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적 지식인의 과거와 현재

유기적 지식인이란
“지식인은 자립적이고도 독립적인 사회집단인가, 아니면 모든 사회집단이 그 자신의 특수한 전문화된 지식인 범주를 지니는가?”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자신의 『옥중수고』의 첫 페이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가 옥중에서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 1929년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전체가 세계대공황(1929~33)과 전체주의 등장이라는 암흑기에 접어들던 때였습니다. 그람시는 ‘지식인’이라는 비판이론가들이 당대 자본주의하에서 새롭게 등장한 부류임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지식인이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밝히고자 했고 결국 유명한 ‘유기적 지식인’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렇다면 유기적 지식인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이번에도 그람시의 말을 빌려보겠습니다. “호모 파베르는 호모 사피엔스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결국 모든 사람은 그의 직업적 활동 이외의 부분에서도 어떠한 형태로든지 지적인 활동을 한다. 즉 그는 ‘철학자’이며 예술가이고 멋을 아는 사람이며 (…) 새로운 사고방식을 창출하는 데 기여한다.”(『그람시의 옥중수고 2』, 이상훈 옮김, 거름출판사 2007 中)

현대의 유기적 지식인에 대한 고찰
토머스 맥러플린의 『거리의 지혜와 비판이론』은 “현대의 그람시가 쓴 현대의 유기적 지식인론”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 맥러플린의 주장은, 한마디로 학술이론가가 토착이론가(생활 속에서 지혜를 터득한 사람)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기적 지식인은 학술이론가일 수도 있고, 토착이론가일 수도 있으면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토착이론은 ‘생활 속의 지혜’ ‘몸에 밴 지식’ ‘현장의 목소리’ 등으로 개념지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단지 학계의 지식인들만 각종 문화 현상과 이념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TV 시트콤 시청자, 아이돌그룹의 팬들, 노동운동가, 교사 등 일반인들도 이미 그렇게 해왔다는 뜻입니다.
맥러플린은 토착이론에 대한 여러 허위─토착이론은 몽상이며 비현실적이라는 통념─들을 예민하게 감지해서 선보입니다. 그는 미국 남부 개신교의 반(反)포르노그래피 운동, 동호회 잡지의 비평, 뉴에이지의 서사, 광고업계의 기술, 총체적 언어교육(whole-language movement) 등에 주목하고 특히 학교교육에서도 토착이론의 다양한 사례들을 적용하여 학생들이 자유롭고 즐겁게 수업에 참여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2013년 한국사회의 토착이론은 무엇인가
일반시민 즉, 토착이론가는 매일매일 직장, 가정, 대중문화의 여러 현상들을 그저 받아들이기보다 그 이면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주변에서 토착이론가들을 찾아볼 필요도 있겠네요. 제가 보기에 프로컨슈머(똑똑한 소비자)라고 불리는 파워블로거들도 여기에 해당될 수 있겠고요. ‘힐링’ ‘멘토’를 주제로 삼아 열심히 자신을 되돌아보려는 사람들도, 대안교육 등을 통해 현재 교육체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이에 속할 것 같습니다. 또 누가 있을까요?
중요한 건 토착이론가들이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의 관계 속에서 어떤 유기적 역할을 해낼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똑똑한 한 사람이 진정 사회에 공헌하려면 그 자신이 단순히 윤똑똑이로서 자신을 돋보이게끔 드러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입니다. 이는 다시 안토니오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론으로 연결됩니다. 그람시의 말처럼, 유기적 지식인은 곧 국가 등의 억압적 헤게모니에 대항하는 데에서 존재의 의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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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세기 후반 영국의 대표적 문예비평가이자 사회주의 이론가인 레이먼드 윌리엄즈(Raymond Williams)의 Keyword: A Vocabulary of Culture and Society(1976, 1983)를 옮긴 책이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저명한 문예비평가의 사회과학 용어사전’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 책의 범주를 요즘 유행하는 용어사전으로만 한정할 순 없다. 저자 개인의 지적 편린이 뭍어나는 사전류로 치부하기에, 영국 사회주의 전통을 기반으로 20세기 전후반에 걸친 개념형성사를 집대성한 이 책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들기 때문이다. 저자에 대한 이러한 편애에 가까운 마음을 길게 설명하기보다 아래의 문제를 한번 풀어봄으로써 그 차이를 분명히 해보고자 한다.

