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걸작 - 밥 로스에서 매튜 바니까지, 예술 중독이 낳은 결실들
마이클 키멜만 지음, 박상미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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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아마추어는 프로의 기술을 갖춘 사람이겠지만, 반면 진정한 프로란 본질적으로 아마추어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간에서 세련된 스타일이라 생각할지도 모르는 냉소와 아이러니를 멀리한다. 회의란 때로 유용할 수 있고 비평가들에겐 꼭 필요하다. 하지만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예술의 비인간화>에서 <아이러니적 운명>이라는, 제목도 적절한 장에서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페이소스를 멀리하고 아이러니를 선호하는지, 이로 인해 "현대미술이 견딜 수 없이 지루해졌는지"를 한탄했다.


1911년 에드가 드가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화가였던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에게 가장 특별한 경의를 표했다. 노인이었던 드가는 파리의 조르주 프티 갤러리에서 열리는 앵그르의 전시에 하루에 빼놓지 않고 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 드가는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림들 위로 손을 저어볼 분이었다. 어른이 아이를 안아 보듯 그림을 쓰다듬어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저 애정 때문만이 아니라 직접 손을 대는 행위를 통해 그 순간을 초월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사랑과 헌신의 손짓 속에서, 우리들보다 오래 존재할 소중한 것들과 닿은 이 접점에서 시간은 잠시 녹아버린다.


"보나르 얘긴 꺼내지도 말아. 그가 그리는 건 그림이 아냐. 그림이란 감수성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 그림은 권력의 문제야. 자연으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는 거지. 자연에서 정보나 조언을 기대하면 안 된다는 뜻이지." 피카소는 한술 더 떠 보나르는 "현대 화가도 아니다." 라고 했다. 다행히도 그 후 보나르에 대한 평가는 회복되었지만, 그는 지금까지도 미술사에서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여겨진다. 인상파 이후에 나온 인상파 화가는 시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3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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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현대예술이론
제이 에멀링 지음, 김희영 옮김 / 미진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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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거의 모든 곳에서 현저한 실수들, 교란시키는 반복들, 명백한 모순들, 소통을 전혀 의도하지 않는 사물들의 기호들을 찾아볼
수 있다. … 왜곡은 “외양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비틀어 변형시키는 것”, “다른 장소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이트의 저술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무의식에 접근하여 이를 해석하는 체계적 방식을 전개시킨 것이다. 위에 인용된 글에서 프로이트는 의식적 삶, 자아의 행적 life history을 “억제되고 포기된 내용abnegated material”으로 어지럽혀진 텍스트, 즉 다른
근원의 흔적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유대인 랍비가 성경에 내포된 의미를 전달하는 관례에 영향을 받은) 문헌해석의 행동과 함께 심리적 과정의 행동들을 분명하게 생략한다.

(니체)
     
“이러한 문화의 비극적 인간은” 새로운 예술, 형이상학적 안락을 주는 예술을 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만의 헬렌을 염원하듯이 비극을 염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존재의 현실을 대하는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꿈의 현실을 대한다. 그는 치밀하고 의지에 찬 관찰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형상들에 의거하여 삶을 해석할 수 있고, 이러한 과정들을 반성함으로써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훈육하기 때문이다.
     
(바디우)
     
그의 주된 관심은 사건의 이론화이다. 여기서 사건은 담론의 변화, 새로운 욕망에 대한 관계, 매우 새로운 윤리 혹은 “존재방식”을 생성하는 예측할 수 없는 인생에 있어서의 단절을 의미한다. 바디우의 철학은 이러한 예측불가의 사건들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며, 이 사건들은 그가 일반적 절차들이라고 칭한 과학, 정치, 사랑, 예술이라는 4개의 유형에 의해 생성된다.
     
예술은 하나의 진리-사건, 즉 다수의 존재, 자기 정체성의 근거들을 재구성하게 되는 불확정적인 “어떤 사람”을 만들어내는 현상황 안에 내재된 단절을 생성할 수 있는 하나의 절차다.
     
바디우는 ... 예술의 보편성을 역설하면서 예술이 “모든 사람에게 설득력 있는 진리를 비인격적으로 생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리는 세계화의 강요된 보편성에 맞서는 새로운 보편성을 위한 유일한 철학적 이름이다. ... 예술의 새로운 보편성이란 감각 그 자체에서 이념이 우연히 발생하는 새로운 형태의 창조다.
     
