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의 기초개념
하인리히 뵐플린 지음, 박지형 옮김 / 시공사 / 199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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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적이고 외곽선을 강조하는 시각은 물체들을 고립시키는 데 반해 회화적으로 보는 눈은 그것들을 결합시킨다. 전자의 경우는 개별적인 구체적 대상을 견고하고 가촉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데 집착하며 후자의 경우는 보이는 전체를 부유하는 가상으로 파악하려 한다.


2. 평면적인 것에서 깊은 것으로의 발전: 고전적 미술은 전체 형태를 이루는 각 부분들을 표현할 때, 동일한 층에 평면적으로 표현하지만 바로크는 튀어나오고 들어간 관계를 강조한다. 평평함은 선의 요소이며, 평평하게 늘어놓는 것은 가장 확대된 시야의 형태이다. 윤곽선이 점점 의미를 상실하자 평평함의 의미도 상실되고 눈은 사물을 근본적으로 들어가고 나온 관계로 결합한다.


5. 대상에 대한 절대적 명료성과 상대적 명료성: ... 즉 그 차이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대로 전체적으로 수용하여 비조각적으로 재현하는 것 사이의 차이이다. ... 단지 소재의 명료성 그 자체가 더 이상 재현의 지상목표가 아니게끔 되었던 것이다. 이제 형태를 눈앞에 완벽하게 드러나게끔 하는 대신 중요한 특징만을 전달하는 것으로 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구성, 광선, 색채가 단지 형태를 명료하게 하깅 ㅟ한 보조적 수단이기를 멈추고 그 자체로 독립하여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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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예르모 델 토로의 창작 노트
길예르모 델 토로.마크 스콧 지크리 지음, 이시은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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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종종 자기와 다른 것들로부터 단절된 채, 타자성을 위협적이라고 느끼고 거부하기 일쑤다. 그러나 기예르모의 예술은 우리에게 집이나 극장 좌석에 안락하게 앉아, 혐오스럽고 거부당한 것들을 공감과 연민을 가지고 되돌아보도록 권한다. 다양한 인간(과 심지어 비인간)의 경험을 아우름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정의를 확장해보라는 것이다.

<판의 미로>의 경우에 기예르모는 설화, 요정 이야기, 고전적인 아동 문학에서 추려낸 구성의 모티프를 반추하고 있다. 아이들이 통과의례를 견뎌냄으로써 이상하고 낯선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모티프가 환기시키는 일부 이미지, 예컨대 다시 살아나는 맨드레이크 뿌리

 

 

그러자 그는 내가 바로 지금 구세계에 대해 느끼는 바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헬보이 2>의 주제와도 유사하죠. “우리는 지혜 대신 교만을 얻었고, 지성 대신 잔인함을 얻어, 세계를 잔인하고 차디찬 곳으로 만들었다.”

 

 

기예르모는 노트를 적으면서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용기를 갖고 원하는 바를 정확히 표현하라고 되새긴다. 그런 일환으로 전작 <헬보이>에서 양서인간 에이브 사피엔 역을 맡은 존스가 <판의 미로>를 위해 <엑스맨><맨인블랙> 시리즈의 영화 출연을 고사했을 때, 기예르모는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썼다. “2007…… 올해는 나의 해다. 기예르모 델 토로.”

판은 대퇴골로 만든 플루트를 갖고 있다 아름다움과 그로테스크함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완전한 하나가 된다. … 나는 두 가지를 믿는다. 신과 시간. 둘 다 무한

 

 

우리는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 없고, 같은 영화를 두 번 볼 수도 없다. 기억할 만한 TRUEBISMO #1

 

 

유럽의 요정 이야기에서 금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에서 나는 유혹의 탁자 위에 음식이 아닌 금을 올려놓으려 했다. 두 가지 중 어느 쪽이 관객이 이해하기에 더 쉬울 것인가? (??)

