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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 너머
벤자민 마이어스 지음, 최리외 옮김 / 다산북스 / 2026년 5월
평점 :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암흑의 시절을 살고 있어.”
“참으로 불확실한 시대야”
“네 용감무쌍한 청년다운 허세도 칭찬받아 마땅하고... 원망하거나 분노만 해서는 안 돼. 전쟁은 전쟁일 뿐이야. 소수가 시작해 다수가 싸우고, 결국 모두가 패배하는 거야. 피 흘림과 총알 자국에는 영광이라곤 없어. 아주 조금도.”
지금도 전혀 낯설지 않게 반복되는 혼란스러운 풍경. 벤자민 마이어스의 소설 『수평선 너머』는 이토록 시리고 아픈 불확실성의 시대, 1946년 전쟁 직후의 영국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평생 땅속 탄광에서 광부로 살아가야 할 운명이었던 열여섯 소년 로버트. 그는 정해진 미래를 잠시 뒤로하고 무작정 길을 나선다. 푸른 들판을 지나 가 닿은 어느 해안가, 그곳에서 운명처럼 노부인 ‘덜시’를 만난다.
권위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재치 넘치는 덜시와의 여름.
로버트는 그녀의 오두막 수리를 도우며 덜시가 건네는 책들을 통해 난생처음 언어의 힘과 문학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다. 대를 이어온 가난과 광부라는 단단한 껍질을 깨고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소년의 찬란한 성장 서사가 눈부시다.
특히 소설 속 덜시가 매번 기막히게 맛있는 요리를 내어주며 로버트의 발목을 오두막에 붙잡아두는 장면들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어쩌다 보니 그 훌륭한 요리들에 속절없이 유혹당한 로버트는 자꾸만 길을 떠나려던 목적마저 까맣게 잊고 만다.
나도 남이 해주는 밥 참 좋아하는데... 매일 저런 요리를 내준다면 언제든 기꺼이 오두막에 감금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ㅋㅋ
"네 인생에서 다른 뭔가를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본 적 있니?"
"하고 싶은 거요?"
"그래. 하고 싶은 거. 이 장대한 여정 너머에서."
"잘 모르겠어요."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야. 인생을 계획하는 젊은이야말로 불쌍한 존재지. 계획은 우연이나 뜻하지 않은 행운이 생길 여지를 거의 남겨두지 않으니까. 게다가 사람은,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끊임없이 변화하잖니. 주변 세상도 마찬가지고, 가족의 기대나 전통에 짓눌려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하니."
어쩌면 덜시와 나누었던 이 대화가 로버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시작점이었는지도 모른다.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이어져 온 탄광 일. 그 캄캄한 운명이 너무나도 숨 막혀 도망치듯 떠나온 여행이었지만, 결국에는 그곳으로 돌아가 순응할 수밖에 없다고 로버트는 반쯤 체념한 상태였다. 하지만 덜시는 그런 소년에게 인생이란 이미 정해진 낡은 이야기가 아니라, 아직 쓰이지 않은 눈부신 공백임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늘 당당하고 유쾌해 보이던 덜시가 왜 인적 드문 오두막에 은둔하게 되었는지 과거의 비밀이 서서히 밝혀진다. 눈부신 여름 이야기 이면에 숨겨져 있던,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깊은 상처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독자를 걷잡을 수 없는 궁금증 속으로 몰아넣는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소설인데 마치 시집을 읽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장면 하나하나마다 마치 정밀화를 보는 듯 세밀한 문학적 묘사는, 책을 읽는 동안 나를 눈앞의 미지의 장소로 옮겨놓은 듯 몽환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작가의 감각적인 문장들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여전히 출렁이는 바다와 들판의 냄새를 생생하게 복원해 낸다.
작가 벤자민 마이어스는 이 소설을 통해 분노와 분열로 가득 찬 세상에 ‘약간의 햇빛’ 같은 따뜻함과 다정함을 전하고자 했다. 아무런 대가 없는 호의와 문학이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을 구할 수 있는지 증명해 보인 것이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은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계절을 통과한다. 맹목적으로 앞으로 달려나가는 삶에 지쳤다면, 올여름 『수평선 너머』와 함께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되물으며 깊은 울림을 느껴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