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오늘의 좋은 시
박명용 외 지음 / 푸른사상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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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시를 읽었다. 소설과 자기 계발서들이 홍수를 이루는 요즘
시집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눈여겨 보지 않으면 어떤 시집이 새로
나왔는지 어떤 시인들이 어떤 시를 썼는지 흘려 넘기기 일쑤라 꼼꼼히
찾아봐야 알 수 있는 시절이 되었다. 이런 시절에 이런저런 핑계들로
읽고 싶었지만 책장 넘기기를 게을리 했던 시집을 비로소 꺼내들었다.

2007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시대와 삶을 보여주는 좋은 시들이
고스란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아가면서 시 한번 긁적여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린시절 나도 사춘기 감상에 젖어 제법 멋을
부려대며 시를 썼는데 지금 보자면 그건 시가 아니고 내 감정에 대한
암호의 나열이였다. 다른이들이 보고 이해와 공감을 얻는 것이 아닌
자기만족으로 나만 아는 의미를 담은 시.
예전에 시를 읽을 때는 어렵기만 했다. 내가 사춘시 시절 나만 이해하도록
쓴 시처럼 시구절은 상징과 비유의 화려한 문체를 자랑하며 주눅들게 했었다.
하지만 오늘의 시를 읽어보니 마음이 한결 푸근해진다. 소설책이 안 부럽다
서문의 말처럼 이념(주제) 보다는 방법(미학)이 돋보이는 요즘 시들은
다소 무거운 '사회적 상상력'의 제제 보다 자연에서 얻는 '생태적 상상력'과
경험과 생활의 모습을 시로 입혀서 친근하게 다가오고 있다.

국수 

늦은 점심으로 밀국수를 삶는다.

펄펄 끓는 물속에서
소면은 일직선의 각진 표정을 풀고
척척 늘어져 낭창낭창 살가운 것이
신혼 적 아내의 살결 같구나

한결 부드럽고 언해진 몸에
동그랗게 몸 포개고 있는
결연의 저, 하얀 순결들!

엉키지 않도록 휘휘 젓는다.
면발 담긴 멸치국물에 갖은 양념을 넣고
코 밑 거뭇해진 아들과 겸상을 한다.

친정 간 아내 지금쯤 화가 어지간히는 풀렸으리라
p121 - 이재무


'국수'라는 시를 읽고 한참 웃었다.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아버지와 나의 모습이다. 꼬장꼬장한 경상도 양반인 아버지는
엄마 홧병의 주된 원인이셨다. 인심좋고 바지런해 늘 동네 사람들에게
웃음을 얻던 엄마였지만 아버지에겐 잔소리의 근원이셨다. 솜씨 좋은 엄마는
손이 커서 음식을 하면 동네 사람들에게 모두 돌리며, 일도 억척스럽게
하셨지만 아버지는 그런 엄마에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는 커녕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면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잔소리를 늘어 놓으셨다. 참다 못한
어머니는 당시 버스도 뜸한 신작로로 가방하나 들고 훌쩍 집을 나서신뒤
한 일주일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지셨다. (나중에 외갓집에 가신걸 알았다)
어머니가 이렇게 보이지 않는 날이면 늦도록 신작로에서 기다리다 동구밖을
몇번이나 나가보던 아버지는 슬그머니 집에 와서 국수를 삶으셨다.
아버지가 삶으신 배꽃같은 하얀 국수를 먹던 우리는 엄마가 어디갔냐고
짐짓 알면서도 아버지에게 물어댔고 아버지는 헛기침을 한참 하셨다. 여드름
막 나기 시작하던 때였으니 시절이 되긴 된 얘기다. 국수를 후루룩 거리며
외갓집 간 엄마를 기다리던 그때. 아버지 심정이 이제야 헤아려 진다면 말이 될려나.
공감도 쉽고 내모습도 들여다보게 만드는 오늘의 시와 함께 한 시간은 잔잔한
즐거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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