다음의 ‘이것’이 가리키는 말은 무엇일까. “이것은 ‘보존력 있는’이라는 일반적 의미에서 14세기부터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정치적인 용례로 사용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1830년에 크로커의 ‘소위 토리당이라 불리지만 보수당이란 말이 더 적합한 정당’이라는 용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이 책, 371면)

다들 어렵지 않게 ‘conservative’가 정답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 하나를 더 풀어보자. “지금도 이것은 단순히 ‘conservative'의 반대어로, 즉 변화를 지지하는 자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가장 일반적인 개량이라는 의미에서, 거의 모든 당파가 자신의 제안들에 이 형용사를 갖다붙인다. 예를 들어 ’진보적이지만 사회주의적이지는 않은 정당‘이라든지 ’보수주의는 질서있는 진보를 말한다. 우리야말로 진짜 진보적인 당이다‘라는 용례가 있다.”(이 책, 373~74면)

정답은 무엇일까. 바로 ‘progressive’다. 이 두개의 개념 해설에서 개념사가로서의 전문성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그보다 오히려 레이먼드 윌리엄즈가 “일반적이고 다양하며 모호한 의미를 띤” 일상어들을 주로 다루고자 하는 독특한 학자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지향하는 개념사의 방향은 무엇일까. 다음의 이야기에 귀기울여보자.

“단어마다 그 어원상 의미는 모두 흥미롭다. 그런데 많은 경우 더 흥미로운 것은 종종 이후의 의미변화다. 통속적인 오용과 관련해 신문에 등장하는 불평들이란 대개 최근에 그 의미가 변화된 단어들을 향하고 있다. (…) 어휘는 배워야 할 ‘전통’이 아닐뿐더러 당연히 수락해야 할 ‘공통이해’도 아니며, ‘우리의 언어’이기 때문에 당연한 권위를 갖는 일련의 의미도 아니다.”(이 책, 30~36면)

즉 레이먼드 윌리엄즈에게 개념사란 시대의 변화를 바로 파악하여 시시각각 변화해가는 학문이다. 저 위의 문제들에서 각 용어들의 초기 어원이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리라. 중요한 것은 현재 그 말이 어떻게 쓰이고 있느냐의 문제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저명한 문예비평가였던 그가 어떤 이유로 개념사에 발을 담그게 되었을까. (실제로 이 책은 애초에 그의 『문화와 사회』에 주로 등장하는 용어를 해설하는 부록의 차원에서 집필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선별한 키워드가 “자본주의 사회의 헤게모니 관철을 위한 문화적 도구임을 간파”(나인호 『개념사란 무엇인가』, 역사비평사 2011)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개념사는 결국 정치를 지향하는 연구의 일환이며 자신의 문화연구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언어는 이처럼 그 뿌리가 중요하지 않은 덕분에 매일매일 새롭게 그 의미를 형성해간다. (정작 그래도 되는지는 언어를 다루는 직업을 가진 나로서는 불안하게 느껴지지만, 인터넷을 들여다 보면 볼수록 어휘는 매일 아침 새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게 틀림없다.) 이 책의 서문의 한 구절은 그 점에서 곱씹어볼 만하다. “그것(어휘)은 사용되기 위한 어휘이며 우리의 생각을 반영할 수 있는 어휘인 동시에 우리가 각자의 언어와 역사를 구축해갈 때 바뀌어야 한다고 여길 경우 바꿔야 하는 어휘인 것이다.”(이 책, 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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