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 - 우리 시대의 몇 가지 우스꽝스러움과 독재에 대한 고찰
앙드레 콩트 스퐁빌 지음, 이현웅 옮김 / 생각의나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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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올림픽이 한창이다. 뉴스는 온통 올림픽 소식으로 도배되어있다. 사람들은 그것에 집중하고 즐거워하며 함께 눈물 흘리고 황홀해한다. 다른 이슈는 잊히기 딱 좋은 시절이다. 물론 ‘주티야올’(낮에는 티아라 밤에는 올림픽)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로 ‘티아라 왕따 사건’이 부각되었지만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역시나 다른 현안은 묻히기 일쑤였기에.

 

이 와중에 집요한 관찰자들은 올림픽 이슈의 틈바구니에서 ‘컨택터스’라는 낯선 단어를 발견했을 것이다. 컨택터스란 경비업체 상호인데 몇몇 언론은 비록 적은 면적일지라도 지면에 그 이름을 올려놓았다. 그것은 왜 올림픽 소식만을 전하기에도 비좁은 언론의 지면을 파고든 것일까? 대체 무슨 사연이 숨어있는 것일까?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서는 컨택터스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컨택터스라는 ‘경비업체’의 주요 업무는 무엇일까? 이 업체는 민간군사기업을 표방하는데 인력을 최대 3000명까지 운영할 수 있고, 살수차, 작전차량, 시위진압용 특수견, 무인 헬기 등의 특수장비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서비스는 주로 파업현장에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그들은 국가폭력에 맞서 노동자를 보호하는가? 아니다. 기업 측에 의해 고용되어 다양한 파업현장에서 노조탄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그들의 업무다. 쉽게 말해 컨택터스는 현장에 용역깡패를 투입하는 업체인 것이다. 얼마 전에 그들은 자동차부품업체인 SJM 공장에 있었다. 사측이 폭력을 구매한 것이다. 당연히 파업 중인 노동자들은 얻어맞았고 이 사건이 문제시되며 언론에 ‘컨택터스’라는 이름이 오르게 된 것이다.

 

스스로를 ‘사람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휴머니즘 종합보안회사’라는 컨택터스,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에게 무참하게 짓밟힌 노동자들은 ‘사람’의 범주에서도 탈락한 것인가? 안타깝게도 그들에게 노동자란 ‘때려눕혀야 할 빨갱이’일 뿐이다. 한겨레는 이 사건을 두고 “이제 우리가 ‘폭력도 상품’인 사회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또한 “폭력의 구매자는 당연히 자본가이고, 폭력의 대상은 사회적 약자다. 돈 있는 자들이 돈 없는 이들의 정당한 요구를 짓밟는 데 폭력 상품은 이용될 것이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언제부턴가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더니, 이제는 폭력도 거래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체계적인 기업의 형태로 폭력 상품을 판매하게 된 것이다. 돈만 있으면 언제든 구입 가능한 사적 군대, 이는 우리 사회에 잔존하는 연약한 윤리마저도 말소시킬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다행히도 이 사건을 방관했다는 의심의 여론에 둘러싸인 경찰의 대응으로 컨택터스는 (일시적으로라도)소멸될 터이지만, 이 사건이 우리에게 던진 문제는 쉽게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윤리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실체가 외설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었기에. 이 사건이 어쩌면 우리 미래의 일상이 될 수도 있기에.

 

마르크스가 사망한지는 1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자본주의는 스스로 붕괴하기는커녕 더욱 밀도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유형과 무형, 물질과 비(非)물질을 막론한 상품화의 과정은 ‘윤리 없는 자본주의’의 면모를 강화한다. 거의 모든 것이 ‘거래 가능 품목’에 추가되고 있다. 폭력을 판매하는 컨택터스, 외모를 판매하는 성형외과, 학벌을 판매하는 학교, 성매매, 장기매매 등이 실현된 멋진 신세계, 가까운 미래에는 도대체 무엇까지 상품이 될 것인지 예측할 수조차 없다. 이러한 경향에 제동을 걸기 위함일까? 얼마 전 방한한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신간을 들고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남기고 떠났지만 우리는 명쾌한 해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단, 세상을 바라보는 이전의 태도는 그대로였다. ‘저것은 돈이 되는가?’, ‘돈 좀 되겠는데?’

