소설 속 영주처럼 할머니로부터 미안했다는 말은 들으셨을까? 우리 아버지의 가슴 맺힌 한은 조금이라도 녹았을까? 나와 소설 속 주인공의 집안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이렇게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우리 민족이 함께 겪은 공통된 경험들이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많은 삶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부모들은 과연 어떤 기쁨과 행복이 있었을까?

작가는 영인의 말을 빌려 말한다. “너희 아이들이 들을 뒤덮는 나뭇잎들처럼 자라나는 거지.” 바로 자신의 대를 잇는 자식이 있기에 그 험난한 시간을 견딜 수 있지 않았을까?

칠순 잔칫날 자식들의 잔을 받으며 흐뭇한 표정의 강화 할아버지, 육남매를 잘 키웠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연이, 둘째 딸 혜진의 위로를 받는 영주는 당신들이 살아갈 이유이자 의미의 대부분이 자식에게 있는 것 같았다. 책을 다 읽고 어렴풋이 나 또한 나의 부모에겐 고통을 이겨낼 수 있고 이 험난한 생을 살아내야 하는 목적이었구나 싶었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말하는 ‘깊은 강’은 생과 죽음의 상징이자, 우리가 출발했던 곳이며 돌아갈 곳이다. 자궁회귀본능처럼. 인용된 소설 ‘싯타르타’에서는 수많은 영상과 수천의 소리가 강물에 합류된다. 우리 삶의 희로애락을 바다가 강물을 받아들이듯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해탈한 것이 아닐까? 영인처럼 상처에서 벗어나 번뇌를 끊는다면, 대물림을 깨닫고 진정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는 작가 자신의 치유뿐만 아니라 독자도 소설 속 인물들과 동일시하며 치유하게끔 만든다. 더불어 독자의 이야기에 불씨를 지펴 놓는다. 태어난 이상 있는 힘껏 살아가는 생명체들, 인간이기에 끝까지 존엄을 잃지 않으려 했던 우리 아버지들, 어머니들. 우리 선조들이 서로 돕고 함께 살고자 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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