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주의보 이판사판
리사 주얼 지음, 김원희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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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였나.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어보는 선생님의 질문에 소설가라고 대답했다. 그냥, 멋있어 보여서 그랬다. 국문학과에 적을 두면 소설가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입학해 보니 훈민정음, 향가 같은 것만 가르치더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도 싫지 않았지만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는 배우지 못했다.


네 학기를 마칠 때쯤 소설 습작강의가 개설되었다. 이거다 싶어 신청하고 구상에 들어갔다. 장르는 미스터리. 나는 밤마다 책상에 앉아 갉작갉작 원고지를 채워나갔다. 하지만 그게 죄다 뻘짓임을 깨닫는 데는 탈고하고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주위의 몇몇 친구들은 단지 도입부를 읽는 것만으로도 범인을 알아맞혀 버렸으니까.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두고 근성이 없다고 하겠지만 애초에 독서량도 턱없이 부족했어. ‘언젠가는하는 마음가짐으로 후일을 도모하자. 그때부터 마음에 드는 소설을 읽고 나면 작가 약력에 적힌 나이를 유심히 보며 어떻게 데뷔했는지 찾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1968년 생인 리사 주얼의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다. 칙릿이든 스릴러든 발표하는 소설마다 연속 히트. 전 세계 26개국에 번역되어 천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최근 작품들은 대개 영화나 드라마화가 진행중인 영국의 대표작가. 이 사람은 그야말로 ‘Natural born writer’구나 생각했다.

 

한데 뜻밖의 유년 시절이 있었음을 알고 조금 놀랐다. 자신이 태어난 런던 북부의 작은 집에는 책이 단 한 권도 없었다고, 리사는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부모님은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먹고사는 데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 나빴던 건, 직물 중개인이었던 아버지가 보통의 아버지들보다 훨씬 더 권위적이었다는 점이다.

 

아빠는 의견을 가진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집 밖에 나가 노는 것도 싫어해서 우리 자매는 늘 집에 처박혀 있었지요. 동생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상상의 존재를 만들어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훗날 소설을 쓰는 데 도움이 좀 되었을 거라고 리사는 말했다.


대학에서는 미술을 공부하고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학위를 받았다. 이후 패션 소매업체인 Warehouse에서 일하던 중 남편을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남편이 그들의 연애 시절에 보여준 애정 공세, 곧 리사의 삶을 모든 면에서 통제하려는 시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친구를 만나거나 심지어 옷을 입는 것까지 허락을 받아야 했다.


퇴근 후에는 곧장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난리가 났다. 때문에 야근을 할 수도 동료들과 저녁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로 인해 PR매니저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도 사라졌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감정적 교감이 불가능하고 가족을 강압적으로 통제하려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던 건 단지 우연이었을까.

 

첫 번째 결혼을 끝내고 글쓰기 수업을 신청한 이유는,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 뭐든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우연히 눈에 띄었고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 실제로 수업은 재미있었다. 자신이 쓴 글로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으면서 자신감도 회복했다. 마침 회사에서 해고된 덕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도 생겼다.


나는 그때 닉 혼비의 소설을 읽고 작가가 되려면 중년 남성이어야 한다고 믿었어요. 독자들은 젊은 여성의 목소리에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친구가 그냥 써. 나는 네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까. 만약 나에게 세 장을 써서 보여주면 네가 제일 좋아하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쏠게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 챕터는 결국 리사의 데뷔작 <랄프의 파티>로 발전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역시 사람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하는 법이다. 당시 유행하던 장르인 칙릿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리사가 쓰고 싶었던 장르는 미스터리, 스릴러였다. 이때부터 어두웠던 과거가 빛을 발한다. 리사의 소설에 가족과 집(집착, 고립, 가스라이팅)에 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제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어요. 전에는 인생의 지도라고 할 만한 게 없었거든요. 내 인생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지요. 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제 인생은 의미와 목적을 가지게 되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세 챕터만 써보라는) 친구의 제안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거죠.”


런던에 거주하며 두 번째 남편과 함께 딸 키우는 리사 주얼은, 매일 소설을 쓰는 한편으로 여러 매체를 통해 자신처럼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남겼다.

 

<리사 주얼의 Top 5 Writing Tips>

 

1) 글쓰기가 낭만적일 거라는 생각을 버리세요.

재미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마세요. 특히,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인생에서 가장 도전적인 일 중 하나가 될 겁니다. 읽기 쉬운 글이라도 쓰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2) Read (not normally way)

평소 읽는 방식대로 읽지 말고 작가가 한 일을 살펴보세요. 장면 전환을 어떤 식으로 했는지. 대화를 자연스럽게 만드는 기술은 무엇인지, 처음 등장하는 캐릭터는 어떻게 묘사돼 있는지.

