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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자들을 위한 미술 - 현대미술은 어떻게 이별과 죽음, 전쟁과 재해를 치유하고 애도했는가?
우정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9월
평점 :
히지카타 타츠미
호소에 에이코는 <가마이타치>를
두고 ‘자기를 찾는 여행’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도쿄 출신이었으나 어린 시절 전쟁 중에 가족을 떠나 혼자 도호쿠 지방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그는 그때의 비애, 우울, 공포
등을 지속적인 영감의 원천으로 강조했다. 특히 그는 전후의 폭발적인 경제 발전과 눈이 돌아갈 정도의
변화 속에서 전쟁에 대한 기억이 빠르게 사라져가는 현실을 걱정했다. 그때 등장한 히지카타 다쓰미는 호소에
에이코가 되새기고자 했던 ‘도호쿠적인 흙의 향기’를 뿜어냈던
것이다. 호소에 에이코는 히지카타 다쓰미와 함께 <가마이타치>를 위해 도호쿠 지방을 구석구석 여행했으나, 실제로 그가 피난생활을
했던 야마가타에는 한 번도 촬영을 가지 않았다. 이에 대해 작가는 “특정한
장소여야 할 필요는 없이 내 ‘기억’에 있는 듯한 풍경을
‘기록’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회고했다. 호소에 에이코가 기록하고자 했던 ‘과거’는 어린 시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하는
이율배반적인 가상의 시대였다. 따라서 ‘도호쿠’는 실질적인 장소라기보다는 가상의 과거에 영원히 묶여 있는 관념적 공간으로서의 디스토피아이자 유토피아였다.
<가마이타치>에서
과거의 장소로 돌아가고자 하는 호소에 에이코의 개인적인 욕망은 히지카타 다쓰미의 몸에 그대로 투사되었다. 히지카타
다쓰미는 유희와 분노, 순수와 광기,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흐리는 야생 그대로의 본능적인 육체를 연기했고, 그 속에서 그의 성적 정체성도 양성 사이를 오가는 혼돈을
보여주었다.
<가마이타치>에서
보여준 거친 육체와 추한 몸놀림은 부토의 특징이다. 히지카타 다쓰미는 관습적인 안무의 조화롭고 정제된
움직임을 극단적으로 파괴하고 무용으로 관련된 육체의 규율을 거부했다. 공연을 앞두고 수주 동안 계속되는
단식과 훈련은 거의 자학에 가까웠고, 몸을 뒤덮은 흰 분장은 시각적인 효과를 높일 뿐 아니라 피부에
고통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비쩍 마른 그의 몸은 벌거벗겨진 채 두서 없는 움직임과 흉측한 몸놀림으로
뒤틀리고 흔들렸다. 그가 추구하는 광기어린 몸놀림은 몸에 가해지는 사회적 통제, 즉 건강하고 위생적이며 조화로운 육체를 강요하는 근대사회에 대한 반항과 분노의 표출이었다. 그는 “거대한 도쿄는 부패한 몸으로 가득하다. 지방질을 뽐내는 무기력한 세대. 나는 로션과 파우더를 발라 여자처럼
창백해진 그 피부 위에 구토를 한다”는 분노어린 성토를 발표하기도 했다. ‘로션과 파우더’로 요약되는 청결하고 정돈된 몸에 대한 저항의 밑바탕에는
빠르게 변하는 일본 전후사회에 대한 불안이 깔려 있었다. 히지카타 다쓰미도 호소에 에이코와 마찬가지로
경제의 기적이라는 피상적인 수사에 밀려 재빨리 숨겨진 과거의 기아와 극도의 빈곤, 고통에 대한 기억에서
저항적인 반문화의 기반을 찾고자 했다.
도쿄 올림픽은 원자폭탄의 폐허로부터 일본이 기적적으로 되살아났음을 세계인들에게 알리는 승리의 잔치였고, 자국민들에게는 사회적 안정과 국가적 자부심을 선전하는 대대적인 이벤트였다. 올림픽은
건장한 육체의 일본 국민과 ‘평화롭고 민주적이며 통일된’ 일본이라는
신화를 위한 스펙터클이었다. … 나아가 전후 일본 사회의 위생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사회적 통제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제로서 몸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가했던 전시의 행정을 재연하고 있었다.
히지카타 다쓰미는 올림픽이라는 스펙터클에서 숨기고자 했던 불결하고 수척한 몸을 드러낸 채 어둡고 메마른 과거의 풍경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히지카타 다쓰미 스스로도 뚜렷이 밝힌 바와 같이 그의 몸은 전후 일본 사회가 억누르던 모든 타자를 포괄한다.
생산 중심적인 사회에서 목적 없이 몸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무용이며,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금기시된 치명적인 적이다. 내 무용은 범죄, 동성애, 축제, 제의와 공통된 기반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이 행위들은 생산 중심적인 사회의 면전에서 무목적성을 과시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히지카타 다쓰미가 <가마이타치>에서 추구했던 것은 전쟁 이후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일본의 재건을 위해 제거되어야 했던 모든 사회적 불순물을 포괄하는 더럽고 위험한 육체였다. 그러나 전후 일본의 피상적인 안정을 위협하는 이 타자들은 역설적으로 전쟁 이전에 존재했던, 아니 사실은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졌던 과거의 ‘순수한’ 일본으로 수렴되었다.
