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가다 그럼에도, 그렸다 - 일제강점기에서 전쟁까지, 한국 근대미술 대표 화가 40인 40선
박영택 지음 / 심통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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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 리뷰입니다.

이 제목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생업이 아니라 버티는 방식,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나는 화가다. 그래서 그린다'라는 문장이 더 자연스럽지만, 이 책은 '그럼에도, 그렸다'라고 비틀었다. '그럼에도'라는 접속에서 무언가 조건들이 앞에 놓여 있다는 전제가 암시된다. 가난, 식민지 현실, 전쟁, 사회적 억압, 예술에 대한 낮은 인식 같은 요소들. 그 모든 상황을 전제로 깔고 '그릴 수 없는 조건에서도 결국 그렸다'라는 느낌이 강렬하다. 이 제목은 화가들의 삶과 태도를 압축해 보여주고 있으며 그들의 존재를 지탱하는 방식이 곧 그림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격변의 역사 속에서 예술은 생존과 표현 사이를 오가며, 시대를 견디는 방식이 되곤 했다. 이 책은 한국 근대미술가 40인의 삶과 작품을 통해 그림이 어떻게 시대와 맞물려 생성되고 지속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전시장을 자주 찾으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 작가들이 있다. 김환기, 유영국, 김기창, 이응노의 작품을 좋아하는데 그들의 작품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올라왔다. 색과 형태, 그리고 화면을 채우는 기운이 오래 남는다.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도 그 여운이 이어졌다. 이미 익숙한 이름뿐 아니라 처음 접하는 화가들까지 함께 등장하면서, 각기 다른 삶의 궤적과 작업 방식이 느껴진다.

책은 일제강점기에서 전쟁 시기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화가들은 식민지 상황 속에서 정체성을 고민했고, 해방 이후에는 또 다른 혼란을 통과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서양화와 동양화, 전통과 현대, 민족성과 보편성 사이의 긴장이 작품에 녹아있다. 특정 화풍이나 사조에 머무르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응답했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음에도 표현이 서로 다르고, 그 차이가 오히려 한국 근대미술의 폭을 풍부하게 만든다.

이 책의 특징은 작가 한 사람, 한 작품에 집중하면서도 그것을 시대적 맥락 속에서 살핀다. 왜 그런 그림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특히 낯선 이름의 화가들 역시 생애와 작업 배경이 함께 서술되어 작품에 대한 접근 장벽이 낮아진다.


김기창의 초기작 <정청>은 근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마음속에 그리던 이상적인 부르주아 가정의 한 장면을 담고 있다. 화면 속 젊은 여성은 작가가 청년 시절 연정을 품었던, '소저'라는 인물을 모델로 한 것이며, 그 곁에 앉아 있는 소녀는 그의 누이동생이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미인도 계보를 잇되, 당대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서양화의 재현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확한 데생과 섬세한 채색이 결합되며, 이른바 신일본화 경향 속에서 탄생한 결과물이다. 이러한 양식은 당시 식민지 동양 화단을 지배하던 흐름이었고, 그 중심에 김기창이 있었다.


김기창은 어린 시절 열병으로 청각을 잃었고,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치열한 노력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결국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두각을 나타내며 당대 주목받는 작가로 성장한다. <정청>은 개인적 서사와 시대적 흐름이 교차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겉으로는 단정하고 평온한 장면이지만, 그 안에는 당대 사람들이 바라던 삶의 형태가 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이 그림은 한 개인의 차원을 벗어나 당대가 그려낸 삶의 형상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의 환경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척박한 조건 속에서도 화가들은 끝내 붓을 내려놓지 않았다. 생활의 어려움, 사회적 혼란, 개인적 고통 속에서도 작업을 이어간 시간은 곧 인내의 기록이다. 그들의 작품에는 화려한 기교보다 삶을 통과한 흔적이 남아 있고, 지금까지 감각적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저자 박영택은 미술평론가로서 오랜 시간 한국 현대미술을 연구해 온 인물이다. 전시 기획과 비평 활동을 병행하며, 작품과 작가를 균형 있게 조명하는 글쓰기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도 사실에 근거한 서술을 통해 각 화가의 작업 세계를 보여준다. 덕분에 특정한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감상을 확장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이 책은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을 한 권으로 조망할 수 있는 기록이자, 시대를 견딘 예술가들의 태도를 느낄 수 시간이다. 작품을 통해 전해지는 감각은 예술이 지닌 지속성을 증명한다. 화가들의 삶과 작품이 어떻게 맞물려 있었는지, 그 시간을 그림으로 따라가 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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