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 박람강기 프로젝트 11
사라 파레츠키 지음, 김원희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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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범죄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하나같이 팜므파탈 아니면, 살해당하는 피해자일까?


사라 파레츠키가 이런 의문을 가진 건 열아홉 살 무렵의 일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빅슬립>을 읽고 기함했다는군요. <빅슬립>에서 카멘 스턴우드는 주변의 남자들을 성적인 유혹으로 부패시키는 팜므파탈로 등장하지요.


“범죄소설에서는 여성들이 범죄를 사주하려고 자기 몸을 이용했어요. 아니면 피해자였죠. 사악하지 않은 여성은 누군가의 가르침이 없으면 신발 끈조차 묶을 수 없는 캐릭터로 등장하더군요. 이 모든 요소를 사용한 최초의 책은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였습니다. 성적인 매력을 이용해 남자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범죄를 저지르게 했던 브리지드 오쇼네지는 범죄소설에서 모든 여성 캐릭터의 모델처럼 되었지요.”


사라 파레츠키는 레이먼드 챈들러와 대실 해밋의 여성 묘사에 화가 나서, 소설과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범죄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파레츠키가 이야기를 구상한 시점부터 첫 번째 소설을 쓸 때까지는 대략 8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는데, 그 기간 동안 보험 마케팅 매니저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고 합니다.


여성을 향한 끔찍한 폭력, 여성에게 고통을 주려는 욕망을 자각하며 싸워야 하는 캐릭터, 세상과 단절되었다고 느끼던 여성들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립탐정 V. I. 워쇼스키가 태어난 것은 1982년입니다. 몇 년 후 한국에서는 <여형사 워쇼스키>라는 제목으로 출시되었는데, 비디오대여점깨나 들락거렸다면 기억하시겠죠. 캐서린 터너가 주연을 맡았던 바로 그 영화.


파레츠키가 단지 소설만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건 아닙니다. 1988년에는 미스터리와 범죄소설을 쓰(려)는 여성들을 지원하는 조직인 ‘시스터스 인 크라임’을 설립하여 자신이 꿈꾸었던 사회적 변화를 일으켰지요. 작가가 되는 건 남성만의 영역처럼 보였던 시절, 당연하다는 듯 차별적 대우를 받았던 여성 작가들에게 시스터스 인 크라임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2019년 4월 25일. 뉴욕에서 열린 에드거 앨런 포 시상식에서 사라 파레츠키는 19번째 워쇼스키 시리즈인 <쉘 게임>으로 수 그래프턴 기념상을 수상합니다. 이 소식은 ‘미국 미스터리 작가 협회가 사라 파레츠키를 예우하다’라는 제목으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으니 이건 역시 시대의 변화라고 할까요.


수 그래프턴과 사라 파레츠키는 서로를 알지 못한 상태로 같은 해에 나란히 전례가 없는 강한 여성 탐정을 각자의 작품에 등장시켰다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그래프턴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만든 상의 첫 번째 수상자로 파레츠키가 선정된 것은 뜻 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파레츠키가 가정에서 폭압당하는 아이였을 때부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까지의 여정, 남성 중심의 문학계에서 글을 쓴다는 것의 어려움에 관해 서술한 책 <침묵의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이 출간되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가디언>과 했던 인터뷰에서 작가는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말하기의 필요성으로 귀결됩니다. 공적 영역에서 여성을 위한 말하기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죠. 예컨대 한 여성이 게임에 강간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 1만 명의 사람들이 그녀를 강간하겠다고 위협합니다. 이게 바로 워쇼스키가 떠나지 않는 이유예요. 나처럼 나이든 여자에게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 느낍니다”라고.


저도 우연히 <가디언>에 실린 인터뷰를 흥미롭게 읽고 원서를 검토하다가 <침묵의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 Writing in an Age of Silence>을 만들게 되었는데 챈들러나 해밋 같은 작가들에 대한 뒷담화가 잔뜩 나오니까 역시 재미있습니다. 편집자 후기에는 ‘시스터스 인 크라임’의 탄생부터 최근까지의 활약에 대해 적어보았습니다. 시간 나실 때 슬슬 거들떠봐 주시길.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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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
아사이 마카테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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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리가면>이라는 제목을 들으면 소싯적에 순정만화 좀 읽었다는 분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아아, 그거 걸작이지’ 하며 고개를 끄덕일 거라 생각합니다. 주인공 마야와 라이벌 아유미가 연극으로 맞붙는 장면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아 해당 원작인 <키 재기(키 재보기)>를 찾아본 독자 분들도 꽤 많을 듯싶어요.


