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칼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년의 몸 오른쪽 절반이 미끄러지듯이 잘려 하얀 안개 속에 소리 없이 잠겼다. 이어서 몸의 왼쪽 절반이 역시 소리 없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너만은 끝까지 살아남을 거야." 말하던 소년이 죽었다. 이제 세상에서 유일한 무기이자 분신이며, 그녀의 일부가 되어준 '붉은 칼'만이 남았다.


이 처절한 상실의 순간에서 소설 《붉은 칼》은 시작된다.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의 여성들이 자유를 준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우주선에 오른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숨조차 쉬기 힘든 하얀 먼지뿐인 황무지 행성. 그곳에서 그녀들은 제국군을 대신해 '하얀 외계인'들과 싸우는 총알받이 신세가 된다. 제대로 된 보급도 없이 낡은 화약식 총과 칼 한 자루에 의지해 처절한 사투를 벌어야 하는 처지다.


그런데 이 행성 이상하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분명 죽었던 소년이 다시 살아나 그녀 앞에 서 있다.


"넌 누구야?"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네가 누구인지 물어보고 싶은 거 아냐?"


너도, 네가 좋아했던 그 자식도, 우리 모두는 그저 복제된 가짜일 뿐이라고 말하는 소년.

그의 곁에는 그녀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자신을 마주 보고 있다.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웠던 그녀와 총알받이로 내몰렸던 남색 치마, 녹색 치마의 여자들. 그리고 전장을 함께 누볐던 남자.

우린 진정 누구인가? 내 안의 기억은 내가 나라고 말하는데, 눈앞의 진실은 잔인하다.


황무지 행성에서 죽음은 결코 안식이 아니다. 주인공은 반복되는 악몽 같은 전투 속에서 '살아서 이곳을 나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붉은 칼을 들고 전장을 질주한다. 압도적인 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서로의 손을 놓지 않으며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투쟁이다.


SF라는 장르는 여전히 낯설고 불친절하다. 아무런 예고 없이 기괴한 세계 한복판에 툭 떨어진 기분이랄까. 하지만 당혹감을 누르고 문장 사이를 헤매다 보면, 어느새 서늘하게 번뜩이는 문체가 심장을 찌른다. 이 낯선 감각을 견뎌낼 때 비로소 정보라가 숨겨둔 진짜 이야기가 얼굴을 드러낸다.


이 기괴하고 난해한 우주 전쟁의 밑바닥에는 17세기 조선의 '나선정벌'이 흐른다. 청나라의 강요로 러시아(나선) 군대를 치러 가야 했던 조선 조총병들의 운명. 나를 억압한 나라를 위해 이름 모를 적을 죽여야 했던 그들의 처절한 고립감이, 외계 행성에서 소모되는 '복제 전사'들의 서사로 완벽하게 치환된다.


정보라 작가는 세월호 1주기, 차벽 사이로 흔들리던 깃발들의 기억을 이 작품에 투영했다. 거대한 제국주의와 폭력의 시스템 속에서, 복제된 육체와 이식된 기억을 가진 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옆 사람의 손을 절대로 놓지 않는 것'이다.


지옥 같은 전장 속에서도 붉은 칼날처럼 번뜩이는 생의 감각이 서늘하면서도 뜨겁다. 막막한 안갯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 들 때, 이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손을 잡고 있는가.


시야가 명료해지는 순간은 승리할 때가 아니라, 서로의 고통을 알아보고 기꺼이 손을 맞잡을 때 찾아온다. 나의 기억조차 나를 증명하지 못하는 지독한 허무 속에서, 당신은 무엇으로 당신을 증명할 것인가. 이 책은 그 답을 붉은 칼날처럼 서늘하게 내민다. '결코 그 손을 놓지 말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