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에 달하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192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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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들은 다 같이 피어야 한다고

선동하지 않았다. 저 혼자

황폐한 이 대지에 여린 주먹을 짚고 힘껏

제 무릎을 편다. 각자가 그렇게

핀 것이다. 무더기무더기,


그런 봄나물을 사기 위해

좌판 앞에 머물렀다가

반지를 잃어벼렸다. 그런 후에야

필요 이상으로 내가 야위어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도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아직 당신들 안쪽에

있기로 했다. 가장 여린 배춧잎과 같아서 최후에야

식탁에 오르도록.




그늘


벚나무는 천 개의 눈을 뜨네

눈동자도 없이

눈꺼풀도 없이


외투를 세탁소에 맡기러 가는 길과

교회의 문전성시와

일요일과

눈썰매와


벚나무는 곧 버찌를 떨어뜨리겠지

벌써 나는 침이 고이네


거미처럼 골목에 앉아

골목에 버려진 의자에 앉아

출발도 없이

도착도 없이


벌거벗은 철제 대문

그늘에 앉아 젖은 무릎을 말리네

해빙도 없이

결빙도 없이


북극여우와 바다코끼리와 바다표범과

흰 무지개와 흰 운무와

쇄빙선도 없이

해협도 없이


버찌는 잠시 돌 옆에 머물겠지

개미는 버찌를 핥겠지

혓바닥도 없이

사랑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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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저항력이다 - 무기력보다 더 강력한 인생 장벽
박경숙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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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자가 사냥을 하지 않는지에 대한 메타포를 얻기 위해서 사자의 사냥 심리를 상상해 보았다. 사자는 매일 사냥을 하지 않고 배가 부를 때는 빈둥댄다. 그러면서 마음만 먹으면 토끼쯤은 언제든 잡을 수 있다고 자만한다. 사자의 비정기적인 사냥 패턴과 자만심이 저항을 유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심리적 장벽을 만들어내는 것도 그런 이유일 수 있다. 할 수 있다고 믿고, 언제든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절박함이 없다. 게다가 휴식이 길어지면 시작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그러다 시간이 꽤 지나면 시작은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일이 된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처럼 시작만 하면 다음 날 끝낼 수 있는 일을 몇 달 동안 시작조차 못한다. 이것이 바로 저항의 위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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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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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에라자드가 풀어 놓은 이야기는 기대로 가득한 고치처럼 술탄을 감싸고, 결국 그 안에서 그는 조금은 덜 잔혹한 사람이 되어 나온다. ... 그 안에는 욕망에 대한, 속임수와 마법에 대한, 변신과 시험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살구 더미는 매우 풍성해 보이리라 기대했지만, 사실은 늘 불안을 던져 주었다. 그 자리를 지날 때마다 썩어버린 것들을 적게는 열 개에서 많게는 20~30개까지 골라내야 했기 때문에, 그 앞에서는 존경의 마음 대신 신중한 눈길이 필요했다. 그 살구 더미는 이제는 더이상 어머니가 살지 않는 그 집에 있던 어머니의 나무에서, 새로운 소란이 한바탕 시작되려던 여름에 따온 것이었다.


살구가 오기 두 해 전 여름, 어머니가 정신을 잃기 시작했다. 길을 잃고, 본인의 집 안에서 갇히고, 여러 차례 응급 상황에 빠져 내게 구해 달라거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전화하는 일들이 생겼다.



사람들은 알츠하이머 병이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왕성한 정신으로 지식을 쌓아 가는 반면, 인생의 반대쪽 끝에 있는 이 단계에서는 그 지식들이 해체된다. 얻는 것과 잃는 것인 만큼, 두 단계는 다르다. 나는 어머니가 뜯어지는 책 같다고 생각했다. 책장이 날아가고, 문단이 뭉개지고, 단어가 흘러내려 흩어지고, 종이는 순수한 흰색으로 되돌아간다. 가까운 기억이 먼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은 더해지지는 않는 뒤에서부터 지워지는 책. 어머니의 말에서 단어가 사라지기 시작하며, 텅 빈 자리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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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와 함께 걷다 - 평화의 눈길로 돌아본 한국 현대사
한홍구 지음 / 검둥소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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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집


광복회 등 독립운동 단체가 서대문 독립공원 내에 전쟁과여성 인권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을 격이 맞지 않는다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순국선열을 기리는 서대문 독립공원 내에 일본군 위안부할머니들의 수난을 보여주는 박물관이 건립되는 것은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을 폄하시키는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태도야말로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을 욕되게 하는 일이 아닐까? 저렇게 고통 받고 있는 동포들을 해방시킨 것보다 더 절절한 독립운동의 이유가 있었을까?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아픔이 아니라 부끄러움으로 여기는 가부장적이고 몰인권적인 태도야말로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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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데미안 클래식 보물창고 15
헤르만 헤세 지음, 이옥용 옮김 / 보물창고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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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속에서 왈칵 치솟는 그 어떤 것,

나는 오로지 그것을 따라 살려고 애쓰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왜 그토록 어려웠던 것일까?

 

 

세계의 현상들은 딱 한 번만 교차할 뿐 절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는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모든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삶을 살면서 자연의 의지를 실현하는 한 경이롭고 주목을 받아 마땅하다.

 

내 이야기는 더는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 무의미와 혼란, 광기와 꿈의 맛이 난다.

 

인간 개개인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요, 하나의 길로 가려는 시도요, 하나의 오솔길의 암시이다. 일찍이 전적으로 완전히 자기 자신이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 어떤 이는 막연하게, 또 어떤 이는 명료하게 각자 자신의 능력껏 노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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