 

3) Start

4) Keep going

5) Finish.

우선 시작하고, 계속 쓰고, 꼭 끝내세요!

마지막 세 가지는 단순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작한 글을 끝내지 못했는지 알면 놀랄 겁니다. 현실적인 기대를 가지되 인내와 끈기가 필요합니다. 한 사람만 있으면 돼요. (나에게 세 챕터만 써보라던 친구처럼) 단 한 사람만 마음에 들어 하면 됩니다. 그걸 알았다면 당신은 이미 반쯤 온 겁니다.


)

리사 주얼의 신작 <가족주의보>는 위의 글쓰기 팁을 공부할 수 있는 마침맞은 소설입니다. 빠른 장면 전환, 입체적인 캐릭터,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한 번 책을 잡으면 롤러코스트처럼 끝을 보기 전까지 내리지 못하도록 만들거든요. 대단한 흡입력. 저도 그래서 계약했고요.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짬뽕져 어우러져 있는지 한번 거들떠봐 주시길.

 

삼송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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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모 저택 사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기웅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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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세월호의 침몰이, 일본에서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공식 인정한 사건이 있었던 그 이듬해, 저는 미야베 미유키 작가를 인터뷰하기 위해 도쿄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더없이 쾌청한 날이었어요. 제가 인터뷰를 위해 “녹음해도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이런 말을 꺼냈습니다.


“작년에 한국에서 대단히 불행하고 슬픈 일이 있었잖아요. 세월호 사건이요.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에 저는 TV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무서운 일을 겪었을 때 한국의 독자들이 진심으로 저희를 걱정해 주셨듯이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뉴스만 봤습니다. 정말 슬픈 사건이었으니, 여러분도 무척 괴로우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늦었지만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요즘 두 나라 사이가 상당히 어려운 시기인데요, 언제나 저희 책을 읽어 주는 한국 독자 분들에게 일본의 정치가가 실례되는 말을 해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저희가 쓴 신간이 나오면 읽어 주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고마웠는지 이번 기회를 통해 꼭 말로 전하고 싶었어요.”

이제는 시간이 꽤 흘러 인터뷰 당시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그날 들었던 위로와 사과는 지금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소설에 사회적인 시선을 담아서 써온 작가의 어조가 그만큼 진지하고 담백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립서비스겠지 하고 여기면 그뿐이지만 그래도 돌이켜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약간 뜨거워집니다.

일본의 경제 제재 이후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 방류,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 위안부와 강제징용 배상 문제 등으로 양국의 관계가 또 파탄으로 치닫겠구나 싶은 요즘이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와중에 출간한 『가모 저택 사건』은 상당히 각별하게 느껴지더군요. 대관절 무엇이 각별했는가. 그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 소설의 배경인 2.26사건은, 파쇼적 우익 사상에 전도된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 미수 사건입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 군부의 영향력이 커지고, 급기야 전쟁을 일으켜 여러 나라들에 막대한 고통을 안겼던 것이죠. 이 사건은 한국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2.26사건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아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으니까요.

독자들 대부분이 모르거나 어렵다고 여길 만한 역사적 사건을 무대로 등장하는 주인공은, 수험을 준비 중인 고등학교 3학년인데 ‘한창 역사를 공부할 나이의 수험생’이라는 설정은 의미심장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현대사에 무지하거든요. 왜냐.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대학 진학을 위해 스테레오타입한 역사적 지식만을 암기시키고 한일 양국의 문제를 비롯한 현대사 공부는 제대로 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역사 교육을 비판하고 싶었던 걸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울러 (1) 역사는 바꿀 수 없다. (2) 이미 정설로 굳어진 역사적 사실에 이의를 제기해 그런 사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정하거나 기존 통설에 수정을 가하는 역사 수정주의는 위험하다…라는 메시지를 작가는 『가모 저택 사건』을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절판 상태였던 이 소설을 다시-지금 복간한 까닭은 우선 독자들의 요청이 많았기 때문이지만, 한일 관계가 이 꼴은 상황에서 미야베 미유키 작가가 얘기하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한 번쯤 읽어봐도 좋겠다 싶었서입니다. 이런저런 할 말이 많아서 소설의 마지막에 쓴 편집자 후기도 시간 나실 때 거들떠봐 주시면 참으로 기쁘겠습니다.

삼송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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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레이디가가
미치오 슈스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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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 『N』은 ‘읽는 사람에 따라 엔딩이 달라지는’ 작품입니다. 


2

전부 6장으로 구성된 장편이지만 어느 장부터 읽기 시작할지, 다음은 어느 장으로 넘어갈지, 어느 장으로 끝마칠지 독자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해피엔딩이 될 수도 새드엔딩이 될 수도 있는 ‘체험형 소설’이라고 할까.