 

 

내가 음식과 금이라는 두 가지 생각을 떠올린 것은 그 연회의 모든 것을 붉게 만들기 위해서였어요. “금이 단일한 색상을 띠듯이, 모든 음식도 젤라틴과 포도 등으로 붉게 만들어 색상을 통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죠.

트릭과 생각을 늘어놓기보다는 서두르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어떤 일을 진행시켜나가는 느낌이에요.

나는 노트가 더 많아질수록 점점 더 현실적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디자인 감각은 좀 무뎌졌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과거의 노트보다 이런 노트들이 더 좋아요. 이것들은 완전하거든요. 무언가를 찾고 있지 않아요. 이 노트들은 그저 어떤 식으로든 내 안을 들여다보는 나인 거죠.

 

 

폭군의 지배는 죽음으로써 끝나지만, 순교자의 지배는 죽음으로써 시작된다.” 나는 이거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적인 대립이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이름을 후대에 남기는 데 집착하는 남자와 그런 데 신경 쓰지 않는 소녀의 대립인 거죠. 물론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은 소녀고요.

 

 

전에 겪어보지 못한 장소나 방식 등 새로운 일에 직면할 때 약간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정상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하려면 무언가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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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 Tuymans (Contemporary Artists (Phaidon)) (Paperback)
Phaidon Press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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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your work there's a kind of reluctance to portray human images. It's not that they don't exist; they do, but they are defaced, erased, as if deprived of identity. Take Heillicht (1991), which shows a doctor's face covered by a mask, or The Conversation (1987), in which two men are portrayed as two monsters, their faces smeared. In DDR (1990) the left panel also shows someone's face daubed or smeared. The seated figure in Hands, the piece you have lost from 1978, has no face, or at least not a distinguishable face. Another work I like very much, Nr. 3 (1978), shows four half-naked figures, their faces kind of covered. Angel (1992) depicts a faceless angel playing the harp. All these works seem to speak of camouflage-you've even painted a piece entitled Camouflage. And finally Nr. 6 (1978) depicts a sort of hooded, masked man. Why this insistence on a blurred or hidden identity?


Tuymans

Nr. 6 and Hands are very old pieces, about the idea of isolation. I still work in isolation, in a very small room with a big mirror. If you look very intensely at your face your traits disappear and you see only a black hole, leaving only the background. I had the idea of surrounding myself with fake figures or, worse, fake personalities that you can only see as different self-portraits. I destroyed a lot of those portraits. In Nr. 6 the face was painted afterwards on paper and glued with paint on top where the face should be. These are very existential images, and from a very existential level they grew into something very rationalized. I don't want to make portraits on a psycho-logical level. I take all the ideas out of individuality and just leave the shell, the body. To make a portrait of someone on a psychological level, for me, is an impossibility; I am much more interested in the idea of masks, of creating a blindfolded space of mirrors.



Aliga

There's another piece dealing with childhoood called Silent Music (1992). It's a fairly large picture showing an interior packed with furniture. There is a sense of malaise, maybe due to the pastel colours, and the stifling atmosphere. The space is too crowded.


Tuymans

But at the same time it's empty. The bed is unmade; the chair empty; the cupboard closed. The light source is unclear. You have the sense that you're peering in through an open door. And pink and blue are typically children's colours, for a child's room that someone else has prepared for you. In that sense it's horrific. If you look carefully at the image you realize that the chair is bigger than life-size; it couldn't be for a child. It is not my room but a sort of universal kid's room, turned into a prison, a cell. The objects are things you need to survive; a bed, a table, a chair, a cupboard. The colours are meant to be friendly and yet there's a sense of claustrophobia. A lot of my imagery has a sense of coziness which is turned into something terrifying. Anything banal can be transformed into horror. Violence is the only structure underlying my work. It's both physical and detached at the same time.