불가해하고 신비로우며 심오하고 두렵고 조용한 감정들
사실 어둠을 추구하고 전근대성과 비합리성을 좇는 경향은 1960년대의 전위미술계에 팽배해 있었다. 당시 미술계는 안보투쟁의 좌절과 원자폭탄에 대한 뒤늦은 반응이 파괴적이고 즉각적인 육체적 행위의 형태로 폭발하던 때였다. 이는 결국 집단적 통합을 강요하던 당시 사회체제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이 현대 일본의 사회적 억압에 대한 저항이 전근대적 일본으로의 회귀라는 형태로 나타나 그 ‘저항’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윤색과 과장을 거친 그의 기억이 의미 있는 이유는 농촌의 삶과 비극적인 죽음, 모성의 상실, 애잔한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환멸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감상이 당시 일본 대중의 상상 속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죽은 누이는 서정적인 과거, 천진했던 유년 시절, 모성애와 시골집 등이 모두 결합된 상실 또는 결핍의 상징이다. 즉 불안한 존재에 안정감을 주는 ‘누이’는 역설적으로 극단적인 가족사의 비극과 죽음의 공포, 전쟁의 참혹함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누이’의 귀신으로 요약된 신화적인 과거는 잔인한 디스토피아임과 동시에 모성애의 유토피아이기도 했으며, 극도의 공포의 원천이자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무대 위의 히지카타 다쓰미는 아이비와 코르니예츠가 분석한 바와 같이 획일적인 현대사회의 일본적인 주체 형성을 위해 버려진 모든 타자의 현현이었다. 그는 죽은 누이의 망령을 등에 업고 여자 목소리로 말하며 정제된 안무를 파괴한 추한 몸놀림으로 조화와 질서를 위협했던 것이다. 그가 지향하는 곳은 ‘도호쿠’이기도 하고 ‘도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히지카타 다쓰미가 나타내는 비합리성과 디스토피아에 대한 1960년대의 뒤늦은 동경을 단순히 반권위적 저항으로만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이비가 지적한 바와 같이 토착 원주민의 부정확한 사투리는 획일적인 중앙집권적 사회에 대한 저항의 도구가 될 수 있지만, 1960년대의 반문화에서는 서구의 문화와 침략에 의해 사라진 것으로 믿었던 ‘순수한’ 일본의 본질적인 목소리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즉 사라져가는 타자들의 미개한 장소, ‘도호쿠’이거나 ‘도노’인 이 과거의 땅은 전후 일본이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던 순간에 집단 심리적 안정과 역사적 연속성을 위해 되살아난 셈이다. 근대화를 위해 사라졌던 문화의 불순물들은 1960년대에 순수하고 진실한 ‘일본성’의 근원이자 본질이 되어 되돌아왔고, 부토는 ‘순수한’ 일본의 어두운 이면이 가장 탁월하게 구현된 몸의 행위였다. 역설적이게도 그 결과는 집단적이고 통일된 문화적 정체성의 해체가 아니라 강화였다.
이불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타자로서의 여성과 신화 속의 유령은 본질적으로 저항의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작가는 남성적 (남근적)인
딱딱한 ‘조각’의 안티테제로 제시한 물컹물컹한 ‘소프트 스컬프처’를 몸 위에 덧입고,
끈적거리는 피와 따뜻한 핑크빗 살덩어리가 뒤엉킨 동물적 존재로서 도시를 누볐다. … 여성이
전복적인 주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스스로 타자화하는 것, 즉 ‘괴물’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갈망>, <수난
유감>등의 퍼포먼스에서 이불이 재현했던 육체는 …
<알리바이>는
틀림없이 미술가인 동시에 ‘동양 여성’으로서의 분열된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여성의 손으로 미술 창조라는 남성의 영역에 진입했으나, 여전히 성적이면서도 순종적인 동양 여인의 강한 상징이엇던 ‘나비
부인’의 유령을 떨칠 수 없었다. 미술이라는 고급문화 영역에
안착한 듯하지만, 그녀의 태생에는 이미 개발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불균형이 각인되어 있었다. … <알리바이>의 표면적
아름다움은 흔히 ‘동양 출신의 여성 미술가’에게 기대할 수
있는 미적 감수성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이자 예술가인 작가의 손들이 유령처럼 빛나는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위협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생명을 빼앗긴 나비가 알록달록한 장신구에 찔려 살을 파고든
모습은 불길하다. <알리바이>의 부드러운 표면과
화려한 장식은 틀림없이 작가의 여성적 감수성과 과거에 대한 사적인 기억을 품고 있지만, 동시에 여성성은
테크놀로지에 대한 불신과 폭력적인 섹슈얼리티의 공포, 그리고 그에 따른 죽음의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실리콘으로 보정된 인체는 ‘아름다움’을 달성했을지라도 아름다운 육체는 이미 유기체로서의 성질을 벗어나 무기물에 한층 다가선 셈이다. 이처럼 무기물에 가까운 과장된 여체는 육체적 욕망을 극도로 자극하고, 이는
곧이어 죽음을 부르는 공포로 이어진다.
사이보그는 머리가 없고 팔다리가 하나씩 잘린 실제 인물 크기의 여성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에 흔히 등장하는 소녀 로봇과 고대 그리스 여신상, 마네의 올랭피아에ㅔ 이르기까지 대중문화와 미술사에 등장하는 여체의 다양한 이미지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러나 이불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팝아트의 사명보다는 테크놀로지의 실패에 대한 불안감에 더 치중하는 듯하다. 마치 지난 세기의 <프랑켄슈타인>이 산업혁명과 기계 발달의 산물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났을 때 얼마나 끔찍한 괴물이 되는가를 섬뜩하게 시각화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