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글쓰기는 재능 있는 이들의 전유물로 여겼다. 책을 많이 읽었던 탓인가, 아무리 열심히 고심하고 퇴고해 봐도 그동안 책 속에서 빛난 문장들의 발꿈치도 따라가지 못하는 조악한 문장력에 홀로 고민하고 잘 안될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그건 천 리 길을 한걸음에 달음박질하려 했던 우둔함이었단 사실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눈이 머리에 달려있다고 손도 그렇지는 못하고, 둘의 사이엔 드넓은 갭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눈과 손 사이의 거리를 메우는 데는 폭넓은 독서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현재 자신의 위치에 대한 피드백인 것 같다. 마치 항해에 나선 배가 방향을 모르면 목적지에 닿지 못하듯 피드백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을 막아주고 위치를 알려주어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한다. 천 리 길을 걸어야 하는 입장에선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첫 문장을 무턱대고 써보는 무모함도 필요하다. 첫 술에 배부를 리 없다고 성에 차지 않을 테지만 위대한 작가도 습작이 있었듯 일단 시작해 꾸준히 쓰면 그래도 조금은 달라지는 게 느껴진다. 나온 결과물에 대한 스트레스는 우선 마음 한편에 접어두고 써야 글쓰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사라진다. 다문, 다독, 다상량이라지만 그 못지않은 게 다작임이 틀림없다. 이번에 서평 강좌를 들으면서 부족했던 글솜씨가 미력하게나마 늘게 된 건 무엇보다 쓰러질까 두려워 한 발짝도 못나가던 교착 상태에서 벗어낫기 때문이라 단언한다.

독서에 대한 짝사랑에서 벗어난 것도 큰 성과다. 그동안 언젠가 보리라 사놓고 펴보지도 못한 책이 수십 권은 되었을 텐데, 그건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준 독서량이 고급 독서에 필요한 독서근을 쇠퇴시켰음이 틀림없다. 쉬운 책부터 어려운 책으로 천천히 다시 트레이닝을 해야 하는데도 조급한 마음으로 지금 수준에 맞지 않는 책들만 사댔으니 책의 무덤만 덩그러니 쌓이는 게 당연하리라. 모임을 통해 다양한 수준의 책들을 접한 경험이 독서근 부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면서 목표가 생겼다. 장르문학을 평소부터 즐겨 읽으니 알라딘에서 이 분야의 마니아가 되겠다는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목표다. 달리기는 하면 할수록 더 달리고 싶어진다더니 책도 읽을수록 더 읽어야 할 책, 읽고 싶은 책이 늘고 이해의 깊이도 더해져 예전과는 다르게 더 폭넓은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느낌이다. 기왕 커진 독서근을 글쓰기 근육으로 전이시키기 위해 오늘도 빌린 책을 마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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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 박원순 세기의 재판이야기
박원순 지음 / 한겨레신문사 / 199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적 재판에 대한 개략적 진행과 배경, 당대 여론의 추이 등을 볼 수 있게 구성된 책이다. 꼭 법조인이 아니더라도 역사적 오심을 통해 사법제도의 한계를 알고 싶다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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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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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 유숙자 옮김 / 민음사 2002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옆 나라에 사는 우리에게도 이름이 알려진 대작가이다. ‘전통적인 일본의 아름다움 속에서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창조’한 것으로 유명하다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라고 하는 편이 이해가 빠를지 모르겠다. 13년에 걸쳐 한촌 에치고유자와에 머물며 작품을 써내려간 가와바타에게 설국雪國의 자연 경관과 계절 변화는 한없는 영감을 주었으리라. 휴양 덕택인지 《설국》의 문장은 도처에서 총총히 빛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는 첫 문장은 워낙 유명해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다.


“처마 끝 작은 고드름이 앙증맞게 빛나고 있었다.” p46
“개울을 따라 이윽고 너른 벌판으로 나오자, 신기하게 깎아지른 정상으로부터 완만하고 아름다운 사선이 멀리 산기슭까지 뻗어내린 능선 위에 달이 떠올랐다.” p76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문장 또한 봄바람처럼 기분 좋게 독자의 마음속에 스며든다.

탐미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는 평가를 받는 《설국》답게 주인공 시마무라는 예술가적 삶에 경도된 인물로, 속세의 일에는 고고한 선비처럼 무심하다. 그런 시마무라가 요양 차 지내는 산촌 여관에서 게이샤 고마코와 만나고, 이들 사이에 마을 처녀 요코가 낀 사랑의 삼각관계가 주요 스토리다.

