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가 들수록 세상이 참 빠르게 변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아침에 눈을 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확인하고, 무심코 켠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끄는 영상을 보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금 나는 내 의지대로 선택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설득당하고 있는 걸까?
마침 올해는 국내에 <설득의 심리학>이 번역되어 소개된 지 꼭 3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이현우 교수의 신간은 타인을 내 뜻대로 움직이는 설득의 기술을 전달하는 책이 아니다. 설득이라는 도구를 통해 인간의 본질과 마음의 여정을 추적해 온 심리학자들의 역사를 담은 책이다. 그다지 무거운 내용은 아니지만, 인간의 이성과 감정, 그리고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들이 꽤나 밀도감있게 정리 되어 있다.
현대 설득 심리학의 시초가 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모병 연구부터 시작하여 인지 부조화, 프레이밍 효과, 넛지에 이르기까지의 방대한 이론들을 인물 중심으로 다룬다. 특히 레온 페스팅거의 '인지 부조화 이론'에 관한 내용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극심한 심리적 불편함을 느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행동 대신 '생각'을 바꾸어 버린다는 사실은 무척 인간적이면서도 씁쓸했다.
얼마 전 나의 일화가 떠오른다. 건강을 위해 저녁 여섯 시 이후로는 절대 야식을 먹지 않겠노라 굳게 다짐해놓고는, 영화를 보면서 야식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양껏 먹었다. 밀려오는 후회 속에서 내가 택한 것은 반성이 아닌 합리화였다.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 먹고 행복한 게 건강에 더 이로워라며 내 행동을 옹호하는 생각들로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 현상까지 갈 것도 없이, 내 안의 인지 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사실을 비틀던 내 모습이 바로 페스팅거가 말한 그 본능적 방어기제였던 셈이다. 이렇듯 낯선 학문의 이론들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내 일상을 파고들고 있었다.
돌아보면 우리는 얼마나 자주 스스로가 내린 잘못된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음의 사실을 포장해왔던가. 스마트폰 속 화려한 타인의 삶과 초라한 나의 일상 사이에서 느끼는 괴리감을 메우기 위해 편한 정보만을 편식하는 현대인의 모습 또한 이 백 년 전 정립된 이론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의 '인지 휴리스틱'과 '프레이밍 효과'에 관한 내용도 재밌다. '성공 확률이 90퍼센트'라는 말과 '실패 확률이 10퍼센트'라는 말은 이성적으로 동일한 수치다. 손실을 극도로 회피하려는 인간의 본능은 후자의 이야기에 본능적으로 움츠러든다. 홈쇼핑의 호스트가 마감 임박을 외칠 때 나도 모르게 결제 버튼을 누르게 되는 그 조급함의 정체가 바로 '손실 회피 심리'다.
로버트 치알디니 연구팀의 최신 실험을 소개하는 부분도 꽤나 흥미롭다. 철저한 보안 장치가 설정된 AI조차 설득 심리학의 정교한 언어로 접근했을 때 금기시된 답변율이 33.3퍼센트에서 72퍼센트까지 치솟았다. 인간의 언어를 학습한 AI는 사람과 다름없이 얼마든지 설득 가능한 존재라니......
인간의 언어를 학습한 기계 역시 결국 설득당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돌아보게 된다. AI가 개인의 취향과 상태를 정밀하게 학습하여 맞춤형 설득을 시도하는 거대한 알고리즘의 바다 속에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묻는 인간, '호모 콰렌스(Homo Quarens, 질문하는 인간)'의 태도를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