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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지키는 여자
샐리 페이지 지음, 노진선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3월
평점 :
보잘것없는 인생은 아직 말하지 못한 이야기일 뿐이니, 우리 모두는 이야기꾼이 된다
소설을 읽을 때면 항상 없는 사람처럼 취급되는 이들을 눈여겨보게 되는데, 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이야기는 질리지가 않는다. 예전에 읽었던 니타 프로스의 『메이드』가 그랬고, 수많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에서도 무시 받는 이들의 활약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번에 읽은 책, 『이야기를 지키는 여자』 또한 영국을 배경으로 무시 받는 직종에 종사하는 주인공 ‘재니스’가 틀에 박힌 역할에서 벗어나 그만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재니스는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청소 도우미로 일하며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그리고 그녀에겐 한 가지 특별한 비밀이 있다. 청소 일을 위해 고객들의 집에 방문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대신, 사람들의 이야기를 머릿속 도서관에 차곡차곡 정리한다. 그 이야기는 평범한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일을 하며 용감하고 친절하면서도 이타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종류의 것인데, 덕분에 재니스는 버티듯 현실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던 그 앞에 새로운 인물, B 부인이 등장한다. 부인은 여타 다른 고객들이 하지 않은 일을 한 가지 하고 마는데, 바로 재니스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자네의 이야기는 뭐야?’하고 말이다. 그 질문을 기점으로 재니스는 B 부인의 집에 출근하며 그의 이야기에 심취하게 되고, 서서히 ‘자신의 이야기’에 대한 시각이 흔들리게 된다.
이 소설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따뜻한 소설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다양한 인생의 조각들을 섬세하게 포착하는데, 재니스가 수집하는 이야기들은 단순한 일상의 단편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희로애락과 숨겨진 감정을 드러내는 무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이야기가 단순한 정보의 모음이 아니라 관계를 형성하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환기한다.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가 없는 주인공, 재니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외면한 자가 느끼는 공허함에 대해서도 말한다.
특히, 재니스와 B 부인의 관계가 흥미롭다. 처음에는 고객과 청소 도우미의 관계로 시작되지만, 점차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공유하고 치유하는 존재가 된다. B 부인은 직설적이면서도 따뜻한 조언과 삶의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재니스, 더 나아가 독자 스스로 인생을 다시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그 덕분에 책을 읽으며 우리가 얼마나 쉽게 자기 자신의 삶을 간과하는지, 그리고 타인의 시선을 통해 다시금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책은 차분하고 따뜻한 흐름 속에서 감정을 깊이 있게 전달한다. 비록 전개는 빠르지 않지만,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엮이며 깊은 공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는 분명하고도 소중한 것이었다. 우리의 삶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이야기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우리를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잔잔한 여운 속에 책을 돌아보며 나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 나누고 싶어진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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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니스는 어쩌다 자신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케임브리지 외곽을 가로지르는 출근 버스에서 슬쩍 엿본 누군가의 인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싱크대를 청소하다가 우연히 듣게 된 단편적인 대화 때문이었을까? (…) 이야기들이 스스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재니스는 그걸 차곡차곡 모은다. 재니스는 자신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주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그녀의 몸짓 역시 그녀가 아는 진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에게 재니스는 그들의 속내를 받아주는 소박하고 친근한 그릇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표시다.”
p.10
“그녀의 고객들은 (마이크와 달리) 대체로 그녀의 안부를 묻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영화, 음악, 날씨, 휴가에 대해. 재니스의 휴가 말고, 그들의 휴가.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인생에 대해 물어본 적은 없다.”
p.75
“어쩌면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이야기를 갖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훗날 되돌아보며 자랑스럽게 여길 일을 한 가지 해내는 것일지 모른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는 일.”
p.205
“자네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훌륭한 재능과 선함, 용기가 숨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이야기가 좋다고 했지. 그렇다면 악당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이야기도 몇 개쯤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해. 나는 악당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싶어.”
p.275
““하지만 이건 자네 이야기야, 재니스. 자네는 이 이야기를 해야만 해.”
“그런가요? 말하면 뭐가 달라질까요? 제가 결말을 바꿀 수도 없는데.”
“바로 그 대목에서 자네가 틀렸다는 거야.” B 부인이 간단히 말한다. 그러고는 말을 멈췄다가 덧붙인다. “남편이 좋아하는 철학자 키케로의 명언 중에 이런 말이 있어.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 암과 투병하는 동안 남편에게는 그 말이 필요했고, 도움이 됐지. 결국 암이 남편을 데려가기는 했지만.” B 부인은 팔을 뻗어 친구의 손을 잡는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친구를. “때때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약간의 희망뿐이야.”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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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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