2

우리나라에서는 ‘일본 근대 소설의 개척자’라는 타이틀보다 <유리가면> 속 연극의 원작자로 더 많이 알려진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는 일본 화페 5,000엔에 새겨질 만큼 유명한 인물인데 이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문학에 대한 열정에 탄복한 아버지의 지원으로 이치요는 나카지마 우타코로부터 시(정확하게는 와카)를 배웠다.”


3

나카지마 우타코에 대한 기록은 현재 일본의 역사책에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히구치 이치요의 스승이며 와카를 가르치는 사설학원 하기노야를 운영했다”는 정도. 이러한 기록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면밀한 조사와 상상력을 통해 메이지 시대에 활약했던 가인 나카지마 우타코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복원해 낸 작가가 아사이 마카테입니다.


4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소설가가 되기 위해 잘나가던 광고 회사의 카피라이터 일을 때려 치고 마흔다섯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데뷔한 아사이 마카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시대소설만을 집필하다가 마침내 《연가》로 ‘나오키 상’과 함께 ‘전국 서점 직원이 뽑은 시대소설 대상’을 동시에 거머쥐는 영예를 안았지요.


5

소설 《연가》의 무대인 미토 번은 어이없는 내전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지 오래 되어 지금껏 드라마나 소설에서도 다루어진 경우가 거의 없어요. 때문에 이를 소설로 쓴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마치 모래바람에 드러난 고대유적을 복원하듯 오랜 시간을 천착한 끝에 대작을 완성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6

“어느 잡지에 나카지마 우타코에 대해 짧은 문장을 쓴 걸 계기로 미토를 방문한 이후 본격적인 집필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일종의 운명이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연가》는 역사소설이지만 단지 사실만 적은 것이 아니라 저에게는 연애소설이면서 여자들의 재생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그녀들이 힘차게 살아감으로써 잃어버린 생을 이어갈 수 있었으며, 그러한 축척 덕분에 우리들도 지금 여기에 있다는 걸 느낍니다. 여성분들이야말로 꼭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하는 이야기예요.”


​7

즉, 남자들이 벌인 소모적 내전에서 살아남은 여자들이 그 시대를 가슴에 품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여 후대에 전한 역사가 바로 《연가》인 것이죠. 아울러 작가는 마지막의 반전을 통해서도 메시지를 준비해 두었는데,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을 형제자매님들의 즐거움을 위해 밝히지 않겠습니다.

8

다만 읽다가 헛갈릴 때 찾기 쉽고 원치 않을 시 접어두면 되는 등장인물 소개 페이지를 뒤쪽 날개에 만들어 두었으니, 지금부터 책을 읽으실 분들은 꼭 써먹어 주시길. 독자 편의를 위해 만들어 두었는데 읽기를 마친 후에 발견했다는 제보가 종종 들어와서 말이죠...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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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감 넘치는 글쓰기를 위한 아이디어 - 세계 최고의 범죄소설 작가가 들려주는 박람강기 프로젝트 10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송기철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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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금까지 몇 번인가 일간지와 주간지 등에

잡다구리한 내용의 칼럼을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가장 고되고 힘들었던 건 한겨레에서의 3년이에요.

한번 짤리고 코너가 바뀌는 등 부침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주간경향에 2년, 서울신문에 2년,

채널예스(가 제일 재밌었고)에 1년 6개월인가.

이중 몇 군데는 시기가 겹쳤기 때문에

거의 매주 쓸거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한데 저 같은 경우 책상에 앉아서

‘자, 오늘은 이걸 써야지’ 하고 술술 원고지를 메우는...

건 어림없는 얘기고 일주일 내내 끙끙거리다가 마감 전날,

그것도 자정이 넘어야 겨우 시작을 할 수 있었어요.


이건 상당히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왜냐하면, 뭘 써야 할지 윤곽이 잡히기 전까지는

티비를 보는 중간중간, 캠핑을 하는 사이사이에

고민이 끼어들어, 이건 뭐 노는 것도 아니고

쓰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아노미 상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중간중간’과 ‘사이사이’가

결코 쓸따리없는 세월이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을 만들면서 새삼 깨달았어요.

