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등여행기 - 도쿄에서 파리까지
하야시 후미코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기차를 타고 유럽으로 떠나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온 이야기.

작가는 작품 『방랑자』의 큰 성공으로 얻은 인세를 모아 여행길에 오른다. 떠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성정. 1930년대, 세상이 대공황에 몸살을 앓으며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치달아가던 그 시절, 동아시아의 기혼 여성이 머나먼 유럽까지 혼자서 여행을 한다니, 21세기인 지금에도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제목이 『삼등여행기』이긴 하지만, 당연히 여행 경비에 대한 속사정은 있을거라 생각했다. 여행지에서 비용을 아끼려 노력하는 건 당연한 것이고, 본국에선 뭔가 빵빵한 재력이나 뒷배경이 있겠지, 라고.

페이지가 넘어갈 수록, 내가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인세가 전부이며, 프랑스의 비싼 교통비를 일컬어 "정말이지 길에 비료를 뿌리는 기분이라 견딜 수가 없다"고 말하는 부분에선 웃음이 터져나왔다. 


작가는 이동 경비를 아끼기 위해 파리의 가난한 동네에 허름한 셋방을 빌려 장기 체류를 한다. 어딜 가건 한 달씩은 머문다. 나도 여행을 해 봐서 안다, 이동하지 않고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것이 돈을 아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야시 후미코는 근근히 글을 써 잡지에 기고하며, 원고료를 송금받아 여행 경비에 보태고, 돈이 없을 땐 소중하게 간직하던 기모노를 전당포에 맡기고, 넝마장수에게 시계를 팔아 돈을 마련하고, 노래를 부르며 멀어지는 넝마장수를 보며 "정말이지 세계 어디를 가나 넝마장수는 참 자상합니다. 외치는 소리마저 일본의 넝마장수와 닮았답니다."라며 향수를 느끼기도 한다. 


사실 이 글이 쓰인 것이 1930년대 초반이기 때문에, 대공황과 맞물려 일본의 군국주의가 한창 무르익어가고, 한국은 조선의 식민지배에 시달리던 때였으며, 책의 초반부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을 지나는 부분에선, 갓 시작된 일본의 중국 침략 전쟁 때문에 치안을 걱정하는 내용이 나와 어떤 우익사상의 흔적이나, 한국인이 읽기에 거북한 내용이 나오면 어쩌나 싶어 걱정이 되었다. 

 우려와는 달리 하야시 후미코는 상당히 개혁적 성향을 가진 모양으로, 파리에서 열린 공산당 집회에 참가하기도 하며, 특권자와 프롤레타리아의 괴리에 대해 망설임없이 비판을 하기도 한다.

 비록 어눌한 러시아어로 더듬더듬 소통하는 수준이었지만, 그녀가 본 삼등열차의 가난하고 정 많은 러시아 사람들에게 금세 동화되고, 여행에서 만난 인종 중에 러시아 사람이 최고였다고 말하기도 하고, 직업소개소의 끝없이 긴 줄을 보며 "전 세계가 굶주리고 있는 느낌"이라며, 런던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데모에 참여하고 나서 "대관절 누굴 위해 배를 주리고 저 긴 줄을 이루는 걸까요?"라며 안타까워 하기도 한다. "네, 나라며 돈이며 인민을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XX들은 어떻게든 안 되는 걸까요?"라고 일갈하기도 한다.

처음부터 한결같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시선이 맞춰져있고, 그들에게 공감하고 있다. 

 또 여행길에 마주친 조선인에 대한 일화도 소개되었는데, 일어로 말을 걸어온 조선인 청년이 매우 반가웠던 모양으로, 다행히 크게 거슬리는 내용은 나타나지 않았다.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책 속에는 도쿄에서 파리까지, 그리고 마르세이유에서 고베까지 여행경비를 시시콜콜하게 기록한 내용도 실려있다. "여종업원 팁(기분이 좋아 많이 줌)"이라던가, "베개 하나, 담요 한 장의 임대료(이 값이라면 하얼빈에서 담요 한 장을 더 샀을 텐데)"처럼 추가 경비에 대해 투덜거리거나 변명하는 모습도 담겨있어 읽어내려가다 보면 웃음이 터진다.  


 여행은 확실히 사람을 크게 만든다. 책의 초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의 가난한 사람들과 동거동락하며 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백인종에 대한 신기함,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 혹은 안타까움, 험한 육체노동을 하는 여성에 대한 신선한 충격등이 주를 이루고, 파리에 도착해서도 대체로 "신기하다"는 식의 반응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파리와 런던을 오가면서는 유럽의 외식문화 - 식료품점에서 간단히 장을 보거나 남편이 귀가할 시간에 가족들이 나가서 식사를 하고 들어오는-와 일본의 가정식 문화를 비교하며, 하루 온 종일 주방에 메여사는 일본 주부들을 안타까워 하기도 하고, 사방에서 키스를 나누는 파리의 풍경이 아직은 조금 부끄럽다고 고백하는 등, 파리와 런던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관찰한 느낌을 좀 더 세밀하게 적기도 하고, 그에 대한 반응도 마냥 신기해 하는 것을 넘어 받아들이는 폭이 좀 더 넓어졌다는 느낌을 준다. 귀국길에 지중해와 홍해를 거쳐 항해하는 길에는 삼등열차를 타고 가던 당시와는 다른 사람이 말 하는 것 같은 여유와 포용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가지 아쉽다면, 돈 이야기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데도 당시 물가를 짐작할 정보가 전혀 없다는 것. 당시 1엔이 현재 어느 정도의 구매력이 있는지 역주 하나만 달아줬어도 좋지 않았을까.


여행기는 언제 읽어도 즐겁다. 하지만 뻔한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글도 많다. 오랜만에 즐겁고 따뜻한 여행기를 읽어 기분이 좋다. 

그 시절이나 21세기의 지금이나, 여행자의 고생 포인트는 똑같다. 돈 걱정과 지난한 이동에 시달리는 고생. 

1930년대 초의 동아시아인 기혼 여성이 혼자서 유럽까지 와 여행을 즐기다 귀국한 이야기라니, 더욱더 즐거울 수 밖에. 

"어쨌든 돈이 많은 사람이니까 그 시절에 유럽 여행 씩이나 했겠지"라던 나의 삐딱한 생각은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 싹 사라졌고, 책장 구석구석 뭍어있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공감이 가장 많이 기억에 남는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무산자의 모습이란 아무리 인종이 다르다고 해도 보통 단벌 신사로 조선에서 파리까지 다들 같은 풍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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