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 아버지가 충고를 한마디 했는데 아직도 그 말이 기억난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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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그렇게 메인 주를 떠난뒤로 단 한 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뉴욕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나는 아직도 이 도시의 무한한힘, 자만심, 타인에게 무관심한 분위기 등이 좋았고, 정신없는 속도감이 썩 마음에 들었다.

파크애비뉴에서 길을 건너다가 마치 로키산맥처럼 늘어선 빌딩들을 둘러보았다. 햄슬리빌딩에 걸린 크리스마스 십자가는 이 야망의광장에서 승리한 사람들을 조용히 축복해주고 있었다. 나는 파크애비뉴에서 바라보는 뉴욕의 거리 풍경을 좋아했다. ‘마침내 내가 바라던곳에 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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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내가 가진 돈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의 ‘증명‘
입니다. 아직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유용하게, 잘 써서 아주 근사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당장 다음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일용할 양식‘이 충분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먹고 죽을 돈도 없는 사람에게 뭔가를 바라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돈으로 주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식사 대접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기꺼이 나와 식사를 하고픈 사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최고의 인사를 들을 수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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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뉴욕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생기 넘치고 모험 가득한 밤 분위기 그리고 끊임없이 깜박이는 남녀와 기계의 네온사인이 들떠있는 눈동자에 만족감을 안겨준다. 나는 5번가를 걸어 올라가 군중 속에서 낭만적인 여자들을 골라내 몇 분 동안 그들의 생활 속에 들어가는 상상을 하며 즐겼다.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 채거나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때로는 마음속으로 감춰진 길모퉁이에 있는 아파트까지그 여자들을 따라가 그들이 문을 열고 따뜻한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전에 돌아서서 나를 향해 미소 짓는 모습을 혼자 상상해 보기도 했다. 매혹적인 대도시의 황혼녘에 때때로 나는 떨쳐버리기 힘든 고독감을 느꼈고 다른 사람들 식당에서 외롭게 맞이하는 저녁식사 시간을 기다리면서 쇼윈도 앞에서 서성이는 가난한 젊은 사무원들, 밤과 삶의 가장 자극적인 순간을 컴컴한 데서 낭비하는 젊은 사무원들 한테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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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 어머니는 내게 말했다.
"내 말 잘 들어. 이 드넓은 세상에서 네 꿈을 방해할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어. 바로 너 자신……."
나는 목표를 크게 잡고 보우딘대학교에 지원했다. 보우딘대학교는브런즈윅 해군기지에서 2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명문예술 대학교였다. 브런즈윅에서 자랐으므로 보우딘대학교를 동경해왔지만 오르지 못할 나무쯤으로 여겨왔었다.
1983년 봄, 보우딘대학교에서 편지가 왔다. 나는 편지를 아버지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11
"제가 입학 대기자 명단에 들어갔대요."
SNL 이아버지는 내 목소리에서 실망한 기색을 느꼈을 것이다.
"보우딘대학교의 입학대기자 명단에 들어간 것만 해도 그리 나쁘진않잖아?"
"입학허가를 받은 건 아니잖아요. 챌리너 선생님이 말하기를……."
"챌리너 선생이 누구냐?"
"입학 상담 교사요. 챌리너 선생님은 제가 학자금 원조를 받지 않아도 됐다면 입학허가를 받았을 거라고 했어요." 1 EK나는 그 말을 하자마자 곧 후회했다. 아버지는 느닷없이 고환을 차인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신조는 ‘절제, 집중, 자긍심‘ 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자기방어적인 자긍심에 구멍을 냈고, 아들에게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믿어온 아버지의 신념에 금이 가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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