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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3월
평점 :
"방금 들으셨다시피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 C.야트가 ..."
"...어젯밤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향년 39세입니다."
그날 경매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낙찰된 작품을 그린 화가. 열네 살의 신동이라 불렸던 그의 생애 첫 회화 <바다의 초상> 원본이 지금, 열여덟 살 루이사 손에 들려있다. 부모 없이 위탁 가정을 전전하다 홀로 세상에 내던져진 가출 소녀 루이사. 그녀는 왜 이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그림을 갖게 된 걸까? 그림 속 세 명의 아이 중 한 명이었던 '테드'가 그녀 앞에 나타나며 25년 전의 감춰진 이야기가 시작된다.
매일 끔찍한 아버지의 가정폭력 아래서 어머니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찍 주먹을 쥐어야 했던 소년 '요아르'
아픈 아버지와 그런 남편을 부끄러워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숨죽이며 살아온 '테드'
정착하지 못하는 삶 속에서 늘 불안을 견뎌야 했던 소녀 '알리'
세상은 그를 '천재'라 부르지만, 소년은 그저 물에 빠져 죽어가는 심정으로 붓을 쥐었던 화가 (C.야트)
가정폭력, 학대, 따돌림... 어른들이 망쳐놓은 세계에서 아이들은 잔교를 유일한 안식처로 삼았다. 실없는 농담을 나누고 서로의 흉터를 외면하지 않으며, 이들은 처음으로 "우리가 서로에게 가족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배운다.
읽는 내내 먹먹함을 주체할 수 없었던 건 아이들이 마주한 '어른들의 세계'가 너무나 잔인했기 때문이다. 왜 이 아이들은 매번 죽음을 생각하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할 만큼 벼랑 끝으로 내몰려야 했을까.
그 잔혹한 풍경의 중심에는 요아르가 있다. 끔찍한 폭력 속에 자란 그의 사랑은 예쁘지도, 다정하지도 않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 속엔 누구보다 깊은 헌신이 들어있다. 요아르가 없었다면 화가는 진작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폭력은 멈추지 않았고, 피투성이가 된 어머니를 더는 볼 수 없었던 요아르는 마침내 아버지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죽음과 함께 시작된 그해 여름은, 그렇게 또 다른 죽음과 함께 끝을 맺으려 한다.
배크만은 이 소설을 통해 말한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절에도 서로를 붙들어 줄 수 있는 한 사람만 있다면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고. 예술이란 대단한 평론가의 찬사가 아니라, 꺼지려는 희미한 불꽃을 꺼지지 않게 손으로 감싸주는 친구의 온기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열네 살의 우정은 사랑보다 치열하고 생존보다 절박하다. 요아르의 거친 사랑이 화가의 생을 붙들었듯, 우리에게도 그런 '잔교'가 필요할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상처를 숨기는 법만 배웠지, 견디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이 책은 그 '견디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서로에게 기대는 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가장 용감한 선택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화가의 그림이 운명처럼 가출 소녀 루이사에게 닿았듯, 우리 역시 영혼의 구멍이 닮은 이를 단번에 알아볼지 모른다. 그때 용기 내어 손을 내밀어 보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서로의 손을 움켜잡는 것, 그것이야말로 배크만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다정한 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