3

그럼에도 ‘뭐야, 귀찮게 그걸 왜 내가 선택해. 그냥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읽을래’라는 분들이 틀림없이 있겠죠? 그럴 줄 알고 장과 장의 물리적 연결을 끊기 위해 이야기를 상하 거꾸로 인쇄했습니다.


4

즉 이 소설의 1장, 3장, 5장은 완전히 뒤집혀 있어요. 똑바로 읽어도 N, 거꾸로 읽어도 N, 그래서 제목이 『N』.


5

영어회화를 전혀 못하는 영어강사, 마법의 코를 가진 개, 떨어지지 않는 마구를 던지기 위해 연습하는 투수, 행방불명된 개와 고양이를 기가 막히게 찾는 펫 탐정 등이 등장하여 각각 독립된 미스터리가 전개되지만 전체가 다 연결되어 있음. 


6

그렇다면 대관절 작가는 왜 이런 소설을 썼느냐. 


“소설을 읽는 사람도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까 평범한 소설로는 어렵겠다고 생각했어요. 넷플릭스 같은 라이벌과 싸우려면 소설이 더 재미있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어느 업계든 일단 고객이 줄어들면 상품의 개량을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책에 대해서만은 책을 안 읽게 된 사람들이 나쁘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풍조가 있어서 더 책을 읽어야 한다고들 말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 재미있는 무언가를 만들어야 독자들이 오지 않을까요.”


7

더 재미있는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고민 끝에 쓴 소설이라니,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그 마음가짐에, 신묘막측한 아이디어에, 촘촘히 연결된 이야기에 감탄.


8

『N』은 독서에 ‘게임적=메타 이야기적’ 구조를 도입하여 읽는 방법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도록 한 (거의) 세계 최초의 소설이 아닐까 싶네요.


9

아울러 한 권 값으로 여러 권을 읽는 효과를 낼 수 있는 소설을 탈고한 후 미치오 슈스케 작가는 다음과 같은 당부를 남겼습니다. 


“여섯 장이 눈앞에 줄을 섰을 때 어느 것부터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미지가 되는 소설이니까 독자 여러분들은 한 번 읽고, 잊어버렸을 무렵에 다른 순서로 읽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읽을 때마다 틀림없이 다른 감상을 가지게 될 테니까요. 돈을 냈으면 최대한 즐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어떤 식으로 읽든지 책값은 변하지 않는데 같은 금액으로 몇 번이나 즐길 수 있다면, 저자로서는 그보다 기쁜 일이 없을 듯합니다.”


오랜만에 북스피어와 잘 어울리는 색깔의 책을 만들어서 기쁜,

삼송 김 사장 드림. 


덧) 어제 신간을 들고 서점을 돌아다니면서 담당자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뭐였느냐면, “와, 거꾸로 인쇄돼 있어서 신기하긴 한데 반품도 많이 들어오겠어요.” 절대 인쇄사고 아닙니다. 그러니까 반품하지 말아주세요,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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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야가의 밤 - 각성하는 시스터후드 첩혈쌍녀
오타니 아키라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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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싸움이 유일한 재능이자 취미인 여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젊고 예쁠수록 물건처럼 값이 매겨지는 세상이 싫어서 나이가 드는 시술을 받았다는 소녀, 돈도 지위도 있는 남자들의 실상을 까발려 글로 쓰기 위해 풍속업소에 취직했다는 아가씨, 섹스가 취미여서 모임을 만들었다는 ‘헤픈 여자’들의 리얼한 목소리를 끌어올려 시스터후드(여성끼리의 연대)를 관철한 소설을 발표해 온 작가 오타니 아키라는 하드한 전개에 ‘심장 떨리는 바이올런스 장편’ 『바바야가의 밤―각성하는 시스터후드』를 완성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신도 요리코는 지금껏 출간된 일본 소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인물이에요. 왜 이런 캐릭터를 선보였을까. 출간 직후 작가는 《허핑턴 포스트》와의 인터뷰를 통해 오랫동안 해 왔던 구상임을 밝히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범죄물의 여성 캐릭터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지요. 현실의 세계도 상황은 비슷하지만 픽션의 세계에서조차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러한 상황을 뒤집는 작품이 존재해도 좋지 않을까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전투 미소녀가 등장하는 픽션과 다른, 내가 독자라면 읽고 싶은 리얼한 이야기를 쓰자고 생각한 것이 『바바야가의 밤』이에요.”


성폭행, 강제추행, 스토킹 등이 강력범죄의 90퍼센트를 차지하고 피해자 10명 중 9.3명이 여성이라는 통계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피해자와 일면식도 없는 가해자가 돈이나 원한이 아니라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때리거나 죽이는 사건이 갈수록 눈에 띈다는 점에서 이를 결핍의 반작용이라고 해석해도 좋지 않을까요.


