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데라토 칸타빌레 문지 스펙트럼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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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침묵도 조각으로 삼는 글쓰기

모데라토 칸다빌레/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문학과지성사


2023.10.4


처음에 이 책을 읽었을 때 안 보이던 장면이 두 번째 읽었을 때 눈에 들어왔다. 이상한 일이다. 왜 두 사람의 떨림과 열기를 놓쳤을까? 처음엔 안과 쇼뱅의 대화를 경청하는 데에 실패했고, 두 번째 읽으며 퍼즐을 맞추면 읽었다. (마치 친하게 지낸 동기 둘이 사귄지 몇 달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눈치없이 끼어서 셋이 밥을 먹은 날들이 떠올라 미안해지는 기분이다. 돌아보니 두 사람의 뜬금없는 웃음이나 눈짓이 오가던 장면들이 떠오르는 것 말이다.)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안과 쇼뱅의 대화는 점차 겹겹이 쌓인다. 카페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목격한 안은 다음날 카페를 찾아가 떨리는 손으로 와인을 마시며 한 남자와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독자는 안이 이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려는 것으로 추측하지만, 진실은 그 너머에 있다. 안의 “거짓말”이 무엇이고, “속임수”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고 대화는 이어진다. 두 사람의 대화만 쫓다보면 이 소설은 이상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죽은 ‘그 여자’와 죽인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둥둥 떠있다. 안의 “죄지은 사람처럼 기어들어가는 변명조”(52쪽)처럼 편집증적인 두려움과 불안은 단순히 사건으로 인한 충격이라기엔 너무 과장되어 보인다. 결말부에 이르러 어느새 결판이 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안은 석양 속으로 사라진다. 


두 사람은 카페 손님은 물론, 독자조차 속인다. 아마도 내가 그 카페에 앉아있었다면, 둘의 미묘한 긴장감을 모르는 눈치없는 손님이었을 것이다. 빙빙도는 대화가 답답해서 “사모님, 제가 사건을 목격했는데요”라고 사건 목격 브리핑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안과 쇼뱅이 카페에서 일주일 간 대화를 나누는동안, 카페 여주인은 가장 이 사건의 전말을 잘 아는 사람임에도 끼어들지 않는다. 대화가 이어지도록 잔만 채워줄 뿐이다. 사건에 집중하던 독자도 그와 함께 그 정도의 위치에서 두 남녀의 대화를 엿들어야 한다. 이 소설이 살인사건의 전말을 뒤쫓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안이 묻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눈치가 빠른 독자가 서사를 읽는다. 대화는 언어일 뿐이고, 진실은 언어가 아니라 침묵이 만드는 맥락에 있다. 


뒤라스식 글쓰기는 ‘침묵의 글쓰기’라고 불린다. “무엇이 될지 결정하지 않은 채 흩어져 있는 요소들을 쌓아 올려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작업인 것처럼 보인다”, “균열과 빈틈과 침묵에서 무언가가 생겨날 수 있다고 말한다”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그 침묵으로 가득찬 작품이다. ‘그 여자’와 ‘그 남자’로 표상되는 암시로 뒤덮여있다. 숭숭 뚫린 구멍을 앞뒤 없이 늘어놓고, 그 조각을 몇 개는 버리고 몇 개는 골라서 맞추면, 이야기를 A로 만들 수도, B로 만들 수도 있다. (남는 퍼즐이 있고, 정확한 완성이 없다는 점에서 직소 퍼즐보다는 칠교놀이에 가깝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집’이다. <모데라토 칸타빌레>에는 세 공간이 나온다. 피아노 교사의 집, 부두 앞 카페, 안이 사는 저택이다. 이 중 저택은 배경으로 가장 짧게 등장하지만 안과 쇼뱅의 대화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뒤라스에게 ‘집’은 중요한 장소다. 뒤라스의 소설과 극본 속 여성들은 그 집에 산다. 집을 “불가사의한 장소”라고 할 정도인데,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집을 은신하는 장소로, 안도감을 찾아 오는 장소로 볼 수 있지요. 그런데 나는 이곳 역시 다른 곳을 향해 닫힌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전, 안도, 가족, 가정의 포근함 등, 우리가 아는 이 모든 것과는 다른 일도 일어나지요. 집에는 가족에 대한 혐오도, 도피 욕구, 자살의 안갖 심기도 새겨져 있어요. 그 모든 것이 집입니다.”


뒤라스에게 집은 닫힌 장소이며, 여자가 외부와 단절되어 고립되는 공간이다.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도 집은 여자(안)의 일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안은 카페에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동시에 저택의 복도와 방에 대해 설명한다. 2층 큰 창문으로 매일 밖을 내다보았다는 것, 매일같이 출퇴근하는 공장 노동자를 보고, 때론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나 늦은 시간 함께 걷는 연인들을 보았다. 창에서 밖을 보는 위치는 별다른 접촉이 없는 상태이고, 저택에서 안은 고립되어있다. 어느날 외출할 방법으로 아들의 피아노 레슨을 생각해냈고, 한달 간 매주 금요일마다 예인선 둑에서 피아노를 배운다. 그리고 근처 카페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안의 감정을 뒤흔든다. 집 밖에 나온 안은 그게 용기, 욕망 또는 죄책감이든 간에 더 역동적인 사람이 된다.


안을 보며 은희경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한 북토크에서 은희경은 “문학은 실패한 사람들의 서사이고, 왜 그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초기에 불륜소설만 쓴다는 평을 듣기도 했는데, 본인이 살아온 1970-80년대가 획일적이고 불합리한 허위의식이 가득했고, 가족제도에 대해 쓰다보니 가족제도에서 실패한 이들의 이야기가 불륜이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여성주인공을 내세워서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쓰고 싶었을 뿐이라고, 인간이 자유롭게 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다고 했다. 현 시스템 밖의 이야기이니 당연히 비도덕적으로 보이는 게 당연하다. 그 사람은 권위가 만든 도덕을 따르면 자유롭게 살 수 없으니까. 은희경의 말과 뒤라스 소설 속 인물들과 겹쳐 보였다. 


다만, ‘문학은 실패한 사람들의 서사’라는 말과 달리 이 작품 결말에 이르러 안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금지된 것을 욕망했으나, 안이 행복을 얻거나 처벌을 받지 않는다. 석양으로 걸어나갈 뒷문을 열어둔다. 그런데도 독자는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결말을 보며, 안이 자유로울 것이라 상상하긴 어렵다. 독자들은 반드시 둘의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어코 집 밖으로 나온 안은 실패했으리라 상상한다. 소설 밖의 독자는 자신의 언어를 조각 삼아 침묵을 채워넣어야 한다.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여자는 소설 밖의 세계와 조응한다. 금지된 것은 소설 밖의 세계의 권위에 의한 것이니. 독자가 가진 세계에 따라 이야기는 정해져있는 것도 같다. 뒤라스가 흘러가는 대로 썼듯이, 침묵의 조각은 읽는 사람이 흘러가는 대로, 그런데 이미 정해진 대로 완성할 몫이다.




참고


<뒤라스의 그곳들>, 마르그리트 뒤라스/미셸 포르트 지음, 백선희 옮김, 뮤진트리, 2023




*서평모임 @ 한겨레교육센터

2023.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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