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인간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고뇌했던 키르케고르.
철학자치고 참 매력적인 사람이다.
한 뿌리였던 가톨릭 기둥에서 여러 종파들이 찢어지며 제각각의 목소리를 내던 혼돈의 시기 가운데 그가 있었다. 철학 종파들도 다양해져 각자의 생각 이념만 주장하고 자신의 이론과 맞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면 비아냥거리며 비평했다. 희대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작고 하고 그들의 최측근 제자들이 그 대를 이어오며 본래의 순수한 내용들을 바꾸기도 하고 핵심을 변형하기에 이른다.
그는 종종 무기명이나 가명으로 작품들을 출간하고 공들여 썼지만 끝내 출판하지 못한 수십 권의 작품들이 있었다. 무기명, 가명으로 출간을 했던걸 어찌 보면 비겁해 보인다 할 수 있으나 그의 작품의 세계는 그 누구보다 강열하고 핵을 찌르는 비평을 해왔다.
우유부단하단 소리를 종종 듣던 그가 내면에는 누구보다 뚜렷한 신앙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고 어쩌면 밖으로 보이던 갈팡질팡한 모습들이 자신의 끊임없는 내면의 성찰로 인한 마음의 변화가 고스란히 담긴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에서 담고 있는 그의 글들을 보면 그가 겪은 혼돈의 마음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작품 속에서 특정 인물(대부분이 레기네였지만)을 생각하며 빗대어 적거나 비평 또는 비웃기도 했던 그는 참 속이 좁고 즉흥적인 감정의 소유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분노, 질투, 연민, 슬픔들이 그의 작품속엔 있었다. 그의 생각과, 그의 마음을 반영한 그 글들은 적어도 그가 가지고 있는 신념과 그가 쓴 글들이 속을 숨기고 겉으로만 현인인척하는 그런 이면적인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것만 같았다. 오히려 인간이기에 느끼는 감정에 솔직하고 그의 그런 인간적인 모습이 매우 와닿는 철학자다.
키르케고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레기네
그토록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단 한 명의 여인을 그는 왜 그렇게 모질게 파혼을 선언했을까.
그가 세상의 온갖 비난을 다 받아 가며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가며 파혼을 강행한 것은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자 남편이 되기보다 여행을 다니며 유유자적하는 저술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는 하나 한편으로는 그가 당시 받았던 신학 교리, 하느님과 자기 자신의 영혼에 대한 관계 등에 대해 끊임없이 집착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에 크게 영향받은 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그 이야기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 원론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애지중지 키우던 이삭을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제물로 받치기 위해 산을 올라가 그를 묶고 칼을 집어 들어 죽이기 직전 천사가 나타나 이삭 대신 염소를 제물로 받치며 끝나는 해피엔딩이다.
이삭은 자기 자신을 제물로 기꺼이 바치고자 했던 아버지 아브라함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브라함은 애지중지 키우던 아들을 제물로 받치기 위해 칼을 꺼내 들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식없는 늙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이라는 아들을 점지해준 큰 축복을 신으로부터 받았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받쳐야 하는 상황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그렇게 모든것을 다 꺼내주고 포기 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하느님께 다가 갈수 있는 것일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예상과는 전혀 반대되는 엄청난 은총을 받았지만, 그에게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가장 혹독한 시련을 감당한 후에야 비로소 ㅡ 이 세상에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번 회복한 ㅡ 신앙의 기사가 되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레기네와의 약혼을 파기하면서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을 스스로 잃음으로써 하느님을 향한 자신의 신념과 저술가로서의 삶, 그의 작품에 더욱 몰두하겠다는 내면의 강한 의지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비록 독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그가 가졌던 신앙생활에 대한 신념, 조금이라도 하느님과 가까이하려 했던 노력, 끊임없는 성찰과 고뇌를 존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가졌던 삶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왜 실존하는지 실존의 이유에 대해 기독교적 성찰을 접목함으로써 당대 실존주의 철학에 과히 한 획을 그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