 

 

윤리 없는 자본주의의 면모가 ‘거의 모든 것의 상품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얼핏 자본은 소비자를 돕기 위해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본은 소비자를 구원하는 시늉만 하지, 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특정 기업들이 전쟁, 지진, 쓰나미, 경제위기 등의 위기 상황을 이용하여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을 가리켜 ‘재앙 자본주의’라고 명명했다. 넓게 보자면, 기업이 개인이 자본주의적 일상에서 느끼는 고통, 불안감과 같은 심리기제를 이용하여 마케팅을 하는 것도 ‘재앙 자본주의’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으리라. 자본은 소비자의 갈등, 위협, 고통, 공포, 불안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는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다만 즐거움에서 고통까지 모든 것을 풍요롭게 만들어버렸다. 고통까지도 양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지금의 사회에서 누군가에게 고통은 필연이지만, 기업들은 그들이 고통을 감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대신에 ‘고통을 소비로 해소하라!’라고 떠든다.

 

기업에게는 소비자의 고통과 결여가 필요하다. 그래야 소비자가 상품을 필요로 하기에. 나는 이를 이용한 이윤 창출의 형태를 ‘고통 마케팅’이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이는 개인의 고통에 기생하는 자본에 대한 개념인데, 사회적으로 양산된 고통에 대한 해결책을 상품의 형식으로 제공함으로써 자본의 축적을 가속하는 기만적인 마케팅 전략을 이른다. 예컨대 최근에 성장한 힐링 산업의 경우도 소비자의 고통을 전제로 성장하는 고통 마케팅이다. 이러한 전략의 모순은 개인의 ‘신경증’, ‘스트레스’, ‘우울증’이 부재하면 수익 창출 아이템을 폐기해야한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자본은 부재로 인한 ‘손해’를 원하지 않는다. 모기가 멸종되면 더 이상 에프킬라는 필요 없어지기에 올여름의 모기 개체수는 늘어나야만 한다! 이들의 논리에 입각한다면 결국 고통은 없애야 할 것이 아닌 더 많아야 하는 것이다. 더 많은 고통은 더 많은 처방전의 판매를 보장하기에! 달리 말하면 소비자의 고통은 자본의 기쁨이자 가능성이다. 그렇기에 고통 마케팅은 고통의 뿌리를 캐내려하기 보다는 분노로의 전이를 잠재워서 은밀하게 현재의 사회구조를 유지시키는데 이바지한다. 즉 근본적인 정치의 목적인 사회 조건의 재배치는 일어나지 않는다. 자본에게 윤리란 ‘제약’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윤리의 집’이라 믿는 민주주의의 원칙과도 호환성이 그리 높지 않다. 이는 1인 1표와 1원 1표의 원리 사이의 괴리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자본은 윤리로 불리고 싶어 한다. 정확히 말하면 윤리가 되어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앙드레 콩트 스퐁빌은 말한다. “자본주의를 하나의 윤리로 만들려는 것은 시장을 하나의 종교로, 기업을 하나의 성상으로 만들려는 것과 같다.” 시장이 지배적인 종교로 작동하는 사회, 그러나 부의 민주적 분배는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부의 분배’ 자체는 일어났다고 할 수 있는데, 분배의 방향은 민주적 분배와는 정반대로, 빈자들이 부자들을 돕는 우스운 꼴이 연출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당함에 대한 문제제기는 효력이 미미하다. ‘자본주의’의 대안은 없다는 합의에 다다르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은 문제다!’라는 의견은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스퐁빌의 말처럼 결국 “그 체제가 싫든 좋든 간에, 우리는 모두 그것을 경험하며 살아”가야 할 판이다. 놀랍게도 아직 자본주의를 절대 악으로 규정하고 체제 전복을 꿈꾸는 급진적인 세력도 있지만 그들의 전략은 불임의 전략이다. 대다수의 개인에게 자본주의의 이미지는 ‘악’으로조차 합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처럼 자본주의를 절대 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자본주의는 찬양 받기도하고, 비판적 지지를 받기도 하고, 필연적인 것으로 공기처럼 다루어지기도 한다. 즉 자본주의에 대한 가치판단은 쉽게 정합될 수 없을 만큼 다채롭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자본주의의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전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규정과 몰아세움보다는 질문을 던져 그것이 정말로 ‘문제’라는 것, 정확히 어떠한 속성이 문제인가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인데, 가령 스퐁빌이 던지는 질문은 생산적이다: “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

 