작가 하이스미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우울한 느낌으로 책상을 떠났는데

갑자기 어떤 아이디어들 가운데 하나가

활기를 띠고 움직이기 시작할 수도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유레카”라고 외칠 때 욕조에 있었다.

책상이든 어디에든 간에 몸을 숙인 채로

자기 문제에 골몰하고 있던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이처럼 영광스러운 순간들은

앞서 그 문제로 애태운 경험이 없다면 찾아오지 않는다.”


이 대목을 읽으며 저는 정말로 무릎을 쳤습니다.

그동안 온갖 마감에 짓눌려 마음고생 했던 세월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 정도예요.

내가 보낸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구나 하고.


물론 이런 얘기도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정도 되는

일급의 작가가 하니까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겠지요.

그게 바로 관록일 텐데 어쨌거나 저처럼 평범한

인간에게는 여러 모로 도움이 되는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앞으로도 ‘나는 왜 이런 비효율적인 고민을 하고 있나’

하고 자책하는 순간이 종종 도래하겠지요.

그럴 때마다 한 번씩 떠올려 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유레카, 라고 외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순간은

그 문제로 애태운 경험이 없다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 어딘가에서 끙끙거리며 뭔가를 쓰고 있을

여러 형제자매님에게도 조금쯤 도움이 되길...


마포 김 사장 드림


덧)

아울러 "집필중에는 그 책(글)을 보호해야만 한다. 예컨대 딱 봐도 가혹하게 작품을 비판할 게 분명해서 당신의 자존심을 손상시킬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책(글)의 일부를 보여주는 것은 부적절한 실수다"는 말도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됐어요. 

책을 쓸 때 즐거움을 주기 위한 대상으로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사람은 당신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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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채에 미쳐서
아사이 마카테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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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캔슬은 무섭습니다.

그중에서도 기대를 품고 매달린 작품 위로

난데없이 떨어지는 관계악화적 캔슬이 제일 무섭습니다.

인쇄 데이터까지 출력해 놓은 단계에서 얻어맞은 일격은

회복을 기약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난감했습니다.


​2

오사카에서 태어난 작가는

결혼과 동시에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일을 그만두었지만

소설가의 꿈을 잃지 않고 도전하여 50세의 나이에 데뷔.

5년 만에 전국 서점원이 뽑은 시대소설 대상과

나오키상을 동시에 석권합니다.


​3

어릴 때부터 유독 식물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데뷔작에서는 꽃을 재배하는 종묘 가게의 부부 이야기,

두 번째는 센다기초에 거주하는 정원사 이야기를 썼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그녀는 말한 바 있지요.

그 세 번째 작품이 『야채에 미쳐서』라는 소설입니다.


​4

전국의 쌀과 야채가 모이는 ‘천하의 주방’ 오사카.

막부의 비호로 이곳의 야채 유통을 독점하던 상인회가,

먹고살기 위해 자신이 직접 재배한 야채를 팔려는

농부들을 탄압하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이에 불합리한 유통을 개혁하기 위하여 나타난

‘스카탄(얼간이, 라는 뜻의 오사카 사투리)’이 있었으니,

바로 상인회 대표의 큰아들이었습니다.


​5

도매상과 생산자 사이의 알력이 낳은 소동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근원적인 테마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도스토예프스키적 전개는 역사소설의 매력과

시대소설의 재미, 양쪽을 마스터한 작가의 장기라 하겠습니다.


​6

한편 스카탄인 그를 못마땅해하던 주인공 지사토가

그 행동의 원천이 되는 정의로움을 깨달으며 전개되는

로맨스의 행방도 흥미롭습니다.

특히 오사카 도매시장 한복판에서

경매 중간에 대뜸 사랑을 고백하는 박력무쌍한 광경에는

누구라도 만족할 거라는 점만 말해둘까요.


마포 김 사장 드림.


덧)

아울러 

『야채에 미쳐서』는 Osaka Book One Project 선정작입니다. 이 상은 ‘한 군데 서점의 힘으로는 어렵다, 힘을 합치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위기의식에서 출발하여 평소 라이벌 관계에 있던 도매상, 대형서점, 독립서점이 함께 만든 문학상입니다. ‘독자들이 정말로 읽어주었으면 하는 책을 팔자’가 모토이며,


(1) 오사카와 관련된 이야기일 것(오사카 진흥을 위하여)

(2) 문고본일 것(비교적 저렴한 가격)

(3) 저자가 살아 있을 것(저자와 함께 이벤트를 할 수 있도록)


...이 세 가지가 선정의 조건이라고 합니다.


