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은 횃불이었다.
우리 사회의 감추어진 얼굴을 들추어낸 햇불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횃불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전태일을 옳게 읽고 있는가?"
저마다의 작은 욕망을 위해 읽고 있지는 않은가?
『전태일평전』은 우리가 전태일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지시한다.
우리는 그의 죽음보다 그의 삶을 먼저 읽어야 한다.
그의 삶 속에 점철되어 있는 고뇌와 사랑을 읽어야 한다.
이 평전의 필자인 조영래 변호사의 삶도 함께 읽어야 한다.
그리고 전태일을 우리들의 가슴속으로 옮겨와야 한다.
이것이 전태일을 밝은 얼굴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일이다.
- 신영복 (전 성공회대 석좌교수)
조영래
1947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법대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
6·7 부정선거 규탄, 3선개헌 반대 학생시위에 앞장서며,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졸업 후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시기에 전태일 분신항거를 접했다.
1971년 사법연수원에서 연수 중 공안당국이 조작한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돼 1년 6개월 투옥됐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6년 동안 수배 생활을 겪었다. 복권 후 1983년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 사회개혁가이자 인권변호사로서 몸을 돌보지않고 헌신적으로 활동하다가 1990년 12월 폐암으로 타계했다.
유고집으로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둘 수는 없습니다.》(창작과비평사, 1991),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까치, 1992) 등이있다.
2020년, 민주주의 발전 유공자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전태일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60년 남대문초등학교, 1963년 청옥고등공민학교를 잠시 다녔지만,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삼발이 장사, 신문팔이, 구두닦이, 손수레 뒤밀이 등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65년 가을 평화시장에 있던 삼일사에 ‘시다‘로 취직하면서 근로기준법조차 지켜지지 않는 평화시장의 참혹한 노동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1969년에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1970년에는‘삼동친목회‘를 조직, 청계천 일대의 노동실태를 조사하고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노동청에 제출하며 갖은 노력을다했다.
그러나 근로조건은 개선되지 않았고, 사업주의 횡포와 노동청(고용노동부의 전신) 등 당국의 멸시만 겪어야 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치르며,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치면서 분신 항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