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진 여름
전경린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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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일은 짐승의 아가리에 머리를 밀어 넣는 일과 같이 위험한 거야.

"어떤 놈이야?"
"미안해, 아마도 새로운 애인인가 봐.“

스물다섯 은령은 엄마의 재혼과 무기력한 연인, 무너져가는 현실 속에서 더 이상 기대거나 숨 쉴 공간을 찾지 못한다. 그리고 도망치듯 떠난 해안 도시에서 두 남자를 만난다. 관능적인 시를 쓰는 시인 유경, 값비싼 선물로 욕망을 드러내는 카페 사장 이진. 서로 다른 결핍을 가진 두 남자는 은령을 욕망과 집착, 파멸이 뒤섞인 소용돌이로 끌어들인다.

"내 인생에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남자란 없을지도 몰라.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살아가는 삶은 두려워.“

그녀에게 사랑의 경계는 어디까지였을까?
두 남자 사이를 오가며 흔들리는 은령의 모습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모순이야말로 전경린이 포착한 사랑의 민낯이다.
은령 앞에서 반복되는 관계의 아이러니는 결국 사랑을 안전한 안식처가 아니라,
불안과 불확실성의 아가리로 만들어버린다.

솔직하지 않아서일 뿐 대부분의 여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지 않아.
가부장 체제가 무너진 오늘날은 남자들도 사랑하는 여자를 갖는 일을 두려워해.

결국 은령 앞에 펼쳐지는 관계는 결코 온전하지 않다.
서로에게 이끌리면서도 끝내 다가가지 못하는 모순 속에서,
그들의 사랑은 더위 속에서 썩어가는 복숭아처럼 달콤하고 불쾌하다.


"너 나를 사랑하니?"
"아마도."
유경을 그리워하면서 동시에 이진과 더 깊은 쾌락에 빠져드는 은령.

여름, 술자리, 바다. 반복되는 대사와 시선의 어긋남. 관계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들.
전경린의 문장은 마치 롱테이크 카메라처럼 우리를 붙잡고, 불편할 정도로 적나라한 감정의 민낯을 응시하게 만든다.

달콤함과 부패가 공존하는 그 긴 여름밤 속에서,
은령은 결국 사랑의 진실을 마주한다. (마주한 거겠지?)
그것은 위로도 구원도 아닌,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야 작은방 안, 선풍기조차 켜지 않은 채 땀에 젖은 나를 발견했다.
충격적 결말에 한동안 멍해졌다.
두 남자는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그리고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너 나를 사랑하니?"

불쾌하면서도 매혹적인 여름밤의 공기 속에서 은령과 함께 끝없는 미로를 헤매는 듯한 몰입감에 사로잡힌 채, 나 또한 그 불온한 사랑의 테이블에 함께 앉아 있었음을 깨닫는다.


남녀 간에 일은 무어라고 말할 수도 확인할 수도 없는 거야. 사랑하고 결혼해서 애 낳고 평생 사는 부부들도 둘 사이의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 _p.301

"건배, 앞으로 우리가 저지를 모든 잘못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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