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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에 관하여 -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판사 프랭크 카프리오 이야기
프랭크 카프리오 지음, 이혜진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6년 3월
평점 :
한 여성이 법정 앞에 섰다. 아이가 넷 있는 싱글맘인 그녀는 화재로 집을 잃고 3개월째 호텔을 전전하던 중이었다. 죽어가는 할머니를 보러 가다 신호 위반 딱지를 떼인 상황. 누구에게나 버거운 이 순간, 당신이 법복을 입은 판사라면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
이 질문에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판사'라 불리는 프랭크 카프리오는 법전의 조항 대신 그 여성의 고단한 삶을 먼저 읽어냈다. 그는 범칙금을 매기는 대신 그녀의 사정을 살피고 위로를 건넸다. 이 책 <연민에 관하여>는 췌장암 투병 중이던 그가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생의 마지막 페이지에 꾹꾹 눌러쓴 단 하나의 유언과도 같은 기록이다.
프랭크 카프리오 판사는 38년 동안 법정을 지키며 수만 명의 삶을 만났다. 그가 세계적인 스타가 된 건 리얼리티 프로그램 <프로비던스에서 잡히다>를 통해서였지만, 사람들을 매료시킨 건 화려한 연출이 아니라 그가 보여준 '인간에 대한 예우'였다.
그는 말한다. "법은 차갑다. 그래서 판단은 인간적이어야 한다."
그의 법정에는 암 투병 중인 아들을 병원에 데려다주다 속도위반을 한 96세 노인, 다리에 총알이 박힌 채로 자신이 떼인 딱지를 책임지기 위해 법정에 나선 젊은 여성, 전쟁 후유증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죄를 책임지려 법정에 선 노병 등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카프리오는 이들에게 기계적인 판결을 내리는 대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다정한 지팡이'를 건넸다. 징벌보다 무너진 인간의 존엄을 회복시키는 것이 정의의 완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판결의 결과가 피고인 한 명을 넘어 그 가족 전체의 삶에 깊숙이 박힌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했다. 단순히 범칙금일 뿐이었지만, 그것을 낼 돈이 없어 오랜 시간 '범죄자'라는 낙인을 달고 살아야 했던 이들이 많았다.
방송을 통해 이들의 사정이 알려지자 전 세계에서 기부금이 답지했고, 이를 통해 많은 이들이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었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연민이 어떻게 개인을 구원하고 사회를 치유하는지 보여주는 경이로운 대목이다.
물론 연민이 항상 드라마틱한 성공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선의를 베풀어도 누군가는 다시 범죄의 늪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돕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오히려 새 삶을 시작하려는 이들을 더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한다고 말이다.
연민은 결과가 보장될 때만 베푸는 계산된 투자가 아니다. 인간의 잠재력을 믿고 끝까지 곁을 지키는 가장 품격 있는 투쟁이다.
최근 법정 생중계를 통해 목격하는 우리나라 사법부의 현실은 참담하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말은 공허한 구호로 전락했다. 6년을 일한 국회의원 아들이 받은 퇴직금 50억 원은 뇌물 혐의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17년을 헌신한 버스 기사는 고작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받았다. 거악에는 관대하고 약자에게는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는 사법부의 모습에 대중은 분노를 넘어 절망을 느낀다.
이 지점에서 프랭크 카프리오 판사가 보여준 '연민'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는 800원의 무게가 누군가에게는 삶의 전부일 수 있음을, 그리고 50억이라는 거액의 배후에 숨겨진 불의가 평범한 시민들의 박탈감을 어떻게 찢어놓는지 꿰뚫어 보았을 것이다. 그에게 정의란 기계적인 법리 해석이 아니라, 판결이 한 인간과 그 가족의 삶에 미칠 파장을 살피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타인의 실수를 즉각 단죄하는 '사이다 정의'도, 권력자의 편에 선 '선택적 정의'도 아니다. 법전의 차가운 글자 너머에 숨 쉬고 있는 인간의 고단함을 들여다보는 따뜻한 시선이다. 혐오와 분열이 일상이 된 시대, 이 책은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강력한 무기가 무엇인지 증명한다. 법은 차갑지만 법을 집행하는 인간의 마음은 뜨거울 수 있다. 무정한 세상에 실망해 마음이 굳어버린 이들에게, 차가운 법전을 온기로 채웠던 노법관의 목소리는 우리 안의 가장 인간적인 무기, '연민'을 깨운다.
결국 세상을 구하는 것은 서슬 퍼런 칼날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애를 온전히 바라봐 주는 다정한 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