분노 조절 장애는 무슨. 상대가 마동석 씨였다면 폭력을 행사하기는커녕 말 한마디 못 붙였을 거면서 말이죠. 때문에 피지컬도 멘탈도 강한 여성, 게다가 싸우기 위한 동기가 내면에서 솟아나는 여성을 그리고 싶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성이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익스큐즈가 필요합니다. 남편이나 아이가 죽었다고 하는 ‘싸워야 할 이유’가 반드시 붙어 있지요. 혹은 원더우먼처럼 신화적인 최강 미녀전사라는 현실과 동떨어진 설정이라든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남성 캐릭터는 그렇지 않아도 허용되는데 여성이 힘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세상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일일이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된다니……. 그런 것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가슴보다 갈라진 복근에 눈이 가는 육체를 가진 ‘싸움의 신’과 같은 주인공이 쓸데없이 시비 거는 남자들을 패고 또 패고 여자를 강간하려는 남자를 패고 또 패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통쾌무쌍하다고 할까, 읽고 있으면 팔굽혀펴기 같은 걸 하고 싶어지는 소설이라고 할까. 제 여자친구는 (교정지로) 읽고 나서 주짓수를 배우기로 결심했다던데. 하여간 재미있습니다. 정말이에요. 읽었는데 별로였다 싶으면 저를 마구 줘패셔도 무방합니다. 소설의 반전에 관해서는 편집자 후기에 적어 두었으니 꼭 본문을 다 읽고 거들떠봐 주시길.


삼송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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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부르는 그림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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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은 

지난주 화요일(11월 1일)에 인쇄를 마쳤지만 

참사로 희생된 분들을 생각하니

아무래도 마음이 좋지 않아서

출간을 일주일 미뤘습니다.

늦어서 송구해요.


이번 작품의 관전포인트는 세 가지입니다.


1. 출판

실용적이고도 예쁘게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화가를 섭외하여 그림을 만들어 붙이고, 

판매를 위해 책장수가 선정한 책을 담아서 팔자,

는 아이디어를 내는 등 문고를 만들고 파는 일이 

굉장히 심도 있게 묘사됩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느 출판사의 내부를 엿보는 듯하여 

편집자인 저는 만드는 내내 즐거웠어요.

작가는 세책상과 문고상에 대한 공부뿐만 아니라 

여러 출판사들에 대한 취재도 꼼꼼하게 했는데

그 점을 눈여겨봐 주시면 기쁘겠습니다.


2. 미신

이사는 손 없는 날 해야 하고.

처음 입주한 집에는 팥을 뿌리고.

소중한 아기에게 하찮은 이름(태명)을 지어주고.

갓 남자아이에게 여자아이 옷을 입히는 등등

모두 액운을 피하기 위해 하는 일들이지요.

우리는 왜 이상한 것을 믿을까요. 

“인간이 이상한 것을 믿는 까닭은 불확실로 가득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패턴을 추적해 인과관계를 찾아내도록 진화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기우제를 지냈는데 때마침 비가 내리는 걸 보고, 

‘가뭄에 대한 해결책=기우제’라는 잘못된 패턴을 찾아내 

이를 믿는다는 거죠.

이번 작품에서 미야베 미유키는,

미신을 믿고 이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자들의 음모를 파헤칩니다.


3. 사법제도

일본 에도 시대 때는 증거나 증인보다 

조사과정에서 얻은 자백이 더 중시되었다고 합니다.

제대로 된 자백이 아니라 해도

‘제가 저질렀습니다’라는 한 마디로 

사건을 해결하는 일이 빈번했지요.

‘자백을 받아내면 그걸로 해결’이라는 사회적 체제. 

분명히 그런 시대가 (한국에도 그리고 일본에도) 있었지만 

소설에서나마 작가로서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에도 시대의 자백 편중주의,

자백으로 누명이 잔뜩 생겨났던 사법제도의 결함을 고찰합니다.


출판은 그렇다 쳐도, 

미신과 사법제도의 결함을 고찰하는 대목을 읽고 있노라면 

일본보다는 차라리 요즘 시국의 한국 독자들이 읽는 게 

더 마침맞을 것 같다는 기분도 드는데 어떨지.


아울러 “다른 시리즈는 어떻게 되는 거냐”

“오하쓰는? 유키노스케는?” 하고 저에게 질문 주시는 분들이 많은데, 

미야베 미유키 작가님의 향후 계획에 대한 내용을

편집자 후기에 적어두었습니다. 

읽어보시고 이제 물어보지 말아주세요. 

딱 부러지게 말씀드릴 수 없는 저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죄송하고 송구하고 마음이 아파서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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