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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한다는 착각 - 멸종에서 살아남은 일곱 동물의 반격
프랑크 베스테르만 지음, 정신재 옮김 / 다산초당 / 2026년 5월
평점 :
보통은 출발 신호용 권총 정도만 쏴도 북극곰이 도망갔는데, 최근에 북극곰 한 마리를 완전히 쫓아내기 위해서 실탄 일곱 발을 쏴야 했다.
보통은 발톱만 휘둘러도 인간이 도망갔는데, 최근에 인간 한 명을 완전히 쫓아내기 위해서 일곱 번이나 물어야 했다.
지금 누가 누구의 서식지를 침범하고 있는가?
이 서늘한 질문은 우리가 그동안 의심 없이 믿어왔던 '자연과의 공존'이라는 환상의 정곡을 찌른다. 우리는 동물과 슬기롭게 공존하며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과연 그 말은 동물들에게도 같은 의미일까?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논픽션 작가 프랑크 베스테르만의 신간 《공존한다는 착각》은 인류가 자랑하는 영광스러운 문명 이면에서, 탐욕스럽게 자연을 소유하고 통제해 온 우리의 민낯을 파헤친다.
이 책은 동물의 특성을 우화적으로 기록하던 중세의 '동물지(Bestiary)' 형식을 빌려와 '현대판 동물지'를 표방한다. 저자는 16세기 북동항로를 개척하려던 네덜란드 탐험대의 항해일지를 펼친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려던 '인간 영웅'들의 도전과 실패담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들 앞에 낯설게 등장했던 동물들의 흔적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멸종의 벼랑 끝에서 살아남은 일곱 종의 동물
일각돌고래: 인간의 환상이 투영되어 동화 속 유니콘이 되어버린 사연
노르웨이레밍: '집단 자살'이라는 오해를 낳은 인간의 시선
유럽뱀장어: 인간이 세운 댐으로 인해 수천 년간 이어온 생명의 물길을 잃어버린 비극
흑기러기: 잃어버린 낙원과 서식지에 얽힌 이야기
북극곰: 때로는 문명을 위협하는 '무법자'로, 때로는 빙하 위의 '불쌍한 희생양'으로 인간 입맛에 맞게 소비되는 현실
순록: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밀려나는 툰드라 생태계의 민낯
왕게: 인간의 개입으로 서식지를 옮겼다가 어느새 생태계를 파괴하는 '외래종 침입자'로 낙인찍힌 모순
책은 400년 전 극지방의 과거와 현대의 복잡한 사회 구조를 가로지르며, 동물들의 삶이 인간의 자본과 정치적 목적에 의해 어떻게 짓밟히고 제멋대로 오독되었는지 낱낱이 보여준다.
무엇보다 레밍의 '집단 자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촬영 현장의 이면은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레밍들은 촬영팀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코스로 내몰려, 피할 곳 하나 없이 절벽으로 떨어져야만 했다. 생태계의 비극마저 철저히 연출해 낸 이 장면은 인간의 이기심이 도사린 진짜 '잔혹 동화'다.
'가짜 공존'이 만들어낸 잔혹 동화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고 뼈아프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자연을 사랑한다"는 말조차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며, 동물들에게는 냉소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생태계 안에서 다른 동물들에게 그저 또 다른 '야생의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자연을 재단하고 통제하려는 오만한 '영원한 포식자'로 군림해 왔다. 결국 우리가 '공존'이라는 따뜻한 단어 안에 숨겨둔 것은 다름 아닌 소유를 향한 폭력적인 욕망이었다.
하지만 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여정은 놀랍도록 지적이고 매력적이다. 16세기 탐험가 바렌츠의 극지방 항해기를 시작으로 정치, 역사, 과학, 문화적으로 파고드는 저자의 집요한 취재력과 스토리텔링은 끝까지 눈을 뗄 수 없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책장을 덮고 나 묵직한 질문 하나가 남는다. 급변하는 환경과 벼랑 끝에 몰린 생태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슬기롭고 현명하게 공존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의 실마리는 어쩌면 오만했던 인간의 언어를 거두고, 서식지를 잃은 동물들의 시선으로 이 세상을 다시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