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룸 소설, 잇다 3
이선희.천희란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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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이선희 작가의 소설 <계산서>와 <여성 명령>은 나에게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1930년대, 여성의 삶을 이렇게 섬세하고 세련되면서도 감각적인 문체로 그려낼 수 있다니, 무엇보다 어려운 옛말조차 흐름을 전혀 방해하지 않으며 전개 또한 무척 흥미로워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그와 더불어 삶에 대한 첨예한 문제의식을 정교한 언어로 표현해온 천희란 작가의 <백룸>은 일상적 규범성이라는 틀과 억압에서 어디 있을지 모를 출구를 향해 나아가는 '나'를 그린다.


누런 벽으로 둘러싸인 방, 윙윙거리는 형광등, 어디 있는지 모를 출구를 향해 계속해서 방을 건너간다. 그저 평범하고 일상적인 공간이 무한히 펼쳐지는 공간, 자신의 위치나 시간의 흐름도 파악할 수 없다. 한참을 헤매다 발견한 창밖으로도 끝도 없이 펼쳐진 반대편의 창들만 보일 뿐이다.


작은 아이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방을 통과하는 게임을 하는 모습을 보고 도대체 저걸 왜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겨우 출구를 찾았다며 문을 열지만 결국 그곳은 새로운 레벨의 백룸이었고, 그것이 또 무한 반복된다. 옆에서 보는 거 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답답한데, 저게 그렇게 재미있을까?


그런데 게임 <백룸>을 소재로 한 소설을 만났을 때, 책의 해설처럼 게임의 공간과 규칙은 우리가 초월적으로 우리 삶을 목격할 수 있는 하나의 장면으로 제출된다. 무한히 반복되는 미궁과도 같은 현실 이야기가 곧 우리 삶의 화두와 닮아 있는 것이다. 알고 있지만 보이지 않고, 믿어야만 나아갈 수 있기에 무한히 이어지는 방을 계속해서 건너간다. 그곳에 어떤 위협이 존재할지 몰라도 살기 위해서라도 출구를 찾아야 한다. 가차 없이 죽음을 당할지라도, 다시 일어나 방을 건너고 죽고 살아나고 다시 걷는 거처럼. 하지만 현실이 게임과 다른 건 우린 언제든 주어진 규칙 자체를 파괴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삶을 운용하는 건 바로 '나'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세계의 전부가 아님을 알며, 이 시공간 안에 얼마간의 규칙이 있으며 그것을 따라야 함을 안다. 또한 이 공간 안에서 얼마간 방향감각을 잃음으로써 이 안의 규칙을 균질하게 적용할 수 없음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바깥에도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러나 더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고 믿어야만 지금 눈앞에 '보임으로써 믿어지는 것' 너머로 나아갈 수 있다. _p.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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