Osaka Book One Project에는 다른 지역판 서점대상에는 없는 특색이 있습니다. 수상작의 판매 수익 일부를 오사카의 아동 시설에 책으로 기증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기증하는 책을 시설에 있는 아이들이 직접 신청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책을 기증하기 위해 기부금을 받는 형식이 아닌, 책을 팔아서 기금을 마련한다는 발상이 상업도시 오카사의 마인드를 보여주는 듯하여 재미있지요.


이러한 사해동포적 취지 덕분인지 대상으로 선정이 되면 증쇄 때마다 수만 부 단위가 걸릴 정도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사카 진짜 책 대상>은 매년 7월 25일 판매를 시작하여 이듬해 1월 31일까지 오사카의 모든 서점에 진열되는데, 선정작이 발표되면 오사카 서점의 풍경이 대대적으로 바뀌는 장관이 연출됩니다.


역대 ‘Osaka Book One Project’ 수상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회 『은전 두 관』(다카다 카오루)

제2회 『성불하지 못하고』(미우라 시온)

제3회 『야채에 미쳐서』(아사이 마카테)

제4회 『용사들에게 전언』(마스야마 미노루)

제5회 『환상언덕』(아리스가와 아리스)


아래 사진은 『야채에 미쳐서』가 선정됐을 당시의 서점 모습인데, 이 소설을 읽으면 신기하게도 오사카에 가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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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뭐라고? 마감하느라 안 들렸어 + 그리고 먹고살려고요 + 삶에 지칠 때 작가가 버티는 법 - 전3권 작가특보
곽재식.도대체.백두 지음 / 알라딘 이벤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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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박찬욱 감독을 만난 술자리에서 ‘공동 각본’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친절한 금자씨>를 만들 때부터 정서경 작가와 함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는데 “컴퓨터 하드는 공유하면서 각자 가진 키보드로 정서경이 초고를 쓰면 박찬욱이 수정하고 박찬욱이 쓴 초고를 정서경이 고치는 식으로 완성해 나간다”고 하더군요. 예컨대 정서경 작가가 “너나 잘해”라고 써놓은 걸 박찬욱 감독이 “너나 잘하세요”로 바꾸면서 명대사가 탄생한 거지요. ‘공동 각본’이라는 것은 말이 쉽지 실행하기란 좀처럼 어려운 일이지만, 매너리즘을 극복하고 서로에게 즉각적인 영감을 주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느꼈습니다.


서로에게 자극이 될 공동 작업을 출판사가 하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떠올린 건 이승엽 선수가 개인통산 400홈런을 달성한 2015년 무렵의 일입니다. 자주 해외의 서점을 구경하러 돌아다니던 마음산책+북스피어+은행나무의 편집자는 이런저런 서점에서 맞닥뜨린 광경에서 영감을 얻어, 신간을 전면 띠지로 가리고 저자와 제목을 알 수 없도록 만들어 판매한 ‘개봉열독’(2017년 4월) 시리즈와, 한 작가의 소설 산문 편지를 동시 기획함으로써 다채로움을 조명해 보자는 콘셉트의 ‘웬일이니! 피츠제럴드’(2018년 6월) 시리즈를 만들 수 있었지요.