예술작품은 관람자를 방해하여 욕망과의 새로운 관계를 유도할 수 있는 단수성이다. 이러한 명제를 가지고 바디우는 예술, 정치, 사랑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다. 
     
명백한 것은 진리의 근원이 사건의 질서라는 것이다.


(벤야민)


벤야민은 모호함, 의미의 복수성, 분절적인 재현에 주목하여, 알레고리가 현대 예술작품들과 17세기 독일 바로크 애도극간의 유사성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폐허 안에 놓여있는, 매우 중요한 파편이자 잔재는 사실상 바로크 창작에 있어 가장 훌륭한 자료다. 왜냐하면 바로크 문학에서는 목표에 대한 엄밀한 생각 없이 기적을 끊임없이 기대하면서, 파편들을 부단히 쌓아올리는 것이 일반적으로 실행되기 때문이다.

"매우 중요한 파편"이라는 이 개념은 현대예술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다. 벤야민은 알레고리 이론을 논의하면서, 전례를 맥락에서 분리시키는 인용이라는 이전의 전통을 다루는 가장 현대적인 예술적 수단의 하나가 사실상 독일 바로크극과 함께 생긴 제스처라고 설명한다.


현대성의 문화적, 심리적 기원을 탐구하려는 초현실주의자들과 벤야민의 욕망은 분명히 유사하다. 그들이 관심을 공유하는 것들은 경계적인 심리상태 (자생적 무아지경과 감각의 착란), 정치, 일상생활의 순간적 경험, 환상, 억압, 유행이 지난 상품 등이다. 이러한 공동의 관심사들로 인해 벤야민은 자신의 탐구와 초현실주의자들의 탐구가 동일선상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탐구의 입장은 현재에 잠재하는 과거의 가능성을 찾아내고 현실화하고자 한다. 벤야민은 초현실주의에 대한 에세이에서 이러한 잠재적 가능성을 포착하는 것을 "세속적 계몽"이라 칭했다. 세속적 계몽은 현대성의 황폐해진 경험들을 하나의 혁명적 희망으로 변형시킨다. 근본적이고 제한적인 기억의 개념을 전제로 하여 사물들의 물질성 (19세기 자본주의의 퇴적물)과 구원 (벤야민에게는 메시아적인 개입이면서 브르통과 동료들에게는 "초현실성"의 도래)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바타이유)
     
헤겔에게 사유는 물질성이지만, 바타이유는 사유를 넘어서는 토대유물론-물질, 단순한 사물, 더러움, 배설물적 요소들-에 있다고 주장한다.
     
바타이유의 주장에 의하면 토대유물론의 주된 요소는 비정형이며, 이는 위반의 가능성, 즉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지양하거나, 틀을 부여할 수 없는 “저주의 몫”이 지속적으로 존재함을 보여준다. ... 이것은 도덕적, 정치적 규범들의 위반, 즉 인간의 가치와 이것을 위한 제도가 만들어 놓은 경계의 위반을 암시한다.
     
     
토대유물론은 관념론뿐 아니라 우주 안에서의 형태나 구조를 주장하는 것을 배제한다. ... 예술이 삶을 모방하고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는 전제를 파기한다. 플라톤의 <공화국>에 의하면, 이 계약을 파기하면 이상적인 상태로부터 추방된다. 또한 이것은 인간의 삶의 현 상황을 가장 잘 재현한다고 여겨지는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의 전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초현실주의가 현대성 그 자체의 얼굴-프로이트와 마르크스가 근본적으로 재정의한 실존을 위한 진정한 예술-이라는 브르통의 목적론적 주장에 맞서, 바타이유는 비정형의 개념, 즉 서구의 미적 사유 안에서 예술가가 가지는 기본적 역할의 위반으로 대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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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자들을 위한 미술 - 현대미술은 어떻게 이별과 죽음, 전쟁과 재해를 치유하고 애도했는가?
우정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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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카타 타츠미


