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eBook]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 입니다
강용자 지음, 김정희 엮음 / 지식공작소 / 2013년 8월
평점 :
"열여섯 살 때 한일간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되어
평생 두 개의 조국을 섬겨야 했던 운명의 여인"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세삼 더오른다. 찬란하고 영광스러웠던 기록의 그늘에 가려져 역사의 희생양이 되어 힘겹게 살아온 이들의 아픈 삶의 흔적들은 지워지곤 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인 이방자 여사(나시모토미야 마사코)의 삶이 꼭 그런 것 같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힘들고 고단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본에서 볼모로 살아야 했던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그의 아내인 일본 왕족 나시모토미야 마사코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듯 하다. 이 책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는 일본 왕족이지만 대한제국의 황태자비가 되어 두개의 조국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던 나시모토미야 마사코 여사의 이야기다. 회고록 형식으로 쓰여졌다. 그녀가 직접 진술한 내용의 기록인지, 아니면 단지 저자가 그런 형식으로 쓴 책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마치 마사코여사의 증언을 듣는 듯 생생하게 당시 상황과 고민을 읽을 수 있었다.
저자는 대한제국 말기의 어지러운 정세와 이은 황태자가 일본에 끌려간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대한제국 말기는 격량의 소용돌이였다. 1863년 열강의 각축 속에 대원군은 고종을 즉위시켜 정권을 잡았다. 외세 침략의 틈바구니에서 민비와 대원군은 정치권력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한다. 결국 고종은 러시아공관으로 피난을 갔고, 이를 도운 엄 상궁은 승은을 입어 귀비가 되었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 황제에 즉위하고, 아관파천에서 돌아온 지 8일 만인 10월 20일, 엄 귀빈의 아들 이은이 덕수궁에서 태어난다. 고종은 후사가 없던 순종의 후계자로 이은을 영왕에 책봉했다. 마지막 황태자 이은은 7년 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볼모로 일본에 끌려간다. 그때 열한살 이었다." _ 머리말. 중에서...
고종 황제가 헤이그밀사사건으로 첫째아들 순종에게 왕좌를 넘겨주고 가장 사랑했던 셋째아들 이은을 인질로 일본에 보내게 된다. 일본에 끌려온 이은은 정혼녀가 있었음에도 대한제국과 일본의 유대를 굳건히 한다는 명분으로 일본 왕족과 결혼을 강요당하게 된다. 더욱이 순종이 제위 19년만인 1926년 세상을 떠나고 이은이 다음 왕위를 물려받지만 이름만 조선의 왕일 뿐 일본군의 장교로서 삶을 살아야만 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구한말의 무능력한 왕권과 정치인들을 탓하면서도, 그들이 당한 모욕적 삶의 이야기를 접할때면 당시 우리민족이 격은 고초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사실 역사적으로는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조약'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지만, 이 책에서는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즉위한 영왕(이은)을 대한제국의 왕으로서 칭하고 있다. 대한제국의 연대기를 논하고자 한 것이 아니니 그대로 받아드려도 좋을 듯 하다.)
일본의 왕족으로서 대한제국 왕족 사람이 되어야 했던 고단하고 힘든 운명속에서도 평생 한 남자의 여인으로서 희생하며 살고자 했던 마사코의 개인적 삶 뿐만아니라 그녀의 눈에 비친 멸망한 한 나라의 왕실의 삶을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 어려움 만큼은 어느정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관동대지진'이후 일본 내부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이른바 '조선인 사냥'을 저지르는 일본으로 인해 격는 그녀의 고뇌를 통해서 더욱 절실히 와 닿았다.
"나는 전하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나도 일본인이므로 이 모든 일이 내 잘못인 듯 죄책감으로 몸이 죄어드는 듯 했다. 전하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전하와 나는 나라나 피를 초월한 애정과 이해로 굳게 맺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생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깊은 도랑이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나의 결혼 생활 중 여러 번 겪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입장은 참으로 괴로운 것이었다. 일본은 나의 친정, 조선은 나의 시댁이다. 어느 곳도 공개적으로 편들거나, 비난하거나 할 수 없는 처지인 나는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이 나 자신의 운명만을 슬퍼하며 혼자서 숨이 막히도록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 것이다." _ p128
일본이 패망하고 왕족이 몰락함에 따라 영왕과 마사코는 일본에도 속하지 못하고 고국인 조선에도 속하지 못하는 물에뜬 기름과 같은 신세가 되어버린다. 더욱이 1947년 왕족들은 신적강하(臣籍降下)를 당하면서 왕족의 특권을 잃고 평민이 됨으로서 생계마저 어려움을 받아야 했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영왕과 같은 종친이면서도 오히려 영왕을 경계하여 그의 귀국을 거부한다. 6.25가 지나고 박정희장군이 대통령이 되고서야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던 왕족들의 귀국이 받아들여 지지만 영왕은 이미 거동조차 힘들 정도로 쇠약해졌다. 나라를 잃고 자신과는 무관하게 일본행을 강요당했고, 일본에서 살았다는 이유로 해방 후 친일한 매국노로 손가락질 받아야 했던 그들의 안타까운 이야기에 가슴이 무거워졌다. 물론 다른 여러가지 이유로 무능한 왕족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여지도 있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 시대 상황에 비추어보면 그들은 분명 역사의 희생자임에 분명하다.
이 책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인물도 있지만 가장 눈에 띈 인물이 덕혜옹주다. 고종의 고명딸로 태어나서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가고 일본인과 원치않는 결혼까지 해야했던 덕혜옹주를 일본에서 가장 가까이 보살피고 살폈던 인물이 영왕과 마사코 여사라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가혹한 운명과 힘든 타지생활로 정신병을 앓아야 했던 비운의 공주에 대한 많은 증언을 읽을 수 있었다. 요즘 소설 [덕혜옹주]로 유명세를 타고있는 그녀가 제정신으로는 이겨낼 수 없을만큼 힘든 생활을 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패망해가는 조선왕실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왕족이라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일본이라는 폭군에게 난도질 당해야 했던 그들의 삶이 안타까웠다. 그들 역시 누군가의 부모이고 자녀였을 것이고, 꿈과 욕망을 가진 그저 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누구하나 힘들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을까? 어쩌면 왕족들의 이런 시련들을 그저 배부른 투정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무너진 삶이 무너진 우리나라를 그대로 비추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