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토록 치밀하고 친밀한 적에 대하여 - 나를 잃어버리게 하는 가스라이팅의 모든 것
신고은 지음 / 샘터사 / 2022년 1월
평점 :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란 용어가 생기기 전에도 분명 그런 행위는 존재했을 것이다. 다만 일련의 행위들이 한 데 묶여 '가스라이팅'으로 불리면서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행위도 이름이 생기고, 사람들에게 불리면서부터 비로소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가스라이팅은 '상대방의 상황과 심리를 조작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을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행위'라고 한다. 정의만으로는 잘 와닿지 않을뿐더러 가스라이팅은 일상에서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기에 직관적으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는 가스라이팅의 모호한 개념을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 드라마, 영화 속의 다양한 사례들로 한 겹 한 겹 덧입혀 명료하게 해준다.
가스라이팅은 보통 연인, 가족, 친구 등 친밀한 관계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보니, 사랑, 관심, 조언의 겉모습을 하고 있어 알아채기가 어렵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많은 사례들을 읽다 보면 결국 내 경험과 겹치는 상황을 발견하게 되는데, 내가 피해자의 사례가 되기도 가해자의 사례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 충격으로 다가온다. 내가 가스라이팅을 당하는지도, 하는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서 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내가 정말 틀린 건지, 저 사람에 의해 '틀림을 당하고' 있는 건지, 우린 스스로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상황에서, 누가 100% 틀리고 누가 100% 맞는 상황은 있을 수 없다. 우린 모두 각자의 인생을 살아왔기에 다른 시각과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내가 틀렸다고만 주장한다면, 그리고 그게 반복된다면 내 감정과 의견은 없어지고 결국 나는 빈껍데기만 남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우에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나온 구절이다.
나 자신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기에,
나를 잃게 하는 것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심지어 가족이라도,
또 어떤 명분을 들고 있더라도,
허용할 수 없다는 단단한 신념을 쥐고 살아야겠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중요한 건 어떤 행위가 가스라이팅이냐, 아니냐의 기준이 아니라 '나를 나로서 살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내 삶의 주체가 당연히 나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어 있어서 그런 관계를 한 번에 끊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작은 시도부터 하라고 조언한다. 그 시도가 비겁하고 나약한 방법이라도, 관계를 끊어내는 시작이 될 수 있다면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고 용기를 준다. '인식'을 한다는 건 모든 문제 해결의 시초가 된다. 내가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변화의 시작에 서 있는 것이다.
가스라이팅이란 단어가 우리 사회에 떠오르면서 세상은 또 한 번 변할 거고, 앞으로 또 어떤 무명無名의 행위가 이름을 얻어 우리의 인식과 세상을 변화 시킬지 궁금해진다.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