호소에 에이코는 <가마이타치>를 두고 자기를 찾는 여행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도쿄 출신이었으나 어린 시절 전쟁 중에 가족을 떠나 혼자 도호쿠 지방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그는 그때의 비애, 우울, 공포 등을 지속적인 영감의 원천으로 강조했다. 특히 그는 전후의 폭발적인 경제 발전과 눈이 돌아갈 정도의 변화 속에서 전쟁에 대한 기억이 빠르게 사라져가는 현실을 걱정했다. 그때 등장한 히지카타 다쓰미는 호소에 에이코가 되새기고자 했던 도호쿠적인 흙의 향기를 뿜어냈던 것이다. 호소에 에이코는 히지카타 다쓰미와 함께 <가마이타치>를 위해 도호쿠 지방을 구석구석 여행했으나, 실제로 그가 피난생활을 했던 야마가타에는 한 번도 촬영을 가지 않았다. 이에 대해 작가는 특정한 장소여야 할 필요는 없이 내 기억에 있는 듯한 풍경을 기록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회고했다. 호소에 에이코가 기록하고자 했던 과거는 어린 시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하는 이율배반적인 가상의 시대였다. 따라서 도호쿠는 실질적인 장소라기보다는 가상의 과거에 영원히 묶여 있는 관념적 공간으로서의 디스토피아이자 유토피아였다.

 

<가마이타치>에서 과거의 장소로 돌아가고자 하는 호소에 에이코의 개인적인 욕망은 히지카타 다쓰미의 몸에 그대로 투사되었다. 히지카타 다쓰미는 유희와 분노, 순수와 광기,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흐리는 야생 그대로의 본능적인 육체를 연기했고, 그 속에서 그의 성적 정체성도 양성 사이를 오가는 혼돈을 보여주었다.

 

<가마이타치>에서 보여준 거친 육체와 추한 몸놀림은 부토의 특징이다. 히지카타 다쓰미는 관습적인 안무의 조화롭고 정제된 움직임을 극단적으로 파괴하고 무용으로 관련된 육체의 규율을 거부했다. 공연을 앞두고 수주 동안 계속되는 단식과 훈련은 거의 자학에 가까웠고, 몸을 뒤덮은 흰 분장은 시각적인 효과를 높일 뿐 아니라 피부에 고통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비쩍 마른 그의 몸은 벌거벗겨진 채 두서 없는 움직임과 흉측한 몸놀림으로 뒤틀리고 흔들렸다. 그가 추구하는 광기어린 몸놀림은 몸에 가해지는 사회적 통제, 즉 건강하고 위생적이며 조화로운 육체를 강요하는 근대사회에 대한 반항과 분노의 표출이었다. 그는 거대한 도쿄는 부패한 몸으로 가득하다. 지방질을 뽐내는 무기력한 세대. 나는 로션과 파우더를 발라 여자처럼 창백해진 그 피부 위에 구토를 한다는 분노어린 성토를 발표하기도 했다. ‘로션과 파우더로 요약되는 청결하고 정돈된 몸에 대한 저항의 밑바탕에는 빠르게 변하는 일본 전후사회에 대한 불안이 깔려 있었다. 히지카타 다쓰미도 호소에 에이코와 마찬가지로 경제의 기적이라는 피상적인 수사에 밀려 재빨리 숨겨진 과거의 기아와 극도의 빈곤, 고통에 대한 기억에서 저항적인 반문화의 기반을 찾고자 했다.

 

도쿄 올림픽은 원자폭탄의 폐허로부터 일본이 기적적으로 되살아났음을 세계인들에게 알리는 승리의 잔치였고, 자국민들에게는 사회적 안정과 국가적 자부심을 선전하는 대대적인 이벤트였다. 올림픽은 건장한 육체의 일본 국민과 평화롭고 민주적이며 통일된일본이라는 신화를 위한 스펙터클이었다. … 나아가 전후 일본 사회의 위생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사회적 통제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제로서 몸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가했던 전시의 행정을 재연하고 있었다.



히지카타 다쓰미는 올림픽이라는 스펙터클에서 숨기고자 했던 불결하고 수척한 몸을 드러낸 채 어둡고 메마른 과거의 풍경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히지카타 다쓰미 스스로도 뚜렷이 밝힌 바와 같이 그의 몸은 전후 일본 사회가 억누르던 모든 타자를 포괄한다.

 

생산 중심적인 사회에서 목적 없이 몸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무용이며,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금기시된 치명적인 적이다. 내 무용은 범죄, 동성애, 축제, 제의와 공통된 기반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이 행위들은 생산 중심적인 사회의 면전에서 무목적성을 과시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히지카타 다쓰미가 <가마이타치>에서 추구했던 것은 전쟁 이후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일본의 재건을 위해 제거되어야 했던 모든 사회적 불순물을 포괄하는 더럽고 위험한 육체였다. 그러나 전후 일본의 피상적인 안정을 위협하는 이 타자들 역설적으로 전쟁 이전에 존재했던, 아니 사실은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졌던 과거의 순수한일본으로 수렴되었다.

