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나에게 진리 속에서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하에서만 가능일이다. 우리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게 되며, 우리가 하는 것의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사비나는 작가가 자신의 모든 은밀한 삶, 또한 친구들의 그것까지 까발리는 문학을 경멸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도괴물인 것이다. 그래서 사비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춰야만 한다는것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진리 속에서〉 사는유일한 방법이었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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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에게 음악은 도취를 위해 창안된 디오니소스적 아름다움에 가장 근접한 예술이다. 소설이나 그림을 통해서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도취하기는 어렵지만 베토벤의 9번 교향곡, 바르토크의 두 개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 비틀즈의 노래를 들으면 취할 수 있다. 프란츠는 위대한 음악과 가벼운 음악을구별하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는 이러한 구별은 위선적이며 케케묵은 장난이었다. 그는 로큰롤과 모차르트를 똑같이 좋아했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은 해방을 뜻했다. 음악은 그를 고독과 유폐, 도서관의 먼지로부터 해방시키며 육체의 문을 열어 그를 통해 영혼이 빠져나와 타인과 교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춤추는 것을 좋아했고 사비나가 그와 더불어 이러한 춤에대한 열정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들은 함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리드미컬한 소란스런 음악이 그들의 식사에 곁들여졌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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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불면증을 앓고 있으며 누가 곁에 있으면 도무지 잠을 이룰수 없기 때문에 자정 이후에는 여자를 집으로 바래다줘야 한다고설명해야만 했다.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속내 사정은 그의설명보다 훨씬 복잡했고 그것을 여자 친구들에게 감히 고백할 수없었다. 그는 정사를 마친 직후 혼자 있고 싶다는 억누를 수 없는욕구를 느꼈던 것이다. 한밤중에 잠이 깨었을 때 옆자리에 낯선존재가 있다는 것이 불쾌했다. 부부가 함께 아침에 일어난다는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고, 욕실에서 내는 그의 칫솔질 소리가누군가의 귀에까지 전해지는 것이 싫었으며, 두 사람만의 다정한식사가 아쉽지도 않았다.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테레사가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을 보고 그토록 기겁을 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는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난밤을 돌이켜 생각했고 그가 알지 못했던 행복의 향기를 느꼈다고믿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 모두 잠까지 함께 잘 수 있다는 사실에 즐거워했다. 나는 그들이 정사를 나누는 목적은 관능성에 있지 않고 그 뒤에 이어지는 잠에 있었노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테레사는 그가 없으면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혼자만 원룸 아파트에 있을 경우(그것은 점차 하나의 구실에 불과했는데) 밤새 한잠도 자지못했지만 토마스의 품안에서는 불안의 극치에서도 언제나 차분해지곤 했다. 토마스는 그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그녀만을 위해 꾸며낸 옛날 이야기를 해주거나 위로의 말, 혹은 유머를 단조로운어투로 되풀이하곤 했다. 이러한 말들은 테레사의 머릿속에서 흐릿한 영상으로 변했다가 이내 그녀를 첫 꿈으로 인도하곤 했다.
그는 그녀의 잠에 대해 절대적 권력을 행사했고, 그녀는 토마스가 원하는 순간에 잠들어 버렸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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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는 비슷한 나이에 실연의 상처를 경험했다. 둘 다 열아홉에서 스무 살 무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은 매우 달랐다. 당연히 충격에서 벗어나려는 둘의 노력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원장》에 따르면 스콧 피츠제럴드가 ‘기네브라 킹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것은 열네 살 때였다. 그러고 나서 18개월 뒤인 1913년 1월 그는 다시 그 이름을 접하게 된다. 그가 그녀를 만나기까지는 2년이 더 걸렸지만, 그동안 그이름은 미국 귀족사회에 대한 동경과 함께 그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울려퍼졌다. 기네브라‘ 라는 이탈리아풍 이름에서는 세련미가 물씬 풍겼다. 실제로그녀는 동화 속에서처럼 구애자 가운데 최고의 남성만이 차지할 수 있는 왕의딸이었다.

기네브라는 시카고의 최상류층만 모여 사는 고급 주택가 레이크포리스트 출신이었다. 당연히 그녀의 집안도 시카고의 쟁쟁한 가문들과 나란히 어깨를 계루었다. 그녀의 아버지 찰스 킹은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의 톰 뷰캐넌처럼 성공한 은행가로, 폴로 경주마를 몇 마리씩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부자였다. 기네브라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데 자신의 배경에 기댈 필요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미모와 총명함으로 연애전선에서 이름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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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돌아온 후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후유증 때문에 하는 일 없이 공상에 빠져 지냈다. 그의 양친은 아들의 군 복무를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전쟁이 2년 넘게 지속된 데다 아들이 계속해서 빈둥거리자 슬슬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어니스트는 그레이스 코티지를 짓느라 돈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대학에 갈 수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마셀린은 오벌린 대학에 진학했고, 그도 원했다면 얼마든지 대학에 갈 수 있었다. 사실 그는 작가가 되고 싶어했고, 따라서 대학 진학이나 취직은 그의 계획에 부합하지않았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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