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오래된 노트 - 움직이는 시인, 살아 있는 언어
김신정 지음 / 사계절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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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죄수복 입은 이십 대의 한국 청년이 근 오십 명이 주사 맞으려고 시약실 앞에 쭉 느러선 것이다. 몽규가 반쯤 깨여진 안경을 눈에 걸친 채로 내게로 달려온다. 피골상접이라 처음에는 얼른 알어채이지 못했다.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더니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 관 뚜껑을 여자 '세상에 이런 일도 있어요?' 라고 동주는 내게 항의하는 듯했다." _p.338


이 충격적이고도 참담한 증언은 우리가 아는 맑고 순수한 시인 윤동주의 마지막 모습이다. 사계절 출판사에서 출간된 김신정 저자의 『윤동주의 오래된 노트』는 이렇듯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시인, 끝내 살아서는 시집 출간의 꿈을 이루지 못했던 그가 세상에 남긴 낡은 노트들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책이다.


그의 첫 원고 노트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두 번째 노트 『창』, 그리고 자필 시집의 낱장들.

책은 그 오래된 노트들에 고스란히 남은 시와 낙서, 메모, 치열한 퇴고의 흔적들을 촘촘히 좇는다.


윤동주 시에서 한자는 우리말 구어체 문장의 유려한 흐름을 해치지 않으면서, 표의문자 고유의 시각적 효과와 의미의 압축성을 통해 시적 깊이를 더한다. _p.251


우리는 흔히 그를 '민족 시인', '순수한 모국어를 수호한 저항 시인'으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그의 노트를 들여다보면, 옛말과 방언, 한자어, 외국어와 외래어까지 이질적인 언어들이 엉키고 다듬어진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노트 위에 남겨진 이 복잡다단한 언어의 궤적은 곧 시인이 걸어온 삶의 궤적 그 자체다. 그건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나 평양, 경성, 도쿄, 교토로 끊임없이 경계를 넘나들어야 했던 '이방인'이자 '경계에 선 시인'의 숙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지난 20여 년간 시인의 자취가 남은 동아시아 여러 장소를 직접 걷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이 책을 완성했다. 고향과 이국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펜을 쥐고 단어 하나하나를 고치고 덧쓰며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모색했던 청년 윤동주의 절박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가 남긴 노트는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시공간을 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닿아 숨 쉬는 '살아있는 언어'의 기록이다.


항상 교과서 속에서 완벽하게 정제된 시로만 윤동주를 만나왔던 내게, 이 책은 묵직한 울림과 먹먹함을 안겨주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맑은 서정 이면에는, 타국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언어를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던 청년의 고단한 숨결이 배어 있었다. 낡은 노트 위에 꾹꾹 눌러쓴 그의 문장들은 단순히 아름다운 시가 아니라, 잃어버린 역사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했던 피 끓는 생존의 기록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통해 만난 윤동주는 박제된 역사 속 완벽한 시인이 아니었다. 살아서 펄떡이며 끊임없이 번민했던 인간 윤동주의 호흡이 비로소 마음에 닿는 기분이었다.


수많은 책을 읽고 오랜 시간 리뷰를 적어 내려가며, 문득 나의 이 기록들 역시 훗날 하나의 '오래된 노트'로 남게 되겠지 싶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때로는 흔들리고 고민하며 쓰고 지웠던 흔적들조차 모두 내 삶의 궤적이듯 말이다. 시인이 꾹꾹 눌러쓴 생존의 기록 앞에서, 세월이 흐른 뒤 내 낡은 노트 안에는 과연 어떤 풍경이 담겨 있을지 감히 상상해 본다. 활자 이면에 남겨진 시인의 마음을 헤아리며, 오늘 나의 노트에도 이렇듯 정성스레 한 줄을 더해본다.


시는 '나'를 통과하여 타인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또한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다. 원고 노트에 시를 쓰고 조금씩 고쳐나가면서 어린 시인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들여다보고, 때로 한 걸음 물러서서 자신의 '말'로 타인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지를 천천히 몸으로 익혀나가고 있었을 것이다. _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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