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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한다는 착각 - 나는 왜 어떤 것은 기억하고 어떤 것은 잊어버릴까
차란 란가나스 지음, 김승욱 옮김 / 김영사 / 2025년 3월
평점 :

한 번 본 것이나 경험한 것은 잊어버리지 않고 전부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한 적이 없다는 사람들은 학창 시절 영어 단어나 수학 공식 등을 암기했을 때를 떠올려보면 수긍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무언가를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인류는 기억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한 연구와 노력을 아끼지 않아 왔다.
망각 속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왜 자꾸 잊어버리는 걸까?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차란 란가나스는 기억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고 있다. 저자는 '왜 자꾸 잊어버리는가?'를 묻지 말고 "왜 기억하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고자 하면 무엇이든 기억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우리의 뇌는 변화하는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게 기억을 잊어버리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뇌는 필요한 정보를 신속히 활용할 수 있도록 기억의 중요도에 따라 우선순위를 매기기 때문에 기억은 변형되기 쉽고 때로는 부정확하며 망각을 통해 불필요한 정보는 정리하고 중요한 정보만을 기억에 남겨둔다.
우리의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뇌의 측두엽에 위치한 '해마'라는 부분이다. 해마는 기억과 학습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새로운 정보를 저장하고 오래된 기억을 회상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어떤 학자들은 해마는 만능 기억장치이며 기억을 의미기억(지식)과 일화기억(일상, 사건)으로 구분한 엔델 툴빙 교수의 연구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파라네 바가-카뎀 박사는 해마에 국한된 손상을 입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툴빙 교수의 연구가 옳았음을 밝혀낸다. 그는 해마가 손상된 사람들은 일화기억이 거의 없는 반면 해마가 온전한 사람에 비해 속도는 좀 느렸지만 학습을 통해 의미기억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그 후 저자는 기억 실험을 통해 해마가 일어난 일이 아닌 어떤 일이 일어난 시기와 장소를 기준으로 여러 사건에 대한 기억을 '색인'으로 정리해 주게 한다는 연구 결과를 얻는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 중 하나는 기억 변형 가능성에 대한 연구였다.
누구나 한 번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바꾸면 그것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현재가 누구도 예상 못 한 방향으로 바뀌어버리는 내용의 영화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영화처럼 우리가 과거 사건을 회상할 때 비슷한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이미 벌어진 과거 사건과 현재를 바꾼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때 새로운 요소를 첨가하면 자신이 인식하는 과거의 기억이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면 뇌는 실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바꾼 것과 거의 똑같이 받아들이게 된다고 한다.
저자는 그 예로 실제로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고 수많은 알리바이가 그가 살인자가 될 수 없음을 가리켰지만 경찰 심문 과정에서 담당 형사들에 의해 강제 주입된 정보에 의한 기억의 왜곡으로 범행을 자백했던 리처드 아이븐스 사건을 들었다. 아이븐스는 강제된 정보에 의해 부실하기 짝이 없는 살인 자백을 한 것을 시작으로 진술을 거듭함에 따라 여전히 범죄의 핵심적인 정황과 모순되지만 점점 그럴싸한 형태를 갖춘 짜 맞춰진 자백을 했다. 그리하여 결국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살인사건의 범인이 되어 속전속결로 교수형을 당하고 만다.
이처럼 사람은 특정 기억에 반복적으로 접근하다 보면 현재의 정보가 함께 따라가 미묘하게 기억이 갱신되거나 아이븐스의 경우처럼 엄청나게 바뀌어 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를 두고 한 학자는 회상을 '상상력이 가미된 재구축'이라 표현했다.

이외에 이 책은 친숙함이 기억의 존재를 암시할 수 있는 점, 예측 오류 즉 뇌에서 작동된 어떤 사이클에 기억이 미처 예측하지 못한 뜻밖의 상황으로 우리를 유도하는 점, 건망증, 기억과 탐구 간의 순환적 관계, 기억 억압 등 기억에 관한 뇌 연구를 단순히 학문적 접근으로만 풀어 나가지 않고 그것을 실제 있었던 다양한 사건이나 연구 결과와 유기적으로 보여주며 흥미롭게 풀어나가고 있다.
그리하여 저자는 종국에는 기억과 뇌에 대한 통찰을 통해 과거와 현재 우리의 삶을 좀 더 근원적으로 들여다보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진정한 이해로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현실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은 기억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시켜주는 동시에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의 우리가 과거의 기억을 통해 불확실하고 불안한 미래에 대비해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 그 길을 보여주는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