발랄한 고마코과 정숙한 요코는 제각기 저만의 매력으로 반짝인다. 시마무라가 둘 다에게 빠졌다고 한들 크게 탓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시마무라의 감정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고마코와는 오래된 친구처럼 천천히 감정을 불사르는 데 비해 요코와의 관계는 강렬하며 순간적인 정열과 같이 그려진다.

고마코와의 첫 만남에서 그는 그녀가 깨끗하다고 적는다. 때묻지 않는 동기童妓의 순진무구함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을까. 그러나 그녀의 순진은 몇 번에 걸친 만남 속에서 흐려지고, ‘현실’의 평온과 안정만 남는다. 속세에 허무를 느끼는 시마무라에게 이는 오히려 싫증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반대로 요코는 첫 만남부터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에 ‘서늘하게 찌르는 듯한 처녀의 아름다움’이라 표현할 만큼 그에게 예술적 감상을 느끼게 한 듯하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안타까움 또한 애절한 감정을 더 끓어오르게 했으리라. 한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유키오와 함께 등장하는 첫 장면은 불안한 엔딩을 예고한다.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인 헛수고, 무상, 허무를 시마무라는 계속해서 언급한다. 가와바타는 예술은 현실 또는 실생활과 무관하기 때문에 비로소 온전히 예술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본 것으로 생각된다. 시마무라는 고마코가 옹색한 촌구석에 있으면서도 일기를 쓰고 소설을 읽으며 샤미센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 데서 매력을 느끼고, 이미 죽고 없는 유키오의 무덤을 매일 찾는 요코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동한다. 그가 일본인에 의한 서양무용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현실과 지극히 유리된 ‘서양에서 공연된 서양무용’에 대한 비평만 한다는 점에서 ‘헛수고여야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작가의 메시지는 더욱 두드러진다.

작품 내내 감지되는 죽음의 기운은 일본 특유의 미의식인 ‘모노노아와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전적 의미는 ‘자연과 인생에서 나타나는 순간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깊고 애절한 이해’ (1) 라는 뜻인데,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들이 스러져 가는 것을 지켜봄으로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 변화를 예술적 감각으로 승화시킨 것을 말하는 듯하다.


‘억새군요’ 하고 시마무라는 한번 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고는,
‘그렇다면 산에 핀 건 억새로군요, 싸리꽃인 줄 알았습니다’
시 마무라가 기차에서 내리자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이 산의 흰 꽃이었다. 경사가 가파른 산 중턱에서 정상 가까이 사방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산 위에 쏟아져 내리는 가을 햇살을 방불케 해, 아아, 하고 감동에 젖었던 것이다. 그걸 흰 싸리로 알았다. p80


여기서 가장 큰 차이는 억새는 다년생 식물이며 싸리꽃은 한해살이 식물이다. 무의식중에서도 시마무라의 미적 감각은 죽음을 향해있는 것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이는 엔딩에서 나오는 요코의 죽음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요코가 떨어진 2층 관람석에서 나무기둥이 두세 개 무너져내려 요코의 얼굴 위에서 타올랐다. 요코는 그 찌르듯 아름다운 눈을 감고 있었다. 턱을 내밀어 목선이 길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불빛이 흔들리며 지나갔다.’ p151


아름다운 요코를 향해 끓어오르던 시마무라의 감정은 모노노아와레로 완성된다. 몸으로 이어진 고마코와의 현실적인 삶에 비해 손에 닿지 않는 예술의 세계에 존재하던 요코의 죽음이야 말로 시마무라의 감정을 최고로 고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요코의 죽음으로 끝이 나는 엔딩은 그 후 시마무라의 감정이 어떠했을까는 침묵하고 있으며, 이러한 절제된 표현이 작품의 예술미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가와바타는 현실이란 인간의 짧은 생은 찰나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남는 건 예술만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 내에서 ‘헛수고’로 치환된 예술과 인생의 관계를 《설국》을 통해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문학 인생에 더 이상의 성취는 없으리라 믿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찰나에 불과한 생에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을 터, 가와바타는 1972년 가스 자살로 삶에 마침표를 찍는다.


