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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10년 전쯤 어떤 ‘사건’이 있었다. 도쿄 내 목조건물 2층에 살던 남자가 방에 잡지를 대량으로 쌓아두다가 바닥에 구멍을 내버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기인奇人이 있느냐고 웃어넘길 일이지만 저자 오카자키 씨에게는 남 이야기가 아니다. 몇 권인지 모를 장서를 쌓아둔 그에게는 언제쯤 다가올지도 모르는 현실의 이야기. 장서가들끼리 만나 서로 상대 이야기인줄 알았다는 농담은 그래서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러면서 한다는 이야기가 “책은 생각보다 무겁다. 2층에 너무 많이 쌓아두면 바닥을 뚫고 나가는 수가 있으니 주의하시길.” 이라니 책 줄일 생각보다 ‘2층에’는 쌓지 말라는 충고가 지극히 희극적이다.
장서가에게 책을 떠나보내는 것은 괴로울 터이다. 저자는 그것을 “제 손으로 키운 송아지를 떠나보내는 낙농가의 심정”이라고 표현하는데, 얼치기 독서가인 나 또한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으니 그와 같은 장서가에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집에 있는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오거나 서점에서 다시 사오는 일’이나 ‘같은 책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또 사는 지경’라면 분명 바닥을 뚫을 정도가 아니라도 정리의 필요성이 있기 마련이다.
정리의 필요성을 강조하려는지 모르지만 중반은 장서가들의 이야기로 담담하게 채워진다. 비평가 다니자와 에이치의 장서의 역사로 시작해 책이 불타버린 불행한 이들로 넘어가더니, 급기야 사람이 아닌 ‘책이 사는 집’을 세운 네기시 데쓰야 씨 연대기까지 나온다. 책 정리의 필요성을 그리도 꼼꼼하게 주장하던 저자가 네기시 씨의 개인 도서관 건축 이야기를 어린 시절부터 세우게 된 계기, 건축가 물색, 준공에 마지막으로 반성할 부분까지 시시콜콜하게 다루는 걸 보니 아무래도 본인 또한 비슷한 계획을 세운 적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건물을 세울 정도의 경제력은 역부족이라 그래서인지 몰라도 저자의 시도는 다른 방향으로 발휘된다. 트렁크 룸을 빌려서 책을 보관하다 끝내 헌책방을 열고야 만 도미나가 쇼이치 씨는 그렇다 치고 집 한편이 기울 정도로 책을 수집하다 자취(북스캔)으로 돌아선 시미즈 데쓰오 씨가 등장한다. 하지만 본인 입으로 ‘컴퓨터는 먹고 살기 위한 도구’라고 단언하며 구글 지도 프린트도 못해 손으로 그린다는 저자가 그런 융통성을 과연 발휘할지는 의문이다. 그 근거로 ‘남자는 수집하는 동물’이라 ‘수렵 시대의 DNA’에 ‘왕국을 통솔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며 수집욕을 정당화한다.
“수집을 통해 수집된 물건으로부터 자신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고 생각의 방향성을 얻는 일이 종종 있다. 사람은 스스로 목적을 알 수 없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물건을 수집하기 시작하지만, 수집한 물건은 언젠가 언어가 되고 문맥이 되어 사람을 지혜로운 길로 이끈다. 자신도 분명히 알 수 없는 어떤 호기심이 지혜의 결정체가 되어 간다.” 170p
이 대목에 이르면 ‘남자의 수집욕’에 대해 앞에서 구구절절 하던 설명이 이 한마디로 정리되면서 가족의 잔소리에는 이렇게 대항하라는 친절한 충고까지 잊지 않는다.
그렇지만 저자 자신은 지나친 장서욕이 좋지 않다는 사실 자체는 이해하고 있어 ‘적당한 장서량은 500권’라고 슬며시 고백하며 ‘올바른 독서가’의 자세를 역설한 요시다 겐이치 씨를 인용한다. 500권도 그냥 500권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엄선되고 적절히 순환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붙인다. 뒤에 따라 나오는 도서관 이용법과 함께 새겨들을만한 이야기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장서가의 달곰씁쓸한 회고록에만 있지 않다. 일본문학에 관심 있어도 들어보지 못했을 작가들의 이름이 덤불 속 보석처럼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온다. 그 중에는 번역되지 않았을 법한 이름도 제법 있어 일본문학에 관심 있는 이라면 한번쯤 훑어봐도 후회 없을 책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