There is a link between annihilation, hygiene, consumerism, production and propaganda. When you think about hygiene sometimes it can be connected to ethnic cleansing. This can appear as an economical and rational perspective. The final solution is something hidden, and I want to integrate that into the cultural discourse. It could be seen as a metaphor for the culture we live in. I see it as something that might happen again, as a possibility. I don’t want to take a moral stance, but I want to oppose the taboo aspect of it. The biggest reaction against the war in former Yugoslavia came when people saw prisoners behind barbed wire fences. The perversity of the image made people react, triggered our collective memory of the Nazi cam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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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t of my paintings are not painted on a stretcher. They are painted on a piece of canvas or on a piece of board. When the image is finished I just a paint a white ribbon around it to focus it. That’s the last thing I do when the painting is finished. It gives me the chance to alter the size of the image. None of my paintings is framed it evens itself out. The visibility drops and a kind of gloominess appears on the painting, a sort of second skin. That gives people the impression that the paintings are similar.


There is continuity in the way I approach painting. The notion of contrast, of outline and shadow, is very significant in my work. I have made a group of pieces about shadows and mirrors because they create immaterial spaces. It’s hard to depict them, it’s challenging especially for someone like me who thinks that painting is only about precision. It has nothing to do with virtuosity; it’s a necessity. Most of my work could at first look clumsy, deprived of aesthetic elements. I am not into aesthetics; I am into meaning and necessity. Folk art works in a similar way. It’s about anonymous elements, something that is now owned by anybody in particular. It’s a collective thing, it’s precise, it may look banal at first but it is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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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not work otherwise. It’s about truly focusing, and that is sexually loaded. It’s true concentration, true intensity. When I fail to reach that breaking point it is not accurate and it never will be. That’s why it is very sexual. It’s another type of arou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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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극장 - 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고명섭 지음 / 김영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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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취와 황홀경의 상태, 사지가 갈기갈기 찢기는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용어로 쓰고 있다.


서로 성격을 완전히 달리하는 이 두 종류의 충동들은 대체로 공공연히 대립하면서 서로가 항상 새롭고 한층 힘 있는 탄생물들을 낳도록 자극하면서 평행선을 이루며 나아간다. 이러한 탄생물들 속에서 저 대립의 투쟁은 영원히 계속되며, '예술'이라는 고옹의 단어가 이러한 대립을 단지 외견상으로만 연결시켜줄 뿐이다. 그 두 충동들은 그리스적인 '의지'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기적을 통해서 결국에는 서로 짝을 맺게 되며, 이러한 결혼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아폴론적이면서도 디오니소스적이기도 한 아티카 비극 작품이 산출되는 것이다.


... 그러나 헤라의 사주를 받은 티탄들이 자그레우스를 잡아 여덟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어 삼켜버린다. 다행히 심장이 남았는데, 제우스가 그 심장을 가져가서 삼킨 다음 세멜레를 만나 세멜레를 통해 자그레우스를 다시 태어나게 했다. 자그레우스는 '영혼의 사냥꾼'을 뜻하며, 디오니소스의 별명 가운데 하나다. 이렇게 죽었다가 소생하는 디오니소스는 대지가 겨울에는 활동을 멈추었다가 봄에 살아난다는 믿음을 반영한다. 디오니소스는 풍요와 수확을 관장하는 신이며, 생명력, 피, 포도주, 물, 정액 따위를 상징한다.


