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벌거벗은 세계사, 한국사 방송을 즐겨 보던지라 이 책이 더욱 반가웠다. 분명히 방송으로 접한 내용인데도 책으로 다시 보니 왜 또 처음 본거 같은지 나 자신에 또 한 번 놀란다. 그래도 29명의 부인을 둔 왕건은 또렷이 기억난다는 거.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혼인으로 끈끈한 자신의 편을 만들기 위해 각 지역 호족과의 혼맥을 맺었다. 무려 29명의 부인이라니,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책략이었지만 후계자 선정을 둘러싼 부인들 간의 보이지 않는 암투는 예고된 바였다. 왕건 즉위 18년 만에 간절히 꿈꾸던 삼국통일을 이루고 고려는 500년 역사의 서막을 올린다.조선사도 재미있지만 뭔가 답답하고 꽉 막힌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 고려사 참 개방적이고 화끈한 맛이 있다. 특히 고려 왕실을 뒤흔든 충격적 애정 스캔들은 마치 1930년 당시 파격적이었던 김말봉 작가의 애정과 애욕의 갈등이 벌어지는 소설 <찔레꽃>을 연상케한다.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근친혼을 택한 고려 왕실, 배다른 남매가 근친혼을 통해 낳은 딸 천추태후와 승려 행세를 했던 김치양과의 은밀한 사랑 이야기, 천추태후의 여동생 헌정황후와 유부남 삼촌과의 불륜 이야기는 현대판 사랑과 전쟁 마랏맛을 보는듯하다. 혼돈의 한반도를 통일한 태조왕건의 특급 비책, 원나라 제1황후가 되었던 고려 여인 기황후, 공민왕의 비선 실세 노비 신돈, 믿었던 전우 이성계에게 목숨을 잃은 최영 등 끝없는 혼란 속 굳센 기상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려를 지켜낸 결정적 순간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안 밖으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세력들로 고려 궁궐은 피로 물들고 계속되는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은 궁핍해졌다. 책에서도 언급했듯 눈앞의 권력만 틀어쥐고 이것을 놓지 않으려 하는 마음이 급급하면 그 속에서 곪아가는 상처는 보지 못한다. 공민왕의 오른팔로 인생 역전을 꿈꾸던 문고리 신돈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고, 천추태후도 사랑하는 연인 김치양과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봐야 했고 폐위 당한 목종과 함께 유배지로 떠나야만 했다. 모든 권력이 한 사람과 한 세력으로 나올 때 그 끝이 죽음임을 역사는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