 

불가해하고 신비로우며 심오하고 두렵고 조용한 감정들

 

사실 어둠을 추구하고 전근대성과 비합리성을 좇는 경향은 1960년대의 전위미술계에 팽배해 있었다. 당시 미술계는 안보투쟁의 좌절과 원자폭탄에 대한 뒤늦은 반응이 파괴적이고 즉각적인 육체적 행위의 형태로 폭발하던 때였다. 이는 결국 집단적 통합을 강요하던 당시 사회체제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이 현대 일본의 사회적 억압에 대한 저항이 전근대적 일본으로의 회귀라는 형태로 나타나 그 저항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윤색과 과장을 거친 그의 기억이 의미 있는 이유는 농촌의 삶과 비극적인 죽음, 모성의 상실, 애잔한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환멸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감상이 당시 일본 대중의 상상 속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죽은 누이는 서정적인 과거, 천진했던 유년 시절, 모성애와 시골집 등이 모두 결합된 상실 또는 결핍의 상징이다. 즉 불안한 존재에 안정감을 주는 누이는 역설적으로 극단적인 가족사의 비극과 죽음의 공포, 전쟁의 참혹함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누이의 귀신으로 요약된 신화적인 과거는 잔인한 디스토피아임과 동시에 모성애의 유토피아이기도 했으며, 극도의 공포의 원천이자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무대 위의 히지카타 다쓰미는 아이비와 코르니예츠가 분석한 바와 같이 획일적인 현대사회의 일본적인 주체 형성을 위해 버려진 모든 타자의 현현이었다. 그는 죽은 누이의 망령을 등에 업고 여자 목소리로 말하며 정제된 안무를 파괴한 추한 몸놀림으로 조화와 질서를 위협했던 것이다. 그가 지향하는 곳은 도호쿠이기도 하고 도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히지카타 다쓰미가 나타내는 비합리성과 디스토피아에 대한 1960년대의 뒤늦은 동경을 단순히 반권위적 저항으로만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이비가 지적한 바와 같이 토착 원주민의 부정확한 사투리는 획일적인 중앙집권적 사회에 대한 저항의 도구가 될 수 있지만, 1960년대의 반문화에서는 서구의 문화와 침략에 의해 사라진 것으로 믿었던 순수한일본의 본질적인 목소리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즉 사라져가는 타자들의 미개한 장소, ‘도호쿠이거나 도노인 이 과거의 땅은 전후 일본이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던 순간에 집단 심리적 안정과 역사적 연속성을 위해 되살아난 셈이다. 근대화를 위해 사라졌던 문화의 불순물들은 1960년대에 순수하고 진실한 일본성의 근원이자 본질이 되어 되돌아왔고, 부토는 순수한일본의 어두운 이면이 가장 탁월하게 구현된 몸의 행위였다. 역설적이게도 그 결과는 집단적이고 통일된 문화적 정체성의 해체가 아니라 강화였다.

 

 

이불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타자로서의 여성과 신화 속의 유령은 본질적으로 저항의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작가는 남성적 (남근적)인 딱딱한 조각의 안티테제로 제시한 물컹물컹한 소프트 스컬프처를 몸 위에 덧입고, 끈적거리는 피와 따뜻한 핑크빗 살덩어리가 뒤엉킨 동물적 존재로서 도시를 누볐다. … 여성이 전복적인 주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스스로 타자화하는 것, 괴물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갈망>, <수난 유감>등의 퍼포먼스에서 이불이 재현했던 육체는

 

<알리바이>는 틀림없이 미술가인 동시에 ‘동양 여성’으로서의 분열된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여성의 손으로 미술 창조라는 남성의 영역에 진입했으나, 여전히 성적이면서도 순종적인 동양 여인의 강한 상징이엇던 ‘나비 부인’의 유령을 떨칠 수 없었다. 미술이라는 고급문화 영역에 안착한 듯하지만, 그녀의 태생에는 이미 개발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불균형이 각인되어 있었다. … <알리바이>의 표면적 아름다움은 흔히 ‘동양 출신의 여성 미술가’에게 기대할 수 있는 미적 감수성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이자 예술가인 작가의 손들이 유령처럼 빛나는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위협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생명을 빼앗긴 나비가 알록달록한 장신구에 찔려 살을 파고든 모습은 불길하다. <알리바이>의 부드러운 표면과 화려한 장식은 틀림없이 작가의 여성적 감수성과 과거에 대한 사적인 기억을 품고 있지만, 동시에 여성성은 테크놀로지에 대한 불신과 폭력적인 섹슈얼리티의 공포, 그리고 그에 따른 죽음의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실리콘으로 보정된 인체는 아름다움을 달성했을지라도 아름다운 육체는 이미 유기체로서의 성질을 벗어나 무기물에 한층 다가선 셈이다. 이처럼 무기물에 가까운 과장된 여체는 육체적 욕망을 극도로 자극하고, 이는 곧이어 죽음을 부르는 공포로 이어진다.