디오니소스의 이 이미지, 찢김과 다시 태어남, 파괴와 재생의 이미지는 후기로 갈수록 니체 사상에서 비중이 커지고 의미심장해지며, 또 성격이 변한다. 즉 단순히 비극의 기원이 되는 도취와 황홀경의 신에서, 영원히 돌아오는 생의 긍정을 상징하는 신이 된다. 말년의 메모에서 니체는 이렇게 쓴다. "갈기갈기 찢긴 디오니소스는 삶에 대한 약속이다. 그것은 영원히 다시 태어날 것이고 영원히 파괴로부터 되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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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사 - 개정판
S.P.램프레히트 지음, 김태길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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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세계에 아무런 본래적 질서도, 아무런 일관된 목적도, 아무런 도덕적 정부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선하다, 혹은 악하다, 아름답다, 혹은 추하다, 기계이다, 혹은 유기체이다 하는 따위의 술어를 일반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의지라는 것, 그리고 인간이 여러 가지 예술에 있어서 아름다운 형상들을 창조함으로써 세상의 싱거움과 혼란으로부터 피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쇼펜하우어와 같은 생각을 가졌었다. 그는 의지를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는 디오니소스적 요소라고 불렀고, 형상에 대한 관조를 아폴론적 요소라고 불렀다. 그러나 인간이 의지의 여러 충동으로부터 피해야만 된다고 하는 쇼펜하우어의 신념에 대해서는 옳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살려는 의지를 부정하라는 쇼펜하우어의 충고를 무시하였다. 살려는 의지로 말미암아 결국 사람들은 고통을 겪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마다하지 않았다. 고통을 어떤 사람이 사내답게 살고 있다는 표적으로서 환영하였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을 내다보고는 그만 약해진다는 것과 모든 훌륭한 업적은 격렬한 고통을 겪어야만 얻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사회적 환경에서 여러 도덕적 교훈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리고 만일 사회의 따분한 수준을 넘어서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어떤 강한 의지가 그 자신의 도덕적 자율성의 지휘를 받아 관습의 타성을 물리칠 때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엇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죄의식으로 말미암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과거의 여러 가지 흠을 들추어내어 자기 자신을 괴롭힐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훌륭하고 뛰어난 행동을 하도록 권하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잘 순종하며 의무를 지키며 온건하며 신중하며 이기적이 아닌 행동을 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용어법에 있어서, 악이란 사람들의 병적인 양심이 그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어떤 것이나 악이다. 니체는 사람들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느니,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느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느니 하는 따위의 격언을 따르는 것을 비난하였다. 사람들이 온유와 마음의 가난과 투쟁에 대한 공포를 찬양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약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악한 일들이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들이다. 그들이 이것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에게 힘을 가지고 행동하는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뛰어난 사람은 약자들이 두려워하는 것들을 돌아보는 처지를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뛰어난 사람은 악한 것은 무엇이든 이를 피할 것이다. 그는 게으름, 자기 만족, 관능적 쾌락의 유혹,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상업성의 이득, 명성을 얻기 위한 값싼 과시, 그리고 온갖 핑계를 피할 것이다. 그는 기운을 내어 여러 가지 위험에 부딪칠 것이다. 또한 대담하게 살아갈 것이며, 언제나 먼저 득실을 계산하기 위해서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선량과 사악 사이의 구별은 약자가 생각해 낸 거짓된 구별이다. 그것은 그들의 형편없는 연약함을 혹은 변명하고 혹은 보호하기 위해서 생각해낸 것이다.

체념하기 위해서 체념하는 것보다 더 도덕적으로 추악한 일은 없다. 보통 실천되고 있는 금욕주의는 어리석고 졸렬하다. 과연 엄격한 자기 훈련은 위대한 일의 필수 조건이 될 수 있고, 금욕적 수행은 예술가나 철학자로 하여금 그가 추구하는 높은 처지에 올라갈 수 있게끔 하는 유일한 길이 될 수 있다. 좀더 좋은 것을 위해서 무엇을 단념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체념을 추구하는 까닭에 무엇을 단념한다는 것은 당치않은 일이다. 그리하여 어떤 그의 강경한 경구들에서 니체는 남녀의 순결을 비난하고 있다. 그가 순결을 비난한 것은 탕아를 찬미해서가 아니라, 욕망이 없는 사람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강렬한 욕망은 뛰어난 사람이 되게 하는 보증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하나의 없어서는 안 될 필요 조건이다. 성문제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보다 훌륭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절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저 체념을 일삼기 위해서 절제하는 것은 옹졸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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