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 위의 가마괴
강지영 지음 / 나무옆의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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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 

이날도 어김없이 윤지의 비밀스러운 외출이 시작된다.


"너나 네 서방이나 똑같은 것들인데, 재수 없게 한 마리만 참교육하게 됐네.“


가정이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반복되는 비명, 

신고해도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 무력하게 멈춰 서던 공권력의 외면. 

그 틈새를 향해 날아가는 것은 검은 옷을 입은 '까마귀' 윤지다. 


디즈니플러스 〈킬러들의 쇼핑몰〉의 원작자 강지영이 내놓은 신작 소설 

『기린 위의 가마괴』는 이 서늘한 시작만으로도 독자의 숨통을 단숨에 조여온다.


"살아보니깐, 쥐어 터져야 낫는 병도 있더라."

낮에는 법무병원 간호사로 일하며 사회의 규범 안에 머물지만, 

밤이 되면 너클을 끼고 폭력의 가해자들을 '참교육'한다. 

그녀의 철칙은 명확하다. 

죽이지는 않되, 

그들이 저지른 고통을 고스란히 몸에 각인시키는 것. 

하지만,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개인이 실현하는 정의는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까마귀를 쫓는 수사망이 좁혀올수록, 윤지의 행보는 숭고한 구원과 위험한 범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탄다.


"기를 모아주세요. 서로 사랑해주세요. 정의를 실천하세요. 그래야 평화의 시대가 열립니다."

매일 아침 기린 모자를 쓰고 지하철 1호선의 기인처럼 행동하는 오빠 민기.

그의 외침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지만, 

사실 이는 도시의 부정한 에너지를 정화해 거대한 재앙을 막으려는 숭고한 액막이 의식이다. 

그러나 이 기이한 광경을 견디는 못한 사람들의해 기린 모자가 분실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모자가 사라지자마자 도담시에는 기괴하고 끔직한 재앙이 닥치기 시작한다.


"이제라도 자수하면 엄마를 찾을 수 있을까?"

"윤지야, 우린 작은 결함을 찾아 고쳐놓는 사람이야. 다리가 무너지기 전에,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에, 건물이 주저앉기 전에 예방하는 거지. 조용히 세상을 구하는 일이야.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잡혀선 안돼.“


히어로는 늘 멋있을 필요가 없고,

정의는 반드시 박수 속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이 소설은 아주 집요하게 보여준다.


현실과 환상, 폭력과 구원,

비장함과 우스꽝스러움이 교차하는 전개는

강지영식 서사가 가진 힘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특히 ‘폭력을 끊는 또 다른 방식’에 대한 질문은

읽고 난 뒤에도 오래 남는다.


강지영 작가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과 장소를 엮어 흥미로운 스릴러를 창조하는 데 탁월하다. 

이번 작품 역시 기린 탈을 쓴 광인과 밤거리를 누비는 까마귀라는 파격적인 설정을 통해 강렬한 서스펜스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다만, 이토록 매력적인 세계관과 캐릭터를 단권으로 끝내기에는 아쉬움이 컸다. 

도담시라는 무대에서 남매가 마주할 수 있는 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담겼다면 서사가 훨씬 풍성해졌을 것이다. 

전작 〈살인자의 쇼핑몰〉이 그러했듯, 이 작품 역시 연재작으로 확장되어 각 인물의 전사와 도시의 이면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망가진 세상을 구하려는 이들의 분투를 단편적인 에피소드로만 소비하기엔, 

그들이 짊어진 기린 모자와 까마귀의 날개가 너무도 묵직하고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고담시에 배트맨이 있다면 도담시에는 기린과 까마귀가 있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곁을 지나치는 기린과 까마귀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법으로 도저히 처벌이 안되는 법꾸라지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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