자본의 치밀한 인상관리에도 불구, 견제 받지 않는 자본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임은 분명하다. 심지어 에드워드 러트윅이 ‘터보 자본주의’라고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드라이버는 여전히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그만큼 뺑소니도 빈번해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자본의 신형 엔진을 우리는 신자유주의라고 부른다. 그것은 편향적인 설계로 인해 ‘복지’의 실패라는 결과와 더불어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 도장까지 찍으며 약속했던 ‘부의 성장’도 지키지 못했다.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세계적인 경제학자들이 가세했음에도 그들은 왜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것일까? 신자유주의 대한 기념비적인 저서를 내놓은 데이비드 하비는 “신자유주의화의 본질적이고 주된 업적은 부와 소득의 창출보다는 재분배에 있었다.”고 밝히는데, 주의해서 봐야할 단어는 ‘재분배’이다. 여기에서의 재분배란 최근에 활발히 논의되는 ‘경제 민주화’로 일컬어지는 재분배와는 달리 피라미드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분배를 뜻하는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화는 반(反)경제 민주화인 것이다. 각종 협약에 의해 자본에 ‘성가신’ 노동자들은 사용자 마음대로 “일회적으로 사용하고 처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구조 개편은 수익에 불필요한 노동을 ‘쓰레기’로 분류한다. 이 ‘인간쓰레기’들은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다. 하비에 따르면

 

 

“시장 체계에서 버려지거나 또는 외부로 던져진 사람들에게 빈곤, 기아, 질병, 절망을 제외하고 신자유주의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한국의 맥락에 닿는 분석은 사회비평가 박권일에게서 나왔다. ‘인간쓰레기’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더욱 가열 찬 경쟁에 뛰어드는데 그에 따르면

 

 

“다같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아름다운 시절은 끝나버렸다. 이제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부자 아빠냐, 아니면 자살하는 아빠냐”

 

그러나 자본과 노동의 불화를 조장한 이 범죄는 오래갈 수 없었다. 바로 ‘전지구적 경제 위기’라는 역풍을 맞게 된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위기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기이기도 하다. 영원할 것만 같던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 끝에서 맹렬하게 진동하고 있다. 마치 금방이라도 붕괴할 것처럼 말이다.

 

결국 지금은 자본주의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좋은 시점이다. 특히 박탈당한 사람들이 직접 그것의 배제적인 특질에 대해 이야기하기 알맞은 시점이다. 어제의 자본주의는 분명 누군가에게는 특권을 주었다. 그러나 특권은 배제의 자리를 함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제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길거리로 쫓겨난 노숙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동안 ‘길거리에 나앉은 노숙자’라는 장면은 너무도 당연시 되어왔다. 이러한 극단 말고도 ‘배제적인 것’은 편재한다. 차별과 배제는 사회적 공기가 되었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 목소리가 없는 사람들, 몫 없는 자들의 범주가 점진적으로 확장되더니, 이제는 거대한 무리가 되었다. 아직 자기는 배제되지 않았다고, 언젠가는 특권을 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미 배제된 사람들을 ‘나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좀비’처럼 재현하지만 좀비가 너무도 많다.

 

 

이 상황이 윤리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다시 스퐁빌의 의견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라는 책을 통해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는 윤리와 관련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이상 윤리의 부재는 필연이라는 것일까? 그는 이러한 의문을 상쇄하기 위해 덧붙여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는 윤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우리가 윤리적으로 되어야 한다.(...)우리가 경제와 윤리 둘 모두를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윤리가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가 (특히 자본주의가)윤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결론이다. 얼핏 자본주의적 경제구조가 유일한 경제구조라고 생각하는, 자본주의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설파하는 것 같지만 우리는 이 ‘윤리’를 바탕으로 자기규제가 아닌, 윤리에 앞서는 정치를 기획하여 더 나은 경제구조를 모색해야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정치는 우선 질문을 필요로 한다. 2012년의 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일하고, 저축하고, 소비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즉 누구든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에 접속해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질문은 누구든 할 수 있다. 누구든 자신의 삶과 연계하여 자본주의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다. 그 질문은 현재의 고통을 게워내기 위해서라도 시급하다. 자본주의에 대한 질문이 시급한 이 시간, 앙드레 콩트 스퐁빌의 <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는 ‘치명적인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다. 물론 질문의 내용은 전적으로 당신의 몫이다. 함께 자본주의에 대한 유효한 질문을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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