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긴 매듭
배미주 외 지음 / 사계절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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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달이 뜨는 밤에 남자를 먹는 거야."

"아이만 가지면 남자는 먹어도 돼."

"아이가 남자애면 아이도 먹어야지.“


어느 날 친모라며 나타난 의문의 여자

딸을 낳지 않으면 엄마는 죽는다며, 가능한 빨리 아이를 낳으라 말한다.

"지금 당장이면 더 좋겠지"

"최대한 빨리 해치우면 너도 그만큼 빨리 자유로워질 테니깐."

온의 나이 열세 살 이었다.


이 한 문장이 나를 붙잡았다.

《질긴 매듭》은 바로 이런 식이다. 다섯 명의 여성 작가가 모여 ‘모계 전승’이라는 화두를 파고들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질서와 가치관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책 속 인물들은 대대로 이어져 온 굴레와 저주를 직면하거나,

스스로 끊어내거나,

혹은 기꺼이 이어낸다.


〈이삭은 바람을 안고 걷는다〉 배미주

보이지 않는 노동자 이삭.

“아무 의미도 아니었다”는 존재가 연대의 온기로 존엄을 회복해 간다.


〈엄마의 마음〉 정보라

초경과 함께 시작된 저주.

“첫딸이 딸을 낳아야 한다”는 잔혹한 저주를 마주한 소녀 온은 이 저주를 끊을 결단을 하게 되는데...


〈행성의 한때〉 길상효

"이 진화는 틀렸어… 거기로 돌아가야 한다고.”

종이 아닌 개체를 볼 것’이라는 선언으로 진화의 방향을 거꾸로 묻는다.


〈거짓말쟁이의 새벽〉 구한나리

타인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는 소녀와 자매의 연대를 통해

“네 탓이 아니야”라는 말이 누군가의 새벽이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오랜 일〉 오정연

여성 대상 폭력의 현실 앞에서 기록되지 못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전하며,

목소리 외의 어떤 것도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진실을 증언한다.


《질긴 매듭》은 오랫동안 여성들의 삶을 얽어온 ‘모계 전승’이라는 화두를 새롭게 사유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

모계 전승은 단순히 피와 혈통의 계승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는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저주처럼 강요된 굴레이기도 하고,

때로는 끝내 이어가야만 하는 생존의 힘이자 연대의 끈이 되기도 한다.


다섯 편은 각기 다른 장르와 결을 지녔지만, 모두가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이어가고, 무엇을 끊을 것인가?”

이 물음은 단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세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해당된다.


사회가 여성의 몸에 부여해온 부당한 강요를 드러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노동자’의 존엄을 통해 사회가 지워온 존재를 복원하기도 한다.

또 타인의 고통을 감응하는 몸을 통해 연대의 가능성을 그려내며,

오랜 세월 이어져온 이야기의 원형을 현재의 폭력과 맞닿게 한다.


아마 이게 이 책이 가진 힘일 것이다.

결국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믿음.


《질긴 매듭》은 단순히 페미니즘 단편집이 아니다.

이는 오래된 이야기의 힘,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다시 엮어야 할 이야기의 방향을 가리키는 지도다.


나는 책을 덮고 나서도 여전히 마음속에서 묻고 있다.

나는 무엇을 물려받고, 무엇을 끝내 끊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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