사이보그는 머리가 없고 팔다리가 하나씩 잘린 실제 인물 크기의 여성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에 흔히 등장하는 소녀 로봇과 고대 그리스 여신상, 마네의 올랭피아에ㅔ 이르기까지 대중문화와 미술사에 등장하는 여체의 다양한 이미지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러나 이불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팝아트의 사명보다는 테크놀로지의 실패에 대한 불안감에 더 치중하는 듯하다. 마치 지난 세기의 <프랑켄슈타인>이 산업혁명과 기계 발달의 산물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났을 때 얼마나 끔찍한 괴물이 되는가를 섬뜩하게 시각화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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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학교 | 정신 - 온전한 정신으로 사는 법 인생학교 4
필립파 페리 지음, 정미나 옮김 / 쌤앤파커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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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옳았어. 잘못한 건 그들이야."

말하자면 '그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마틴으로서는 그들이 틀린 것을 찾아내 '증명'해야 한다. 즉, '옳은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해야 마음이 편하고, 남들에게도 자신이 옳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자신이 옳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잘못'을 저지른 적이 필요하다. 그래서 마틴은 나쁜 사람들을 찾아내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안정감을 얻는 것이다.


아무 의문도 없이 이런 패턴을 고집한다면 마틴은 평생 발전도 깨우침도 얻지 못한 채, 과거의 망령과 이야기들에 얽매여 현재의 사람들과 진실한 관계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대인관계가 위태로워지는 셈이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로부터 단점을 찾아내서, 내가 옳고,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 받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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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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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래에 더 이상 어떤 의미론적 내용도 없는 까닭에, 시간의 진행은 어디론가를 향한 전진이 아니라 단순히 끝없는 현재의 사라짐일 뿐이다.


그러면 왜 의미의 중심이 사라지는가? 세계를 인간의 작위에 의해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근대적 세계관이 그러한 결과를 초래한다. 인간은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 인간은 행위를 통해 세계를 바꾸어갈 수 있기에 주체로 정립되고, 이러한 주체-됨이 인간에게 지고의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 지고의 가치를 실현해주는 것은 바로 인간의 행위이기 때문에 조작 가능성과 자유의 세계관은 결국 '활동적 삶vita activa'의 절대화로 이어진다. 무엇에도 구속되어 있지 않은 완전한 자유가 인간의 존재 가치가 된다. 그러나 구속되어 있지 않음으로서의 자유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의미의 중심은 인간이 그것에 구속되어 있다고 느낄 때만 존재할 수 있다. 모든 구속에서 해방된 인간 자신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순간, 의미의 중심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고 만다.


활동적 삶은 시간도 조작 가능한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주체적 개입을 통해 시간을 단축시킨다. 기차, 자동차, 비행기, 전신, 라디오, 컴퓨터, 인터넷, 디지털화, 이 모든 것이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한 지난한 싸움이었다. 시간에 구속되지 않고 시간에서 자유로움으로써 완전한 주체가 되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런데 이 싸움 속에서 전통적인 시간의 리듬, 그리고 그 리듬 위에 형성된 삶에 대한 감각은 파괴된다. 모든 과정을 단축시킬 수 있는 인간의 막대한 능력이 시간을 더할 나위 없이 가볍게 만든다. 무엇을 얻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줄어드는 데 비례하여 시간의 값은 싸지기 때문이다. 그러자 시간의 보복이 시작된다. 무게를 잃어버린 시간은 댐이 무너진 거센 물살처럼 마구 흘러가버린다. 인생도 그 물살에 휩쓸려 가볍게 떠내려간다.



문제는 기계 자체도 아니고 각종 첨단 기술을 통해 가능해진 속도 자체도 아니다. 가속화라는 현상은 세계를 인간 의지에 따라 지배하는 활동적 삶을 인간 존재의 유일무이한 가치로 보는 세계관의 파생적 결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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