1. 사진 통계와 함께 읽는 일본 일본인 일본문화, 2011년 9월 5일, 정형, 다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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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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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0년 전쯤 어떤 ‘사건’이 있었다. 도쿄 내 목조건물 2층에 살던 남자가 방에 잡지를 대량으로 쌓아두다가 바닥에 구멍을 내버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기인奇人이 있느냐고 웃어넘길 일이지만 저자 오카자키 씨에게는 남 이야기가 아니다. 몇 권인지 모를 장서를 쌓아둔 그에게는 언제쯤 다가올지도 모르는 현실의 이야기. 장서가들끼리 만나 서로 상대 이야기인줄 알았다는 농담은 그래서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러면서 한다는 이야기가 “책은 생각보다 무겁다. 2층에 너무 많이 쌓아두면 바닥을 뚫고 나가는 수가 있으니 주의하시길.” 이라니 책 줄일 생각보다 ‘2층에’는 쌓지 말라는 충고가 지극히 희극적이다.

장서가에게 책을 떠나보내는 것은 괴로울 터이다. 저자는 그것을 “제 손으로 키운 송아지를 떠나보내는 낙농가의 심정”이라고 표현하는데, 얼치기 독서가인 나 또한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으니 그와 같은 장서가에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집에 있는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오거나 서점에서 다시 사오는 일’이나 ‘같은 책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또 사는 지경’라면 분명 바닥을 뚫을 정도가 아니라도 정리의 필요성이 있기 마련이다.

정리의 필요성을 강조하려는지 모르지만 중반은 장서가들의 이야기로 담담하게 채워진다. 비평가 다니자와 에이치의 장서의 역사로 시작해 책이 불타버린 불행한 이들로 넘어가더니, 급기야 사람이 아닌 ‘책이 사는 집’을 세운 네기시 데쓰야 씨 연대기까지 나온다. 책 정리의 필요성을 그리도 꼼꼼하게 주장하던 저자가 네기시 씨의 개인 도서관 건축 이야기를 어린 시절부터 세우게 된 계기, 건축가 물색, 준공에 마지막으로 반성할 부분까지 시시콜콜하게 다루는 걸 보니 아무래도 본인 또한 비슷한 계획을 세운 적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건물을 세울 정도의 경제력은 역부족이라 그래서인지 몰라도 저자의 시도는 다른 방향으로 발휘된다. 트렁크 룸을 빌려서 책을 보관하다 끝내 헌책방을 열고야 만 도미나가 쇼이치 씨는 그렇다 치고 집 한편이 기울 정도로 책을 수집하다 자취(북스캔)으로 돌아선 시미즈 데쓰오 씨가 등장한다. 하지만 본인 입으로 ‘컴퓨터는 먹고 살기 위한 도구’라고 단언하며 구글 지도 프린트도 못해 손으로 그린다는 저자가 그런 융통성을 과연 발휘할지는 의문이다. 그 근거로 ‘남자는 수집하는 동물’이라 ‘수렵 시대의 DNA’에 ‘왕국을 통솔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며 수집욕을 정당화한다.


“수집을 통해 수집된 물건으로부터 자신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고 생각의 방향성을 얻는 일이 종종 있다. 사람은 스스로 목적을 알 수 없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물건을 수집하기 시작하지만, 수집한 물건은 언젠가 언어가 되고 문맥이 되어 사람을 지혜로운 길로 이끈다. 자신도 분명히 알 수 없는 어떤 호기심이 지혜의 결정체가 되어 간다.” 170p


이 대목에 이르면 ‘남자의 수집욕’에 대해 앞에서 구구절절 하던 설명이 이 한마디로 정리되면서 가족의 잔소리에는 이렇게 대항하라는 친절한 충고까지 잊지 않는다.

그렇지만 저자 자신은 지나친 장서욕이 좋지 않다는 사실 자체는 이해하고 있어 ‘적당한 장서량은 500권’라고 슬며시 고백하며 ‘올바른 독서가’의 자세를 역설한 요시다 겐이치 씨를 인용한다. 500권도 그냥 500권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엄선되고 적절히 순환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붙인다. 뒤에 따라 나오는 도서관 이용법과 함께 새겨들을만한 이야기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장서가의 달곰씁쓸한 회고록에만 있지 않다. 일본문학에 관심 있어도 들어보지 못했을 작가들의 이름이 덤불 속 보석처럼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온다. 그 중에는 번역되지 않았을 법한 이름도 제법 있어 일본문학에 관심 있는 이라면 한번쯤 훑어봐도 후회 없을 책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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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의 사각 2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3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1편까지는 어음 사취란 트릭이 흥미진진했지만 이 정도로 반복된다면 신선도가 떨어진다. 목표에 접근할 때부터 결과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이 되니 옴니버스식으로 할거면 다른 트릭을 사용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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