아아 그리하여 올해로 세 번째인 ‘마음산책+북스피어+은행나무의 합동 프로젝트!’는 일찌감치 ‘글쓰기에 관한 책’으로 확정할 수 있었어요. 왜냐면 출판사라는 곳에는 늘 예비 저자들의 투고가 끊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쓴 글을 책으로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도 자주 받습니다. 몇 번인가 비슷한 질문에 대한 답을 메일이나 칼럼의 형식으로 쓰긴 하지만, 딱 부러지게 한마디로 설명하기란 어렵습니다. 거기에는 너무도 많은, 여러 형태의 노하우가 있을 테니까 말이죠. 세계 문학사를 찬연히 수놓은 유명한 작가들도, 이렇다 할 족적 없이 골방에서 쓸쓸히 죽어간 무명의 작가들도 모두들 자신의 글쓰기 방법이랄까 노하우 같은 게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우리가 주목한 것은, 세간에 알려진 이른바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고 시스템 밖에서 암중모색을 거듭하며 분투하다가 마침내 책을 내고 작가라 불리게 된 이들이었습니다. 어딘가에 당선되거나 유명한 상을 받거나 평론가의 상찬에 힘입어 데뷔한 경우가 아니라 ‘대관절 저 사람은 언제, 어떻게 작가가 되었지?’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케이스 말이죠. 언뜻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싶은데 공식적인 추인을 받고 작가로 활동하는 분들이 뭐가 어떻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온 작가들의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더 구체적인 실감으로 다가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저는 야구 학원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 하다하다 야구를 돈 주고 배우는 사람도 있구나’ 같은 말을 들을까 봐 어디 가서 자랑은 하지 않지만, 사회인 야구 시합에 투수로 등판했다가 엄청 두들겨 맞은 다음 날 인터넷을 검색하여 전직 프로야구 선수가 맨투맨으로 지도해 준다는 야구 연습실을 찾았습니다. 일산에 위치한 작은 건물의 지하실이었습니다. 이런 델 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었는데 웬걸, 상당히 많은 사회인 야구팀 소속 선수들이 퇴근하자마자 달려와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들 틈에 끼어서 저도 매일 어깨가 부서져라 공을 던졌습니다. 아니, 그러다가는 몸이 상한다는 코치의 친절한 충고에 따라 허리와 손목 쓰는 법을 익혀 나갔지요.


분명히 큰 틀에서 전직 프로야구 선수의 조언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볼을 컨트롤하는 마음가짐이라거나 경기 운영의 노하우 같은 것들은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어요. 전에 비하면 시야가 한결 넓어졌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저를 직접 지도한 프로 선수는 어째서 제가 타자 옆에 있으면 자꾸 볼을 놓치는지, 야구공이 똑바로 날아오면 왜 두려움을 느끼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공황장애를 앓는 사람이 왜 비행기를 못 타는지 겪어보지 않은 이들에게 제아무리 설명해 봐야 실감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그에 비해 나보다 한참 먼저 이곳에 온 ‘고참’ 선수들은 저의 고충을 이해해 주었습니다. 그들도 저와 똑같은 과정을 겪으며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즉 쟁쟁한 경력의 프로 선수보다, 반보쯤 앞서간 고참 선수의 조언이 세부적인 면에서 저에게는 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찌됐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는 전국구적 후련함이 내포된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으로, ‘어떻게 하면 눈에 띌 수 있을까’ 하는 시장조사적 머뭇거림이 담긴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곽재식(북스피어), 도대체(은행나무), 백두리(마음산책) 작가는 따지자면 후자의 경우지요. 이들이 당신의 특보(특별 보좌관)가 되어 데뷔, 독서, 슬럼프, 창작에 관하여 세 출판사의 편집자가 던진 ‘똑같은’ 질문에 답하며 자신의 글쓰기 밑천을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소상하게 들려줄 겁니다. 이론 따위는 빼고, 심플하게!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내가 쓴 글을 책으로 낼 수 있나요”라는 당신의 궁금증이 조금쯤 해소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포 김 사장 드림.


덧)

아울러 ‘마음산책+북스피어+은행나무의 합동 프로젝트 제3탄 작가특보 시리즈’ 세 권을 전부 구매한 독자에게는 세 출판사 편집자가 함께 나누어 읽고 선별한 69권의 긴급 출동 서비스 메뉴얼 『어느 날 글쓰기를 물어보고 싶을 때』(비매품 특별부록)를 증정합니다.


부록에는,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야만 쓴다는 완벽주의형, 남들이 안 쓰면 내가 쓴다는 독고다이형, 글쓰기 전문가들의 온갖 자질구레한 준비 과정을 시시콜콜 밝힌 국정조사형, 애쓰지 않아도 가만히 기다리면 쓸 수 있다는 안빈낙도형, 일단 많이 쓰는 것이 장땡이라는 다다익선형,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쓴다는 시나브로형, 어떻게 쓸까가 아니라 어쨌든 쓴다는 자세를 유지한다는 막무가내형, 좋은 글을 주야장천 베낀다는 문장복사형 작가들의 글+책 쓰기 밑천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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