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인간답게 읽는 시간
전대호 지음 / 해나무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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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과학의 시대라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는 과학 속에서 인간의 자리를 자주 잊는다.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AI는 사고의 일부를 대신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의 감탄, 망설임, 책임, 윤리는 뒤로 밀린다. 이 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과학을 냉정한 공식과 성과의 축적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삶과 선택, 사회적 맥락 속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분명히 한다. 과학은 인간이 만들었고, 인간의 삶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당연하지만 잊히기 쉬운 사실을 차분히 되돌려 놓는 느낌이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과학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피보나치의 <계산 책>을 통해 과학과 상업, 기술이 분리된 영역이 아님을 보여주고, 마리 퀴리의 특허 포기를 통해 앎의 윤리와 공유의 의미를 묻는다. 과학은 순수한 진리 탐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선택의 결과라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특히 논문 저자 1000명의 시대, AI와 인간의 관계, 디지털화로 인한 감탄과 체험의 상실을 다루는 대목은 책을 읽는 이들에게 직접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학의 미래를 말하기 전에 인간이 어떤 존재로 남을 것인가하는 문제를 생각하도록 한다.

책의 구성은 과학의 온도, 모험성, 사회성, 상실과 획득, 그리고 철학으로 이어진다. 초반부에서는 과학이 차갑다는 통념을 깨고, 중반부에서는 과학이 본래 모험과 위험을 동반해 왔음을 보여준다. 이후 과학이 사회와 맺는 관계, 대중과의 동맹, 제도와 민주주의의 문제를 짚고, 마지막으로 과학적 합리성 너머의 철학적 질문으로 이끌어간다.

흐름은 느슨하지 않고, 각 장은 독립적으로 읽히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인간 중심의 과학이라는 주제를 향해 수렴한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과학을 설명하지 않고 해석한다는 점이 아닐까. 전문 지식을 과시하지 않으면서도 물리학과 철학을 넘나드는 깊이가 있다. 사건과 인물을 통해 논의를 풀어내 읽는 이의 사유를 자극한다. 과학 번역가이자 시인인 저자의 이력답게 문장은 절제되어 있고 사유의 여백을 남긴다. 과학을 잘 모르는 독자도 배제하지 않으며, 과학을 아는 독자에게는 익숙한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반면 아쉬운 점도 느껴진다. 과학 정책이나 기술 발전의 현실적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다소 관조적인 태도에 머무른다는 인상이 있다. AI와 디지털 기술에 대한 비판은 공감되지만, 대안적 실천이나 구체적 방향 제시는 제한적이다. 또한 에세이 형식인 만큼 논증의 밀도가 고르지 않고, 어떤 글은 문제 제기에 그친다. 날카로운 결론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아쉬움이 남을 수 있다.


인상깊었던 부분이 있다. 장하석의 능동적 실재주의는 과학이 성공하는 이유를 아주 다르게 설명한다. 과학이 잘 맞아떨어지는 것은 우리가 세계의 진짜 모습을 정확히 알아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개념과 실험 방식이 현실에서 잘 작동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과학은 이미 정해진 진실을 발견하는 일이기보다, 인간이 세계와 끊임없이 손을 맞잡으며 쓸 수 있는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과학 이론이 성공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이론은 당시의 세계를 다루는 데 매우 유능했을 뿐이다. 그래서 나중에 틀린 것으로 판명된 이론들조차 과학의 실패가 아니라, 다음 단계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발판이 된다.

이 내용을 읽으며 과학을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진다. 과학은 전능한 진리의 창고가 아니라, 인간이 현실과 부딪히며 만들어온 가장 효과적인 도구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의 성과를 무조건 신뢰하거나 숭배하기보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디까지 믿을 것인지는 결국 인간의 판단과 책임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남는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점은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된다. 첫째, 과학의 발전은 개인의 천재성보다 사회적 조건과 제도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사실이다. 둘째, 앎은 공유될 때 비로소 앎이 된다는 철학적 정의가 오늘날 과학 시스템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이다. 셋째, 디지털 기술의 편리함이 인간의 감탄 능력과 체험의 깊이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기술 발전을 무조건 긍정해 태도를 돌아보게끔 한다.

이 책은 과학 교양서를 찾는 독자보다는 과학을 둘러싼 삶과 태도를 고민하는 사람에게 더 적합한 것 같다. AI 시대를 살아가며 인간의 역할을 고민하는 독자, 과학과 철학의 접점을 탐색하고 싶은 독자, 기술 발전에 막연한 불안이나 피로를 느끼는 독자에게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과학을 좋아하지만 과학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 같아 불편함을 느껴온 사람이라면 더욱 공감할 것이다.

과학을 이해하는 가장 인간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책인 듯 싶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한 과학이 아니라, 더 인간적인 과학을 고민하고 싶은 독자들이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과학의 시대에 인간의 자리를 다시 묻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은 조용하지만 깊은 사유의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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