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에 달하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192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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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들은 다 같이 피어야 한다고

선동하지 않았다. 저 혼자

황폐한 이 대지에 여린 주먹을 짚고 힘껏

제 무릎을 편다. 각자가 그렇게

핀 것이다. 무더기무더기,


그런 봄나물을 사기 위해

좌판 앞에 머물렀다가

반지를 잃어벼렸다. 그런 후에야

필요 이상으로 내가 야위어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도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아직 당신들 안쪽에

있기로 했다. 가장 여린 배춧잎과 같아서 최후에야

식탁에 오르도록.




그늘


벚나무는 천 개의 눈을 뜨네

눈동자도 없이

눈꺼풀도 없이


외투를 세탁소에 맡기러 가는 길과

교회의 문전성시와

일요일과

눈썰매와


벚나무는 곧 버찌를 떨어뜨리겠지

벌써 나는 침이 고이네


거미처럼 골목에 앉아

골목에 버려진 의자에 앉아

출발도 없이

도착도 없이


벌거벗은 철제 대문

그늘에 앉아 젖은 무릎을 말리네

해빙도 없이

결빙도 없이


북극여우와 바다코끼리와 바다표범과

흰 무지개와 흰 운무와

쇄빙선도 없이

해협도 없이


버찌는 잠시 돌 옆에 머물겠지

개미는 버찌를 핥겠지

혓바닥도 없이

사랑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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